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5 | [문화시평]
본원적인 인간의 가치와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도병락 개인전」
김선태/전주대 강사.미술사학
(2004-02-03 15:16:49)
현대의 정신적 사조는 근대서구의 물질주의와 과다한 실용성과 정치, 경제, 문화적 제이념의 갈등 현상으로 말미암아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인간적인 심성의 정신세계를 상실하고 있다. 한스 제들마이어(Hans Sedlmayr)가 「현대는 정서적으로 앓고 있는 한 시대」라고 진단 하였듯이, 현대인은 과학과 문명의 미명하에 형성된 대중사회에서 고립된 하나의 분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현대인은 분업화된 자신의 정신세계로부터 부단히 탈출하려고 자아 발전의 몸부림을 하고 있다.
지난 80년대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념의 수용과 투쟁이 거세게 일었고, 그 이념에 휩쓸리고 부합하는가 하면 ‘이념에 대한 혐오’를 낳아 이념에서의 도피라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미술계에서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그 나름대로의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특히 모더니즘 계열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대다수의 작가들은 이념을 벗어나서 이념 너머에 있는 ‘문명과 신화’ 또는 ‘신비와 상상’의 세계에 일정부분 탐닉하고 있다. 80년대 중반이후 급속도로 확산된 선사상과 신비주의 서적 그리고 노자와 장자의 붐, 라즈니쉬와 기철학 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바로 그러한 징후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화가 도병락의 작품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사회나 역사 발전의 모순들을 앞질러 내다보고 문제시 하거나 경고하고자 하는 성급한 판단이 없다.
그의 회화는 문명과 신화, 인간 역사의 흔적, 공간과 시간의 초월성, 유적과 유물 등을 고고학적인 분위기로 감싸면서 문화, 문명, 인간 삶의 본원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이념적, 물질적 지배의 욕망에 의해 상처받고 흠집을 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인 일깨움을 주려는 의도가 잠재되어 있으며 인간의 영혼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사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화면에서는 형상을 떠올리는 격렬한 몸짓이나 또는 사실적인 치밀한 묘사에 대한 의지보다는 오랜 풍화에 박락되고 퇴락된 분위기의 표현적인 마치에르와 독특한 색감등이 공존하고 있다. 그 화면은 원시시대의 동굴 벽화 및 암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 본연의 심층적인 감정을 추구하고 있다. 형상과 기호의 상징공간 혹은 밀도 있는 회화성이 농축된 세계가 그의 화면이다.
소재로써 자주 등장하는 형상은, 우주적 공간에 파묻힌 인체 및 토르소, 종의 형태, 비상하는 새의 모양, 소라 껍질, 숫자와 기호, 상징적 도상들이 자유롭게 부유하고 있다. 이러한 형상은 그의 작업에 내재하는 삶의 근원적 원천 즉, 자신의 체험, 기억, 욕망, 자유.....등을 기반으로 한 모든 의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생성 변모하여 지속적으로 존재하는가에 관한, 인간 의식의 일체와 연관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표현 감정만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는 원시적인 표현 기법은 그것이 비록 인위적인 행동의 결과일지라도 자연적이고 유기적이다. 최소한의 형태 묘사만으로도 회화적인 요건을 충족시키는 원시적인 표현에서 원초적인 회화의 성립요건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이 같은 원초성을 기로로 한다. 꾸밈을 최소화함으로써 한층 자연에 접근하는 표현의 순수한 가치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표현은 세련되었다거나, 고상하다거나, 인위적이라는 등의 인식의 냄새를 제거하는데 겨냥된다. 이것은 또한 서양식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보다는 동양의 비논리적인 명상적 조형 언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조형 언어는 구상적인 형식과 추상적인 형식의 결합,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의 조우, 현실과 관념, 고전과 현대의 만남등, 이중 구조로서 이루어져 있다. 이분된 양면법을 한 화면에 통괄한 조형법을 보여주며 고도의 정신세계를 추구한 듯한 고격의 동양정신을 수렴하므로서 하나의 새로운 조형장르로 주목 받게된 것이다.
오늘의 문화는 존재의 풍요로움을 상실하므로써 생명의 신선한 원초적 힘과 신비를 잃고 말았다. 존재의 의미는 물질적 차원으로 전락해 버리고 모든 사물의 의미는 빛이 바래고 피상적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의 정신을 피폐화 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도병락의 작품은 조용하면서도 끈기있게 이와 같은 상황에 대처해 나가고 있다. 그의 조형언어는 시대를 초월하여 맥맥히 흐르고 있는 영원한 인간의 염원과 원초적 생명의 힘을 반영한 듯하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존재의 신비와 영원한 꿈을 새롭게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고고학적 분위기의 세계는 도시속의 인간의 소외와 갈등, 불만과 억압의 상황에서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져다 주었던 모든 문명의 질곡에서 벗어난 소박하고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세계 같기도 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우리시대의 위기구조의 본질과 삶의 질적위기. 생명의 위기 그리고 훼손된 영혼과 개체의 무의식에 스며있는 미시권력 등이 방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그에 대한 반성적 작업이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유기적인 관계로 바라보려는 총체적 새계관을 요구하는지도 모르며, 그런 의미에서 도병락이 추구하고 있는 작업세계는 나름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감싸안고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작가 도병락은 궁극적이고 본원적인 인간의 가치와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 자기 완성 또는 자기구현을 동시에 지니면서 인간의 서정성이 담긴 심적 공간을 유추해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