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7 | [문화저널]
연극 만인보(滿人譜)와 그 뒤 이야기
고금석/연출가
(2004-02-03 16:08:37)
고은(高銀) 시인의 서사시 만인보를 들고 전주 시립극단을 만난 것이 벌써 3년도 더 지난 일인가보다.
90년 초 전주에 와서 한작품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고 전북대 정초왕 교수가 전화를 해 왔다. 글쎄 전화를 받은 것이 먼저였는지 아내의 추천을 받고 만인보를 읽던 것이 먼저였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아마 그 여름에 동시에 진행되던 일이었을게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는 시인이 유년기부터 현재까지 시인이 만났거나 역사의 존재로 알고 있는 인물들의 삶을 통하여 민족사의 총체적인 맥을 그려나간 연작 시이다. 이미 문학사적으로도 성취를 이룬 작품으로 꼽히고 있거니와 나는 그 시(詩)들이 그리고 있는 인물들이 그대로 노래 속에 살아 있음을 보았다. 그이들은 내가 잊고 지내던 내 고향 사람들이었고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이었으며 아직도 살아있다면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정교수가 나에게 어떤 작업을 기대하고 나를 초청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나의 인연(독일극을 연구하던 프라이에 뷔네를 통한)이나 혹은 독문학을 했다(?)는 두 사람의 과거를 생각해보건대 어쩌면 새로운 독일작품의 소개나 뭐 그런 기대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치긴 했으나 만약 만인보를 연극으로 만든다면 전주 시립극단 이상가는 적임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그해 1월 알따란 만인보 1,2,3권을 들고 전주에 떨어졌다. 그후의 3개월은 부딪치고 싸우고 절망하고 그리고야 막이 올라간 처절한 3개월이었다.
공동창작을 통하여
우선 서사시(敍事詩)를 공연가능한 대본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시립극단 전 단원이 각색에 참여하는 공동창작의 방법을 동원하였다. 우선 당시 전 9권이 간행되었던 만인보중 시인의 유년기부터 해방까지를 다룬 1,2,3권만 공연키로 범위를 정하고 은태(소년 고은)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직한 인물 40명을 색출(?)하는 1차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소년 은태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그려졌지만 역사에 살아남은 우리 민족의 건강성을 부각시킬 수 있을만큼 건강한 사람들이다. 비록 일제의 압제에 찌들어 있지만 비극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은 건강함을 지닌 사람들이기에 그이들이 당시대를 살아온 개인적인 삶을 그리다보면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서기도 했다.
1차 작업에서 선정된 40명과 이들이 갖고있는 사건을 배경으로 큰 줄거리를 엮는 것이 2차 작업이었다. 대개의 연극이 한두명의 주인공을 둘러싸고 주변 사람들이 등장하는 형식이라면 만인보는 많은 사람들이 독자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등장하는 연극이다. 그러나 그 개개의 사건을 꿰뚫는 흐름, 일관된 주제가 있어야 하므로 2차 작업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선정된 인물들과 그들의 사건을 분석하여 한 장면을 이룰 수 있는 사건을 만들어 전체를 6개의 장으로 나누고 앞뒤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두었다. 그리고 40명의 단원들도 5~6명씩 조를 짜 각 장을 맡아 구성토록 하였다. 그러므로 연극 만인보의 각 장은 이때 짜인 조원들을 공동창작품이라 할 수 있다. (헌데 이렇게 시켰더니만 조마다 경쟁심이 일어 작품이 더 좋아진듯한 측면도 있지만 즈이들끼리 합숙하고 술먹고 심지어는 연애사건까지 벌이는 통에 아슬아슬한 일도 많았다) 그런데 아뿔싸! 각각 독립된 6개의 장면이 하나의 연극으로 녹아들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 동원한 것이 막간극이다. 막간극에서는 시립극단 연기자 고유의 재주를 최대한 살려 배우를 부각시켜보려고 하였고 한편으로는 전라도 한 구석 은태네 마을 이야기를 우리의 총체적인 역사와 연관시켜 보려는 의미도 있었다.
