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7 | [문화칼럼]
양지와 한지
최성배/전주대학교 산업미술과 교수
(2004-02-03 16:01:17)
종이 소비량의 많고 적음을 놓고 각 나라의 문화수준을 비교하는 예가 있다. 현대인의 문화생활과 종이의 사용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증거의 하나라 하겠다.
종이가 발명되고 보급되기 이전 사람들은 도형이나 상징, 기호 혹은 문자를 기록하는 매체로 돌이나 연관, 죽간, 파피루스, 양피, 진흙과 같은 것들을 사용한 예가 있는데 거의 모두 과거의 유물로 퇴각해 버리고 말았다. 다만 돌과 연판은 아직 쓸모가 있어 비석과 인쇄용 제판에 일부 쓰인다.
전주는 언제부터인지 종이와 부채가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부채가 좋으려면 먼저 종이가 앞서야 하니 전주 부채는 전주 종이를 대변하는 셈이다. 전주 부채, 그중에서도 합죽선에 쓰이는 눈처럼 희고 부드러운 종이는 이 지방 한지 중에서도 최고급이라 할 만하다.
한지의 종류를 꼽자면 문을 바르는 데 쓰이는 창호지와 붓글씨나 그림에 쓰이는 화선지. 막종이로 태지와 초배지가 있고 장판에 쓰이는 장판용지를 들 수 있다. 한지의 단촐한 메뉴에 견주어 양지는 쓰임새와 종류가 많다.
표면이 거칠고 무른 갱지와 신문용지를 비롯하여 서적 인쇄에 많이 쓰이는 모조지, 연하장이나 카드, 서적의 고급 원색인쇄에 쓰이는 아트지, 표면광택을 제거한 고급품으로 스노우 화이트, 다양한 색과 ┗┛┳무늬가 있는 레자크지는 책의 표지나 면지, 혹은 서류봉투로 쓰인다. 제도용 켄트지, 수채화용으로 와트만지, 지폐용지, 증권용지, 컴퓨터용지와 복사용지도 있다. 한쪽은 거칠고 한쪽만 희고 매끄럽게 가공한 마닐라 보드는 일반 포장용 종이상자에 쓰이고 이보다 더욱 광택이 나고 표면이 고운 아이보리지는 화장품 포장과 같은 고급포장에 쓰인다. 투명한 셀로판지는 겉포장 재료로, 반투명의 트레이싱지는 트레이싱 작업과 청사진용 제도에 쓰이는데 이보다 신축성이 적고 구김이 가지 않는 대용품으로 트레파지가 있다. 자를 수는 있으나 접히지 않는 단단한 카드보드는 전시용 판의 제작이나 액자의 매트로 쓰인다. 포장용 상자에 쓰이는 골판지(단보루지)와 각종 포장지도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이다.
양지의 사용이 일반화된 지금한지와 양지를 구분하여 말하는 것 자체가 어느 관점에서는 고루하게 들릴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를 들먹이는 까닭은 비록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가지는 우수성이 분명히 있고 오랜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국민 정서가 배어 있다는 이유도 있다. 양지는 대부분 수입 펄프에 의존하고 있으나 한지는 국내에서 나는 원료를 쓴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일이 못된다.
양지는 대량생산에 대량소비 체제로 가내 수공업적인 한지보다 가격면에서 유리하다. 이보다 더 문제시 되는 것은 한지의 품질 개선이 부진하고 생활양식의 변화에 부등하는 신제품 개발이 눈에 띄지 않아 기존의 시장마저 위축되어 가고 있는 현상이다. 창호지는 유리에 밀리고 장판지는 비닐이 대신하며 부채는 선풍기기와 냉방기 때문에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 한지는 표면이 무르고 고르지 못하므로 인쇄에 대한 적응력이 미약하여 인쇄용지로서도 수요가 거의 없다.
그러나 한지는 양지와 대조적인 제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질감이 부드럽고 질기며 구김이 쉽게 가지 않는다. 천연소재의 재질감은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이러한 장점들은 한지공업을 사양길에서 구하는 통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기존제품의 품질개선과 현대인의 생활감각에 맞는 새로운 제품의 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 몇가지 방안을 제시해 본다.
첫째, 재래식 장관은 초배를 한 뒤에 장판지를 붙이고 그 위에 때막이 종이를 덧대고 여러날 건조시킨 뒤에 바니쉬를 칠하는 긴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는데 만약 종이 자체의 표면가공을 통하여 바니쉬를 필요로 하지 ㅇ낳도록 개선된다면 수요자의 번거로움도 덜고 수요도 늘게 될 것이다. 그 이전에 장판지에 때막이 덮개라도 씌워서 팔면 좋을 것이다.
둘째, 두루마리 한지를 개발한다면 벽지로 활용하게 되어 애용자가 늘어날 것이다.
셋째, 화지를 개발할 일이다. 지금으로선 화선지 한가지뿐이니 수요가 한정될 수 밖에 없다. 수채화용지와 목탄지등은 고급 종이로서 수요가 만만치 않다.
넷째, 인쇄에 적응력이 있는 종이를 개발할 일이다. 일반 서적의 속종이는 한걸음 양보한다 쳐도 표지와 면지, 간지 등에는 질기고 품위있는 한지가 적용되도록 한다면 책의 품위와 내구성이 향상될 수 있다고 본다.
다섯째, 실내장식으로 조화를 사용하는 장소가 적지 않은데 플라스틱이나 천으로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화용의 한지에 대하여도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아울러 실내조명을 위한 전등갓이나 커튼 대용의 버티컬 블라인드에 대하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포장용지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니 수요자의 요구와 기호에 맞는 제품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제안할 일은 규격화의 필요성이다. 양지는 g/㎡라는 미세한 단위로 종이 두께를 나타내고 있으며 전지의 규격도 종류별로 통일되어 인쇄규격의 결정이나 견적이 편리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한지는 특제라든가 1호, 2호 등의 막연한 구분이 있을뿐 정확한 수치가 없다. 한지도 마땅히 규격화의 단계를 밟아야 할 일이다.
이러한 일들은 소재의 가공과 성형, 첨가 재료, 후처리, 2차가공 등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실험을 거쳐야 하고 마케팅과 디자인이 필요한 사안이므로 협회나 조합과 같은 협동체, 혹은 기업체에서 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체계적 연구를 전개함으로써 성과를 거둘 성질의 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