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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5 | [한상봉의 시골살이]
징게 장날
김유석/시인 (2004-02-03 15:21:36)
정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아침을 안치기엔 이른 새벽인데 정지에 딸린 땅광과 뒷울안을 살풋살풋 밟아가는 발자국 소리, 그것은 당신만의 은밀한 장소를 더듬어서 조금씩 아껴두었던 그 무엇인가를 꾸리는 어머니의 것이었다. 삐걱이는 문짝이나 쓰륵거리는 항아리 뚜껑 여닫는 소리가 아니어도 그런 날이면 우리들은 벌써 깨어 어머니의 공연한 비밀을 엿들으며 어머니가 꾸리는 마음 속으로 몰래 숨어들곤 하였다. 날이 새면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진행되었던 어머니의 작업은 몇 개의 꾸러미로 말캉에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못 본체 했지만 때로는 자전거로 동구밖까지 바래다주기도 했던 그 보따리들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우리들은 훤히 알고 있었다. 그 속에는 들콩이며, 들깨, 한 쪽씩 아껴먹는 마늘 한두접이 으레 들어 있게 마련이었고 어떤 때는 고추 몇 근, 젖을 뗀 강아지 두어마리, 그리고 윤기배인 어머니의 머리카락 몇 올이 끼어 들기도 하였다. 일찌감치 조반을 물린 뒤, 앉은뱅이 거울 앞에서 분을 찍고 가르마를 타는 어머니 무릎에 바투 붇어 우리들은 어머니를 한사코 졸라댔다. 마침 방학중이거나 공휴일이라도 겹칠라치면 어머니를 따라 읍내 장구경을 가보고 싶은 호기심이 며칠 전부터 손을 꼽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따라나선 징게장. 날받아 오르는 빼곡한 만원버스에 끼여 밟히는 발등이 아프기도 하고 우리들의 차삯을 놓고 덤으로 태우려는 어머니와 에누리 없는 차장이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겸연쩍기도 했지만 몸보다 마음이 먼저 내리는 장터 풍경은 얼마나 즐거웠던가. 씨끌벅적한장터 초입에는 장날을 목받고 나온 약장수쇼가 한창 흥을 돋구는 중이었다. 달무리 짜듯 빙 둘러선 어른들 허리춤에 가까스로 매달려 공짜로 구경하던 그 신파극은 채 끝나기도 전에 바삐 걸음을 나꿔채는 어머니의 손을 돌아올 때까지 야속하게 만들었다. 또한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곡마단의 풍악소리와 곳곳에 나붙은 극장의 벽보들은 우리들의 꿈과 호기심을 오래도록 발쿰치를 들고 서있게 만들었고 난생처음 먹어보는 짜장면은 한동안 동네 아이들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몇 군데 단골을 들러 꾸려온 것들을 사고자 하는 물품들과 맞바꾸거나 했다. 마늘은 아버지 작업복이 되었고 계란 꾸러미는 우리들의 껌정고무신이 되었다. 말하자면 물물교환인 이러한 풍경은 장터 곳곳에서 목격되었으며 값차이가 나는 물건에는 웃돈을 얹져 치렀다. 때로는 좌판을 벌이기도 하고 영 흥정이 붙지 않은 강아지를 도로 안은 채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장보기는 늘 풍성했다. 오랜만에 돼지고기 한근도 챙겨들고 우리들의 박하사탕 봉지도 잊지 않는 어머니의 장보따리는 나갈 때보다 돌아올 때의 머리가 더 무거워 보이곤 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어머니를 채근하던 우리들의 버릇은 어머니의 무릎에서 멀어져갔다. 어쩌다 읍내에 나가도 장터보다 극장근처를 서성거릴 쯤엔 벌써 중학생이었다. 장을 보러 갈 때면 궂이 장날을 날받고 손에 무언가를 들어야 하는 어머니의 고집은 여전하셨지만 우리들은 이미 새벽녘 뒤안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비밀스런 작업을 더 이상 엿듣지 않았다. 장에서 돌아오는 어머니의 장보따리에 대한 설레임을 헌옷 물려주듯 고스란히 동생들에게 물려주고 떠나버린 어린날의 징게장. 얼마나 많은 세월이 팔고 팔리워 우리들의 추억이 되었는가. 봄볕이 씨앗처럼 떨어지던 며칠전, 색바랜 보자기 같은 어머니와 함께 제수를 마련하러 한바퀴 둘러본 장터는 우리들의 성년이, 삶이, 얼마나 무색한가를 말해 주는 듯 싶었다. 농사철에 접어든 까닭도 있겠고 행정당국의 조처인지 어떤지 노점상 좌판대를 말끔히 철거해버린 탓도 있겠거니 싶어 건성으로 비켜나오는 동안 웬지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는 쓸쓸함 같은 것을 내내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북적거려야 흥이 나는 장터분위기나 주인이 바뀐 단골집에서 느껴지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닌 뭐랄까,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 혹은 나의 삶이 마치 타인의 그것처럼 느껴질 때의 물컹한 정서랄까. 무엇보다도 그러한 느낌은 생기가 없어보이는 행인들의 얼굴에서 반사되고 있었다. 한결같이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진 표정이다.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의 흥정도 맥이 없어 보이다. 기백원을 놓고 깍고 깍이지 않으려 실랑이를 벌이던 정감어린 모습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다. 주인은 적당히 입발림을 하고 손님은 뻔히 짚어보면서도 그쯤해서 넘겨주는 그런 분위기는 없고 대개의 흥정이 단도직입적이다. 예전처럼 맘에 드는 물건을 고른 뒤 값을 놓고 밀고 당기던 얼굴들은 도통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흙 빛깔의 정을 나누어 가지고 단골이 되었던 사람들, 차 삵을 빼주거나 우수리를 듬뿍 얹져주던 주인과 여간해선 단골을 바꾸는 일이 없던 그때의 사람들이 이제는 드물어진 것이다. 다른 또 하나의 느낌은 농산물 값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여타의 물가에서 오는 패배주의적인 정서이다. 며칠 새에 절반가량 오른 생선값은 어물전 주인의 표정조차 곤혹스럽게 만들고 허드레옷 한벌에도 지갑이 빈다. 예전엔 쌀 한가마 사서 장에 나가면 구하지 못할게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쌀 몇가마 사서 장을 보아도 항상 뒷돈이 모자란다. 목돈을 푼돈으로 바꾸었을 뿐 장보기를 마치고 나면 웬지 허전하고 누구에겐가, 무엇엔가 속은 듯한 느낌에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이다. 싸디싼 것이 흙에서 나오는 것들이란 말을 다시 한번 입증시키는 오늘의 징게장. 살 물건이 없어도 단골집을 돌아가며 얼굴을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희미한 유년의 기억이나 흠쳐봐야 하는 우리들의 삶과 나날이 도태되어 가는 우리들의 고향을 다시금 따뜻이 감싸안기 까지는 여기서 얼마나 더 세월이 흘러야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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