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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6 | [특집]
우리 음악에 대한 편견 극복 판소리와 영화 「서편제」
유영대/전주우석대 교수 (2004-02-03 15:37:32)
앞으로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쌍꺼풀진 눈매가 예쁘다고 알려져 너나 없이 눈두덩에 칼을 대지만, 드디어 외꺼풀이 쌍꺼풀보다 예쁜 것임을 알아 모든 쌍꺼풀가진 이들이 외꺼풀로 봉합하려 몰려드는 날이. -郭琢陀- 소릿재의 고개 위에 있는 廢家 방안에서 여주인공인 송화가 노래하고 있다. 그 여주인공은 눈이 멀어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눈을 뜨고 있다. 어둑한 방에서 소리를 하는 오정해의 외꺼풀진 눈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그 눈이 아픔답다고 이 글의 독자를 꼭 설득하고 싶은데 그냥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공감을 주지 못할까봐 두렵다. 孔子님이나 k 翁 등이 남긴 멋진 경구를 글머리에 먼저 인용하여 글의 권위를 부여하는 kk 의 레토릭이 아주 재미나다. 나는 이번에 꼭 이렇게 권위있는 경구라도 하나 내세워 내 견해를 설득력있게 전하고 싶다. 그래서 괴테나 하이데거를 다시 들쳐보기도 하였는데, 마침 중국의 저명한 철학자 곽탁타가 나무를 심으면서 한 말이 생각나 글머리에 내세우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곽탁타의 권위를 생각해 주기 바란다. 요즘 영화 「서편제」가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판소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아울러 높아져서 참 반갑다. ‘서편제’니 ‘동편제’니 하는 말은 판소리의 전승과 미학적 지향이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데서 구분지워진 개념이다. 판소리는 전승된 지역에 따라 가창방식과 소리 놓는 법 등이 일정하게 차이가 난다. 섬진강 동쪽의 남원이나 구례에서 전승되는 호방한 남성취향의 분위기가 강한 소리를 동편제라고 하며, 섬진강 서쪽의 나주나 광주에서 전승되는 애절한 느낌이 강한 소리를 서편제라고 일반적으로 칭한다. 이 영화 「서편제」는 어느 소리꾼이 살았던 해남의 고갯마루가 무대이다. 「서편제」는 이청준과 임권택의 예술론을 담고 있다. 판소리가 이미 소멸될 운명의 예술임에도 그것을 붙들고 있는 판소리 광대들의 자세를 통하여 전통의 의의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무릇 예술이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한’이라는 것을 내재적으로 초월하여 완미한 것으로 이루어내는 행위이다. 그 누구의 삶이든 태어나 산다는 것에서 생겨나는 여러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나 방법에서 예술과 비예술의 결과가 보여진다. 주어진 현실을 멋지게 극복해내는 것이 어려운 정황일 때, 그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갈등을 내재적으로 초월하고 승화시켜 완미한 그 무엇을 창출해낸다는 일은 평범한 삶을 영위하면서 별로 힘들지 않게 사는 사람들의 몫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이 영화는 한을 맺고 푸는 사람들의 삶이 잘 담겨 있다. 「서편제」를 감독한 임권택은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고향 이야기를 다루셨네요”라고 묻는 사람에게 “고향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전통 예술의 아름다움을 그렸다”고 말했다. 이 말은 참으로 지당하다. 임권택은 단순히 판소리를 영화로 만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판소리라는 kk을 통하여 예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말해준다. 가슴에 품은 한을 초월해가는 방식이 바로 예술이며, 그런 점에서 판소리도 예외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임권택은 판소리를 수단으로 자신의 예술론을 말하고 있다. 이 「서편제」는 그런 의미에서 판소리 영화만은 아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갈등이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혹은 초월되어야 하는가’를 정면에서 다룬 정치 영화이다. 「서편제」는 에로스를 담고 있다. 얼핏 보아 이 영화는 소멸해가는 우리 전통의 아름답고 진정한 가치를 말하고 있다. 고수인 동호의 북 반주로 송화가 시장 한구석 국밥집 앞에서 불과 몇 명의 청중을 두고 「흥보가」를 부르고 있을 때, 어느 극장의 영화선전을 위하여 부라스 밴드가 거리연주를 하면서 다니자, 부라스 밴드의 주변에 사람들의 호기심이 쏠리는 것은 아주 재미난 대조이면서 우리 판소리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이같은 병존이 시대적 고증에 부합하느냐’하는 문제는 논란이 되겠지만 영화적 기법으로는 재미나다. 