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7 | [문화저널]
똑똑한 여자의 중대한 착오
박완서의 『서있는 여자』
여성문학연구모임
(2004-02-03 16:06:37)
방송매체의 대중 파급력이 현대사회의 가장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임은 이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것은 사회의 가치관이 방송에 방영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송이 유포하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성원의 가치관을 형성시키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특히 신문, 잡지, TV등의 대중매체를 통해 사회를 보는 전업주부들의 경우에 대중매체의 파급력은 더욱 강조되어 진다.
아침을 준비하고, 남편은 직장으로 아이들은 학교로 보내면 대략 오전 8시 30분. 대부분의 주부들은 아침드라마를 비롯한 주부대상의 아침방송을 시청한다. ‘페미니즘 증후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여성문제’ 시리즈에 편성하여 KBS TV에서 박완서 원작의 「서있는 여자」가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작품「서있는 여자」가 과연 ‘여성문제’를 어느 만큼 부각시킬수 있는가하는 것은 방송의 대중 흡입력과의 관계로 인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드라마가 가지는 전달의 효과는 어떠한 매체보다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식의 흐름과 같은 추상적인 문제의 전달은 역시 묘사를 주로하는 활자매체가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해서 드라마보다는 원작을 위주로 「서있는 여자」에 나타나는 여성 주인공의 심리적 측면에 주목하려 한다. (드라마의 내용이 원작과 상당부분 달라졌으나. 여기에서는 다루지 못하므로써 부분적인 논의가 될 가능성을 미리 밝힌다.)
작가는 「서있는 여자」를 통해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남녀 평들의 문제를 어머니와 딸이라는 세대를 달리한 두 부부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똑똑한 여자’의 ‘중대한 착오’가 무엇인가를 추적해보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똑똑한 여자의 중대한 착오’
작가의 말이다. 작가는 주인공 연지를 결혼제도 속에서의 남녀 평등의 문제에 일찍 눈을 뜬‘ 똑똑한 여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연지의 남녀 평등에 심리적으로 접근해 보면 그것은 남녀의 평등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에 대한 거부와 아버지에 대한 동경, 즉 남성지향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여고시절 우연히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생활의 단면을 목격하게 된 연지는 물질과 육욕, 감성에 치우친 어머니에 대한 같은 여자로서의 굴욕을 느끼게 된다. 그 굴욕은 연지에게 어머니의 삶을 거부하고 금욕과 정신세계, 이성적인 아버지의 삶에의 동화를 가능케 한다. 결국 연지의 남녀 평등에 대한 집착은 여성에 대한 거부이며, 남녀 평등이 아닌 남성지향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이러한 연지의 정신적 불균성은 결혼 생활의 파국으로 이어진다. 연지의 삶에 대한 지향의식 중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남녀평등보다는 무관심과 연민으로 위장된 ‘어머니처럼 살지는 않겠다’는 ‘여자의 일생’에 대한 강한 거부의식이다. 어머니의 삶에 대한 거부는 아버지의 삶에 대한 동일시로 이어져 연지가 남성 역할을 할 수 잇는 결혼 상대, 즉 철민과의 결혼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결혼 후 연지는 남편 철민을 공부시킨다는 이유로 가정경제를 책임 진다. 남성의 역할인 경제적 행위를 여성인 연지가 담당하므로 여성의 역할인 가사노동은 남성인 철민이 해야 한다는 단순논리가 연지의 남녀평등 의식의 본질적이며, ‘똑똑한 여자’연지의 ‘중대한 착오’인 것이다.
연지의 남녀평등에 대한 왜곡된 집착은 성 역할의 규정에서 중대한 오류를 발생시킨다. 즉 연지와 철민의 계약(가사노동은 철민이 경제행위는 연지가 한다)은 그 자체로는 가정에서의 여성의 지위에 혁신적인 의의를 갖는 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그 본질은, 여성은 가사노동을, 남성은 경제행위를 해야한다는 가부장적 논리를 전도시켜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단순성은 철민과의 결혼생활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연지는 철민과 단 둘이 있을때는 역할분담을 철저히 강요하지만 철민의 친구나. 시댁 식구들 앞에서는 현모양처의 역할을 한다. 즉 결혼에 있어서 평등의 문제는 부부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남녀평등의 사회화되고 관념화된 집단의식의 변화 없이는 이루어질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지의 이중성, 혹은 體化되지 못한 남녀평등의식은 설득력을 상실하고, 그러한 연지를 철민은 경멸과 야유, 그리고 남자의 ‘넓은 아량’으로 ‘봐주고’있는 것이다. 작품의 전개에 따라 발생 하는 ‘아이를 유산한 사건’이나 ‘철민의 외도’는 사건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주제의 심화에 큰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 연지의 여성의식의 한계가 이미 파탄을 예상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지의 어머니 경숙여사 역시 그 세대 내에서는 ‘똑똑한’여자다.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으며 가정경제에도 많은 기여를 한 전형적인 중년의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경숙여사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숙여사의 결손생활도 행복하지 않다. 젊은 시절의 무분별한(?) 질투로 인해 나이가 든 지금 남편과의 이혼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경숙여사의 단절된 부부생활속에서도 남편의 지위, 잘난 자식들은 후광처럼 받으며 행복한 여자라는 자기기만 속에서 살아왔으나, 갑작스런 이혼요구에 방황하게 된다. 이혼을 결심하기 위해 이혼한 친구들을 찾아 순례를 떠난 경숙여사는 혼자 사는 것보다는 껍데기일 망정 남편의 그늘에서 아내로, 어머니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결론을 얻고 돌아오게 된다. 그런 경숙여사가 자기에게 또는 여지에게 요구하는 것은 철저히 여성적인 삶이다. 그것은 연지와의 대비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연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극단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머니의 삶은 物慾과 肉慾을 추구하고 감정적이며, 비논리적인 ‘추악한’것의 극단이며 아버지의 삶은 정신적이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고독하고 ‘아름다운’세계로 규정짖고 있다. 이것은 안성과 여성의 본질적 차이에 근거한 남성 지배 논리와 일치하고 있다. 그 결과 연지는 남성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이고 어머니의 삶은 자신n과 운명적 이질성을 갖고 있다고 고집한다. 경숙여사의 순례는 여성성을 추구한 삶에 대한 재점검의 기회가 아니라 여성성의 확립만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는 확인의 절차로 끝나고 만다.
연지는 자신의 결혼이 ‘중대한 착오’였음을 인정하고 행복한(?)이혼녀가 되는데, 연지가 인식한 실수는 자신보다 못한 남자를 골라 선생님이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듯 남녀평등을 쉽게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지의 실패는 남녀평등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한데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남편의 자질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시 행복한 중년여성이 된 경숙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부의 자리를 지키고 행복을 되찾은’ 경숙여사의 모습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의 삶이 아닌 중년여성으로서 정체성 확립에 실패한 패배자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그 결과 「서있는 여자」는 서로 다른 세대,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부부중심의 가족속에서의 평등이라는 주의 절실성에도 불구하고 바람직한 부부관계의 모색으로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여성의식의 변혁이나 여성현실의 극복차원의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