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6 | [특집]
센치맨탈리즘속에 피는 역사의식
김옥희/자유기고가
(2004-02-03 15:39:09)
Ⅰ.
영화 「서편제」에서 연출자의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생각이나 거기에 담고자하는 뜻을 얼른 찾아 내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느낌은 더러 있어서 여러 가지로 만든이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보이지만 그것을 한마디로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다 상당히 어렵다는 뜻이다. 아마도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큰 줄기의 무거움 때문이 아닐까. 또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비단 이 영화 뿐만 아니라 모든 영화가 이야기를 쓴 사람이나 만드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생각이야 우선 그만 두더라도 연출자의 손에서 1시간 내지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려줄 때 제일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감동〉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영화 「서편제」의 감동은 무엇일까. 영화를 다 보고 극장문을 나서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이며, 며칠후에 길거리에서 「오정해」의 모습이 크게 그려진 영화 포스터를 불쑥 대했을 때 오는 느낌은 또 무엇일까.
영화 「서편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가오는 느낌은 멈추어 잇는 삶의 답답하리 만큼의 어두움과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슬픔 같은 것이다. 밝고 떠들석한 놀이에서 이루어져야할 소리, 소리가 모두가 크거나 조금씩은 슬픈 사람들속에서 마치 저녁 연기 오르듯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시간내내 피어 오른다. 따라서 이야기가 자연스럽지 못한 곳에서도 그 자연스럽지 못한 점이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서럽도록 찾고 싶은 오누이의 상봉에서 하룻밤을 꼬박 밝히는 ‘소리와 북’의 시골 주막에서 퍼져나가는 메아리 같은 어둠과 슬픔은 또 연출자의 어떤 생각에서일까.
Ⅱ.
맞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흔히 듣기로는 서편제 소리를 두고 사람들은 맨 먼저 “恨”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시인 고은(高銀)도 동아일보에 이 영화 이야기를 우리 소리 예술의 한에다 맞추어서 썼고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이야기는 물론 한이다. 보통 남도 가락, 남도의 한 등으로 말하나 사실 가만히 들어도 보고 생각해 보면 한은 비단 「남도」의 것만은 아닐테고 물 흐르듯 흐르는 슬픔의 가락에서 마음을 놓고 달래는 “힘든 세상”의 가슴에 멍뚤린 또는 가슴저리는 사연등이야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었으니 영화 「서편제」가 그것으로 둘러 쌓여 있다한들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다. 소리에 한을 담기 위해 운명적으로 눈이 멀어지는 딸, 딸을 눈멀게 한 고집스러움을 넘어서는 한 소리꾼의 끈질긴 소리에 대한 마음, 먹고사는 편안함과는 동떨어진 소리의 떠돌이 생활에 지친 북치는 아들은 정말로 잘도 만난 사이이고 모두가 이 영화의 말하자면 “주인공”이다. 이야기는 짤막하다. 사랑 때문에 스승으로 버림받아 떠도는 소리꾼의 이룰 수 없는 소리에의 한, 무슨 운명처럼 받아들여 삶과 소리에 젖어버리는 새로운 소리꾼 딸, 소리의 한, 인생의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삶의 한을 그린 것이다. 슬픔을 뛰어넘는 슬픔은 예술이라는 이름의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지 모른다. 슬픔을 소리에 담으면 이미 슬픔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 영화 「서편제」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바람소리 같다. 밝음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또는 길가, 동네 어느 골목에서 쏟아지는 소리는 하늘로 바람처럼 사라져 간다. 카메라의 곳곳, 산이, 들판이 어둑한 저녁놀이, 눈밭의 겨울등의 우리 눈에 낯익은 모습들이 소리와 어울림이 아주 좋다.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지만 「김명곤」의 목소리도 느낌이 있고 얼마간의 건달끼와 때로는 정돈되고 질겨 보이는 그의 얼굴도 좋으며 어느날 밤 소리를 끝내고 어둠을 타고 아낙의 품으로 파고드는 떠돌이의 사랑과 여자에 대한 목마름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실을 유일한 〈우스움〉이다. 그러나 나뭇토막 같은 덤덤함으로 마음속에 있는 여자를 버리는 얼른 보아서 바로스럽게 보이는 모습은 여자 주인고의 연기니 뭐니를 떠나서 좋게도 보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그렇게 좀 바보스럽다.
Ⅲ.
다른 나라 영화도 그렇지만, 특히 우리나라 영화에서 잘 보여주는 기다림이라든가 슬픔, 허허로움 등을 말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항구, 노인, 뱃고동, 기차가 떠난 뒤 혼자남은 역사, 주막집의 낡고 더렵혀진 여자, 기두뚱거리며 미끄러지는 시골 버스등은 이영화에서도 어김없다. 그런 모습들은 이 영화에 나오는 남원이나 오수, 강진, 영과등에 가보면 지금도 남아있다. 슈퍼가 들어서도 건물이 신식으로 지어지면서 촌스러움이 가셔가지만 그림자처럼 남아 있는 옛것의 끄트머리를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무얼 말하는고 하니 보성 읍내 장터의 빈터에서 어느 화창한 또는 뜨거운 여름에 바람에 가벼운 먼지 날리는 그 땅위에서 지나간 시절에 소리꾼들의 사람들을 모아 놓고 소리판을 받았을 것을 생각해보면 어떤 느낌이들까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가지, 얼른 이 영화의 줄거니 곳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해방후의 여러 가지 사정이 함께 뒤섞였던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느때인가를 보자는 것이다.
강산도 변한다지만 세월도 변한다. 사람의 모습도 그렇거니와 마음인들 오죽하겠는가. 변하는 것을 곳곳에서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이 영화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다. 왜냐하면 변해 보이는 山川은 그 뜻은 언제나 그것이며 인정이야 어떨손치드래도 〈사랑〉이야 또 어디를 가겠는가. 실타래 같은 긴 줄기의 한, 사랑은 이 영화의 비교적 어두운 밝기 곳곳에서 희미하고 길게 누워있음을 본다. 약간 엉뚱하다 싶으면서 조금 편리하게 성큼 말해 버리자면 “자기 집착 내지는 장인의 자기 만족 그리고 센티멘탈리즘 속에 피는 역사의식”이라고 하면 조금 거창하지만 틀리지는 않는다. 연출가가 무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는 분명한 것 같은데 그것은 우리가 늘상 경험하는 것이 아닌 정말 〈사랑〉이라는 점이다.
Ⅳ.
어설픔을 무릅쓴다면 「서편제」라는 판소리 영화가 영화속에 있는 판소리이어야 하는지 판소리 속에 있는 영화여야 하는지는 아무래도 어려워만 보인다. 그리고 사실 이런식의 영화 이야기는 온당치 못하다. 영화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스크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란 사실 그냥 느끼면 되지 않겠는가. 미안한 일이 되었다. 더욱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속의 시절을 살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