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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6 | [문화와사람]
건강한 주제와 부실한 문제의식 드라마 「아들과 딸」
여성 문학 모임 (2004-02-03 15:45:41)
우리나라에는 후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딸들이 많이 있다. ‘땅꼬’ 또는 ‘딸그만이’라는 별명과 함께, 아들 보기를 소원하는 부모의 애타는 심정이 만들어낸 이름이리라. 그러나 그 당사자들에게는 평생의 한으로, 피해의식으로 거북이 등딱지처럼 지고 살아가야 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얼마전에 막을 내린 TV 주말연속극 〔아들과 딸〕은 이땅의 수많은 후남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멍울진 성장기를 되돌아보며 눈물짓게 했고, 꼭 후남이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경험을 가진 우리 여성 시청자들의 주말 계획을 바꿔놓았다. 그 뿐이랴, 그 여성들의 남편이나 오빠, 남동생 그리고 아버지들도 이 심기 불편한 연속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제 극은 끝났는데 왠일이지 심기는 쉬 편해지지 않는다. 해서, 우리는 그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이 드라마의 완결편을 보면 마치 그동안 진행되어온 모든 갈등이 해소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아선호사상의 직접 피해자인 후남과 가해자인 어머니의 화해라는 안이한 결말은 주제의식의 심화,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역기능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또 이것은 인물의 형상화 문제와 맞물려 전체적으로 극의 역동성과 생명력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각각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따라가보면, 먼저 가장 전형적인 인물로 후남의 어머니를 꼽을 수 있다. 아들이 귀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귀한 아들을 얻는 그가 후남이를 구박하는 것은 귀남에게 퍼부어지는 맹목적 사랑과의 대비를 통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귀남이의 앞기을 가로막는 잘난 딸’에 대한 적대감이 과분한 사윗감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에까지 이어질 때 그 설득력은 차츰 약화되기 시작한다. 마침내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진부한 논리와 ‘한 집안의 기둥이 잘 되어야 딸들이 시댁에서 무시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다’ 는 어설픈 변명으로 후남에게 양해를 구하는 마지막 대복에 이르면 어머니의 퍼스낼리티는 급격히 변질된다. 실제로 드라마 상에서 어머니가 후남이를 구박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남아선호사상에 근거한 것이었음에도, 결국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구실로 바뀜으로써 화해가 가능해진다. 물론 경제적 조건이 토대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경제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올바른 접근방법이 될 수 없으며, 또 그것이 작가의 의도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귀남이의 경우, 우유부단하고 심지가 약한 인물로 일관되게 그려짐으로써 남아선호사상의 또 다른 피해자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거듭되는 낙방 끝에 고시를 포기하고 은행원이 그나마 용기있는 선택은, 부모의 기대와 자신의 꿈(수의사)를 동시에 버리는 이중의 고통 때문에 패배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성자와의 결혼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도 이 패배감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그런 그가 고시공부를 다시 시작할 것을 결심하는 후남과 석호의 결혼에 자극된 결과이다. 여기서 작가는 합격에의 희망을 암시하면서 마무리짓는데, 그것을 패배감의 극복을 통한 자지정체성 실현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고시라는 목표설정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이다. 오히려 어머니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춘다는 퇴행성을 보일 소지가 있는데, 그것도 귀남의 능력을 벗어나는 객관적 상황 때문에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다음은 아버지의 역할이다. 귀남이 못지 않게 나약하고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기까지 한 아버지는 자신 역시 남아선호사상의 피해자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라기보다는, 작가에 의해서 설명된다.) 심정적으로 후남의 처지를 동정하지만 아무 도움도 되어주지 못하는 그는 간접적인 가해자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희화화됨으로써 (뛰어난 연기에 힘입어 증폭된 탓도 있지만) 극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 의미있는 역할이 되지 못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인 아버지가 아내한테만은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이 쉽게 정당화 되는 것도 이렇듯 잘못 형상화된 인물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오류로 지적될 수 있다. 이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가족구조에서 발생하는 여성문제--어머니 자신도 그 구조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생각하자--를 놓침으로써 모든 것을 어머니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인식의 한계로 이어진다. 