사투리의 힘을 살리려
소설 태백산맥이 힘을 가지는 것은 그안에 녹아 있는 사투리의 매력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만약 연극 만인보가 좋은 연극이라면 그것은 전라도 그것도 전북 군산지방의 사투리들이 그나마 온전하게 힘을 발휘한 때문일 것이다.
“참된 지역성은 진정한 세계성”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의 중상층이 사용하는’이라는 애매한 규정으로 표준말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사투리를 홀대하고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각 지방의 어르신들이 구사하는 진득하고 구수한 사투리들을 만날때면 고향을 만난 듯한 반가움을 느낀다. 지금도 만인보를 서울의 연기자들과 공연했을 경우를 생각하면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서울의 연기자들이 아무리 숙련된 연기로 전라도 사투리를 형상화해 낸다 하더라도 몸에 밴 몸짓 언어를 과연 얼마나 선보일 수 있었을까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전주’에서 ‘시립극단원’들과 공연하면서도 사투리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우리는 고희를 넘기신 한 단원의 할머니께 자문을 받아야 했다. 그 일에 애써준 전춘근씨와 곽병창씨의 노고가 없었다면 아마도 만인보는 갓쓰고 양복입은 어정쩡함을 벗지 못했을 것이다.
만인보의 대략
(못보신 분을 위하여?)
이러한 작업을 토대로 최종정리된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프롤로그>
일제말 여름밤, 나문재를 뜯으며 허기를 달래던 은태네 마을, 여성들의 힘든 노동을 서정적으로 그림.
#1장 추석날 은태네 집
영양실조로 허깨비를 보고 쓰러진 은태, 차례상의 음식을 손주에게 집어다주는 할머니와 이에 대한 할아버지의 지청구, 와중에 돈벌이를 떠나는 삼촌 때문에 판이 깨지는 은테네 명절.
#2장 관전이네 머슴방
동네 부자 관전네도 몰려드는 소작인들, 그집 상머슴 대길에게서 한글을 깨치는 은태와 머슴방에서 흐드러지는 잡다한 이야기들. 이때 수년전 대길의 새경을 꾸어 사라졌던 도부장수가 술 한병을 들고 찾아오고....
#3장 쇠정지마루
정두네 집에 도둑이 들고 동네 집집에는 나락이 한가마니씩 던져져있던 아침. 모처럼 생긴 공것에서 조금씩 각출. 동네 잔치가 벌어지고 아이씨름이 어른씨름으로 벌어지는 한바탕 웃음판, 이때 정신대로 끌려하는 만순이 놀이판을 지난다.
#4장 초상집
오랜 병치레를 끝낸 할머니의 죽음. 우리의 장례는 슬픔을 어떻게 이겨내는가. 곡소리에 이어지는 따뜻한 인사들.
#5장 추방되는 장덕곤
동네 쌈패이며 불한당인 장덕곤을 응징하는 마을 사람들의 힘
#6장 호영자
온 마을에 호열자가 불고 흉흉한데 일본군이 자살사건이 생기고 마을을 떠돌던 개장수의 죽음을 제일 먼저 알고 짖어대는 개짖는 소리 요란한 중에 해방이 온다.
<에필로그>
이땅에 일본군대신 미군이 진주하고 뜻도 없이 휘날리는 만국기. 그 아래에서 어린이의 외침 “아부지 코쟁이 놈이 우리 닭 잡아가요”
지금도 만인보를 가지고 시립극단원들과 싸우던 때를 생각하면 미소가 떠오른다. 공동창작의 미숙함 때문에 우왕좌왕하던 일, 연기자의 생각과 연구를 요구하는 나의 연습 방법에 익숙치 않은 때문인지 공연이 임박해 오자 조급해 하며 “이제 연출이 무언가 해야할 때 아니냐”며 반발하던 일 (그때의 좌절감이라니), ‘미제방죽’을 찾아서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갔다가 유원지가 되어 있는 그곳에서 술만 잔뜩 먹고 온 일, 2차 대본까지는 살아 있던 배역을 준비하던 연기자가 3차 대본에 자신의 역이 빠지자 울며 애석해 하던 일, 이 모든 일들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서 나는 연극 만인보와 서사시 만인보와 전주 사람들과 시립극단 사람들을 정말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