의례 전통예술이 가진 말의 뉘앙스는 고리타분한 것, 별볼일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다분하다. 그럼에도 우리 판소리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아주 잘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루 하여금 아주 의미있는 전통예술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서편제」는 판소리 영화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된 갈등은 사랑에 있다. 아버지와 의붓딸, 배다른 오누의 사이에서의, 근친간의 은밀한 사랑을 교묘하게 병치시키고 있다. 이 작품의 주된 갈등은 사회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이렇게 본연적인 근친간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려준다. 삼각관계와 질투, 딸을 곁에 두기 위하여 약을 먹여 눈멀게 하는 장면 등도 아주 뛰어난 복선이다. 나중에 아버지는 소리의 완성을 위하여 아버지가 딸의 눈을 멀게 한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사랑) 때문에 결국 동호는 집을 나서게 되며, 나중에 내내 소리내는 눈먼 누이를 찾아다니는 것도 누이에 대한 동호의 사랑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은 마지막 장면에서 우여곡절 끝에 만나게 된다. 눈먼 누이는 소리를 하고 그 누이를 찾아다닌 남동생은 북반주를 한다.「심청가」의 ‘부녀상봉’ 대목과 주인공인 동호와 송화의 상봉 대목이 완벽하게 대위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 북과 소리의 관계는 “그날밤 두 사람이 북을 치고 소리를 하는 것이 마치 雲雨之樂을 누리는 것 같았다”라는 나레이터의 해설이 암시해주고 있다. 소리하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비치면서 소리는 사라지고 대금과 신디다이저의 맛이 잘 어울어진 ‘천년학’으로 대치되는데, 이때의 상황과 음악이 적절하였다. 이 영화는 판소리라는 예술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이같은 근친간의 사랑을 속내 깊게 처리하고 있다. 영화「서편제」의 음악에 대하여 좀 더 말해야겠다. 이 작품은 김수철이 음악을 맡았다. 그가 새로 만든 곡으로는 ‘소리길’과 ‘천년학’이 있고 전래하는 판소리 몇 대목과 ‘진도아리랑’, 단가인 「이산저산」도 편곡하여 살리고 있다. ‘천년학’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신디와 박용호의 대금이 아주 잘 어울어진다. 부드러운 박용호의 대금 소리는 마음에 한점의 갈등도 없는 것처럼 잔잔하기만 하다. 이에 비하면 역시 박용호가 소금으로 연주하는 ‘소리길’은 격정이 담겨있다. 오정해의 소리는 뻣뻣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들을 만하다. 초년 소리여서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으나 질러내는 소리 맛이 돋보인다. 주인공인 송화의 소리가 어느정도 완성되었을 때는 오정해 대신 안숙선의 소리가 더빙되었다. 영화의 끝부분에 「심청가」의 ‘범피증류’ 대목이 나오다. 동호가 술집작부로 전락한 누이가 있는 곳을 드디어 알아내어 찾아갈 때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급박한 소리가 나온 후, 갑자기 잔잔해진 바다를 묘사하는 ‘猫蒼海之’ 대목이 나온다. 성숙한 송화의 곰삭은 소리를 위하여 안숙선을 선택한 것이 참 좋았다. 김명곤의 소리는 득음의 경지를 이루지 못한 한 소리꾼의 소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와 아주 부합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압권인 음악으로는 김소희의 ‘구음 시나위’를 들 수 있다. 캐스트와 스탭의 이름이 떠오르는 장면에서 나오는 김소희의 구음이야말로 소리의 완성을 보여주는 멋진 장치이다. 이 ‘구음 시나위’는 김덕수네 사물놀이와 어우러지는데, 구음이 장단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엇걸어 나온다. 마지막 이 소리야말로 가장 완미한 우리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어서 「서편제」음악의 압권이며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음 시나위’는 시중에 나와 있는「서편제 영화 음반」에 실리지 않아서 섭섭하다. 영화 「서편제」에 쓰였던 음악이 우리 전통음악의 진수나 전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음악을 다루는 이 작품에 관객이 예상외로 많았고, 매스컴의 각광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일말의 안도감이 생긴다. 그것은 우리 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편견을 극복하고 정당한 것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이는 외꺼풀이 아름답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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