후남은 남아선호사상의 폐해를 체현하는 중심 인물이다. 남녀쌍둥이라는 특수성이 피해자로서의 후남의 모습을 그리는 데 유리한 조건으로 기능한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또한 후남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한 가정의 예외적 상황 속에 가두어놓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귀남이에게 빼앗긴 대학입학 기회를 되찾기 위해 가출을 단행, 온갖 역경 끝에 꿈을 이루는 후남에게서 우리는 입지전적 인물상을 발견한다. 그러한 인물은 모든 원하는 바를 성취한 자의 넉넉하므로 어머니를 용서하는 순간 -- 더구나 그것이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랴 -- 지극히 이상화되고 추상되어버린다. 후남의 문제는 어머니의 몇마디 넋두리로 쉽게 해소될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7대독자의 남녀쌍둥이라는 특수한 조건이 빚어낸 일회적인 문제로 끝날 수 없는, 우리사회의 뿌리 깊은 고질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를 벗어난 후남이에게서 그런 병폐의 징후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초기 공장생활에서 잠깐 비치다 만 공적 사회에서의 성차별 문제는 후남이가 성공해 감에 따라 자취를 감춰버린다. 특히, 결혼 이후의 후남의 모습은 행복한 아내 그 자체로 머물뿐이고, 또 하나의 가정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숱한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있다. 그것은 석호라는 완벽한 남편의 하해같은 이해심이 영원히 지속되는 한 여성들의 이상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억압받고 있는 숱한 여성들의 고통을 단지 “남편 잘못 만나서...”라는 푸념으로 수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형된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 미현이란 인물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인가. 착하고 예쁘고 능력있는 여자가 역시 매력있고 유능한 남자와의 결혼을 마다하고 재능을 살리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다는 스토리만을 떼어놓고 보면, 이 시대의 진보적인 여성상의 제시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미혀의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일련의 장치들은 비중 있는 조역으로서의 미현의 입지를 흐트려놓는다. 미혼모의 딸이라는 배경--성자의 경우도 비슷하다--과 옛 애인을 기다리며 천사처럼 살아가는 이모의 영향, 그리고 귀남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 등은 미현의 홀로서기가 가지는 능동적 의미를 축소시키고, 오히려 불행한 삶으로 보이게 할 가능성마저 있다. 이에 반해 성자의 결혼생활은 그 행복하지 않음의 원인이 잘 드러나지 않은 결과, 늘 불만에 가득차 있는 성자의 행동이 지나친 것으로 보이고, “이렇게 살지 않을 거야”라는 선언은 매번 공허한 울림이 되어버린다. 시어머니의 구박이 자신의 딸들에게까지 이어진다면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마지막 각오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그 높은 벽을 허물어뜨릴 힘을 엿보기는 힘들다. 마지막으로 종말이를 보자. 후남이만큼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어머니의 ‘쓸데없는 딸년들’중의 하나로 희생되는 인물이다. “우리 식구 중에 나한테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되풀이되는 종말의 불평은 그 사실을 껴안고자 하는 작가의 의식적인 노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작가는 종말에게도 행복한 결혼에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에 그침으로써 보상의 차원을 넘지 못한다. 못배워서 철이 없고 사람 볼 줄 모르는 그녀의 허영기는 그 나름대로 근거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종말이를 구현하기 위해서 그 철없음의 표상인 준이 오빠를 갑자기 괜찮은 남자로 만들어 놓은 결말은 인물의 형상화에 관한 한 최소한의 사실주의적 기율에서조차 벗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들은 남아선호사상이라는 주제를 다룸에 있어 그 근원에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어가지 못한, 작가의 문제의식의 박약함을 증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드라마가 눈에 띄게 설명적으로 흐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작가는 후남의 극중 소설 「아들과 딸」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설명해내는데, 그 방법의 잇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주제의 반복적인 확인작업에 그치고 말았다. 또 하나, 문제를 지닌 인물들에서 출발하여 한바탕 울음바다의 카타르시스로 갈등을 해소(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시켜버리는 극의 구조는 상처받은 자의 보상심리를 충족시키기에 유효한 도구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조의 닫혀있음이 작가로 하여금 남아선호의 문제점을 가지고 진정한 여성문제의 천착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이제 불편한 심기를 가라앉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지금까지 이야기해오는 동안 우리가 빠뜨린 것이 있다면--혹은 짐짓 모른 체 한 것일 수도 있다--이 드라만가 지닌 보기 드문 건강함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언어의 연금술사’가 뱉어 내는 현란한 말장난이 우리 시대의 인간상을 얼마나 왜곡시키고 오염시키는가를 익히 알고 있는 우리는 조금은 지루하고 기교가 떨어지는, 아직 설 익었지만 더 없이 진지한 이 드라마의 유의미함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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