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8 | [서평]
우리민족의 제자리 찾기
『친일파 99인』
(반민족 문제 연구소 엮음, 돌베개, 1993)
지역사회 연구모임
(2004-02-03 16:18:03)
좌절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른다. 비록 예속과 억압의 형태가 끊임없이 변화되어 왔을 지라도 민족 해방과 민주변혁의 과제가 여전히 우리 민족 앞에 절절한 소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불행하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좌절이 희망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보면, 지난 백여 년 동안의 민족사에서도 적지 않은 해방투쟁의 소중한 공간들을 가지고 있었음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갑오년의 농민전쟁을 비롯한 일제 하에서의 항일투쟁, 그리고 60년대 이후 급성장한 노동자들의 투쟁의 면면은 외세와 자본에 대한 충분한 위험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난한 투쟁의 결과 몇 번에 걸친 역전의 결정적 계기가 우리 앞에 나타났었다. 하나는 해방공간으로 불리워지는 45년에서 48년에 이르는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4.19혁명의 시기이다. 또 우리는 1980년의 ‘서울의 봄’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건설의 시기는 외세의 새로운 대체의 분단의 고착, 그리고 반혁명적 파쇼정권의 창출로 좌절하게 된다.
실패와 좌절의 시기에 우리는 ‘시작’하는 아름다움을 본다.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은 생산의 현장에서 혹은 교단 위에서, 혹은 거리의 곳곳에서도 존재한다. 이러한 ‘시작’은 진보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며 ‘낡은 것의 폐기’를 의미한다. ‘낡은 것의 폐기’란 다름 아닌 낡은 구조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다. 50여 년에 걸쳐 우리 민족을 짓눌러 왔던 예속적이고 억압적인 구조와 분단의 상황은 곧 오늘의 현실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낡은 것이며, 반 사회세력, 반민주세력, 반 통일세력으로 통칭되는 낡은 사람들 또한 끈질기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여기서 소개하고 자 하는 『친일파 99인』은 낡은 사람의 ‘청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청소’대상으로서 친일파를 대거 등장시킨다. 친일파는 ‘민족 통일을 저해하는 반 통일 세력과 민주발전을 반민주 세력의 민족사적 실체’로서 사회혼란과 위기의 뿌리를 이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친일파 99인』은 현실의 문제를 그 출발점으로부터 짚어보자는 것이며 이는 우리가 시작하고자 하는 첫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 99인』은 반민족문제 연구소가 엮고 44명에 이르는 전문연구자들이 대거 필자로 참여한 친일파 심판서이다. 이 책은 전3권의 분량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정치분야를, 제2부는 경제분야를 그리고 제3부는 사회 문화계의 친일인물을 다루고 있다. 시대적으로 1876년의 개항 이후 1945년의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총 99인에 이르는 사회 각 분야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들을 엄선하여 그들의 친일 행각을 명확히 하고 있다.
우선 서장 ‘친일파 문제를 다시 본다.‘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김봉우 선생(반민족문제 연구소 소장)은 민주화의 좌절이 안보나 냉전때문이 아니라 외세의 ‘현지법인체’인 반민족주의자들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본다. 또한 친일파 문제는 소수의 몇 명이 아니라 사회 전부분을 장악해 왔으며 ‘전 민족의 생활과 정서속에까지 침투해 있는 구조적 문제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 문제의 해결책은 우리 역사속에 있는 것’이며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서는 ‘친일파 청산 문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1부 정치분야에서는 총8가지 부류에 해당하는 친일파들을 등장시킨다.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 관련자, 갑신 갑오개혁 관련자, 을미사변 관련자, 황실 척족, 친일관료, 직업적 친일분자, 친일경찰 군인들이 망라된다. 이들 중 갑신 갑오개혁 관련자들은 꼼꼼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개화파의 기본방침이 ‘일본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근대화를 추진’하자는 것이었다는 점은 비교적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의 친일이 일제의 식민지 재편에 그대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아 합방 이후 이들이 노골적인 친일 행위로 나아갔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특히 한 때 독립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독립신문』주필 그리고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 한말 근대민족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윤치호의 경우를 보자. 그는 1915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면서부터 일선융화와 황국 신민화 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등의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자행한다. 그의 자식들 또한 명백히 친일의 길을 걸었으나 윤씨 일가는 해방후에도 끊임없이 권세를 누려왔다.
제2부 경제분야에서는 예속경제화의 첨병 역할을 담당했던 매판자본가들을 다루고 있다. 광신적인 친일분자가 있었는가 하면 ‘민족자본가’의 허울을 쓰고 치부에 열중했던 김연수가 있었다. 김연수는 인촌 김성수의 동생이다. 이들 형제는 1919경성방직을 설립하고 그들의 신화를 만들어 나간다. 경성방직의 성장에는 ‘일제로부터의 보조금 지급, 일제 자본과의 시장 분할, 일제 정책금융기관으로부터의 대부 등이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이로 보건데 경성방직은 민족자본으로서의 성격은 애초에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김연수는 기업활동의 영역을 넘어선 친일부역 및 전쟁협력에 적극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통해 엄청난 자본축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1949년 8월 6일, 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된 김연수는 ‘범의(犯意)를 긍정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제3부 사회 문화분야에서는 언론, 학술, 법조, 여성계, 문학, 음악 미술, 종교계의 대표적인 친일파들이 등장한다. 최남선, 김활란, 이광수, 모윤숙, 유치진, 홍난파, 현제명 등 이들이 누구인가, 한때는 민족운동의 주역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던 이들은 대개가 3.1운동 이후의 문화정책에 힘입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한편 친일 문학 혹은 친일 음악계의 지도자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황국신민화에 앞장서는가 하면 성전참여 강연 등의 명백한 친일의 길을 걸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부분이 해방후에도 두루 요직을 거치면서 문화계의 거두로 자리매김된다.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유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제하에서 ‘친일’에 자유로왔던 사람이 흔치 않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역사적 과오를 뒤엎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찍이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심판이 행해지지 못한 나라는 유일하게 우리 민족뿐이다.
더구나 민족의 생활 전반에 걸쳐 일제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일본색 문화의 침투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마당에서야 무엇부터 할 것인가가 명확해진다.
이와 같이 『친일파 99인』은 우리 민족의 제자리 찾기의 시작을 친일파의 청산에 두고 있다. 『친일파 99인』은 그동안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친일파 문제에 대한 객관성 있는 연구성과물이자 친일 부역자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의 의미를 갖는다. 친일파에 대한 폭로가 엮은 이가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2000명에 달하는 『친일 인명 사전』의 편찬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정리/유성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