1993.5 | [문화시평]
살맛 나는 세상을 향한 신명의 걸음들
-백산봉기 99주년 기념 걷기 대회를 보고-
김판용/ 시인.고창고 교사
(2004-02-03 15:16:03)
호남벌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회(이하 동백사)가 백산봉기 99주년에 맞춰 마련한 걷기 대회는 보통의 집회가 군중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대학이나 시내번화가에서 열리는데 반해 허허벌판에 사람들을 불러모은 의미 있는 행사였다. 더구나 빈손이 아닌 참가비까지 내고 덤비는 적극성을 보인 점에서 천여명의 발걸음은 희망과 신명에 취하는 황홀감에 젖어 있는 듯 했다.
세월은 변했다. 허기진 배를 죽창으로 말나 쥐거나 감물 들인 마포에 색띠를 두르고 화승총을 찬, 그날 농민의 군상들은 아니었다. 색색의 야유복에 베낭 그리고 간식의 빵과 주먹밥 보다 잘 차려진 도시락의 점심, 풍물장단에 어깨춤가지 어우러진 오늘이 길을 열기 위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채석작업으로 허물어져 가는 백산에 운집한 700여명의 함성은 ‘호남창의 대장소’ 이후 최대였다. 묵념을 마치고 지형과 역사에 대한 설명이 끝난 후 장도에 올랐다. ‘가자! 황토현으로’
특별히 이번 행사를 위해 집행부에서 찾아낸 답사로를 따라 걸었다. 야산 기슭에 핀 진달래와 이팝꽃의 흔들림이 무리를 환영하듯, 세상 가누는 보리꽃이 쓰린 타액을 분비하며 보리고개의 처절했던 시절을 전하듯 다가왔다. 쌍쌍이 손을 잡고 걷는 사람, 아장아장 아이의 걸음걸이를 보고 흐뭇해하는 젊은 부부, 아들 딸에게 부축 받으며 따르는 노인들 모두가 한 길이었다. 한 길의 어울림은 봄물결이었다. 그들의 걸음 위에 사월은 더 화사하게 일렁이며 풍만한 들녘을 준비하고 있었고 하늘에 제비 몇 마리쯤 띄우는 걸 잊지 않았다. 쉽지 않은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의 길이 가볍게 내뻗는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솔직히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모두들 의아해 했었다. 가령 성공할 수 있을까, 전날 발표된 보궐선거 투표율로 보나 지난 대선 이후 이 지역의 정서로 미루어보나 대중이 움직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무것도 없는 망망 벌판에 말이다.
‘동백사’가 구성되면서 내건 중요한 의미는 현재적 조명이었다. 조소마을 고택에서 한 시대의 영웅과 쓸쓸한 조회를 하고 황토현에 이르러 어느 국회의원의 열변을 듣는 동안 그들의 지켜 앉은 황토의 존재를 다시금 새기는 듯했다.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 자주의 시대를 열고자 했던 하나, 백년동안 이어진 눈물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하나, 내 자손에게 살맛나는 나라를 물려주고 싶은 또 하나의 소망.....
그들의 정성이 여기에서 일치하고 있었다. 강보에 싸인 아이부터 학생, 노동자, 농민, 전문 직장인까지 일손을 거둔 노인들까지 하나되는 대동의 진군은 집행부의 우려를 말끔히 씻게 함은 물론 동백사가 더 대중속으로 파고들어 그들과 뒹굴며 일을 찾아내야 한다는 커다란 과제를 안겼다. 이렇게 살맛나는 세상을 향한 몸 신병의 발걸음들과 그동안 빼앗겼던 소중한 역사를 새기는 반성의 자리로 걷기대회는 자리매김한 것이다.그 열기 하나만으로도.
옥에도 티가 있다. 걷기대회 참가자들이 던져 놓은 더 잘하라는 숙제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지적을 해야겠다. 출발부터 진행위원들이 행로를 찾지 못해 버스 도착이 늦어지고 전체가 한자리에 모이지 못한 점은 아쉽다. 또 진행에 있어 사전에 준비가 미흡했던 점이다. 백산의 채석장 문제를 심도있게 지적하지 못했고 ‘격문’ 마저도 공식적으로 낭독하지 못했다. 미리 진행자를 정해 역할 분담을 시켰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가는 중간중간에 정겨운 마을과 산 그리고 골물들에 대한 설명을(이름만이라도) 하면서 진행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무작정 걷느니보다 무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발을 옮길 수 있는 꼼꼼한 기획이 아쉬웠다. 문화공연은 실망이었다.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에 나온느 이름 풀이만도 흥을 돋우지 못했다. 대중에 걸맞는 사회자가 아쉬웠다. 기존 집회에서 써먹은 구태성으로 그런 대중을 이끌 수는 없을 것이다.
여러문제를 갖고도 걷는 길은 위대했다. 감히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으랴, 100년 동안의 긴 행렬을.....
그것도 벅찬 세상을 향해 가는 신명나는 발걸음이었음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