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8 | [교사일기]
이삼이의 여름방학계획
윤경숙 / 전주 기전여고 교사
(2004-02-03 16:19:29)
오늘은 1학기를 정리하는 사정회가 있었다. 미리 종례를 한 탓인지 학교가 무더운 장마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썰렁하고 어쩐지 내 마음도 홀가분하기만 하다. 내가 담임을 맡고 있는 2학년 3반 아이들은 무척이나 분주하게 일 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기대하고 있다. 담임의 노파심에서 방학중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하니 대개는 엇비슷해서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보았다.
1. 아침 6-7시 라디오 Good Morning pops 듣자
2. 신문사설, 칼럼 읽자
3. 5일에 한권 꼴로 책읽자.
4. 방학때 영어 독해집 1-2권 끝내자.
5. 교육방송 계속 듣자
6. 낮잠자지 말자.
7. 수학능력 수학문제 하루에 10개씩 풀자
8. 음악감상, 영화감상
9. 일기쓰자
10. 즐거운 방학!
이제 우리는 이 방학 계획서를 2학년 3반의 특정학생의 것으로만 생각하기에 앞서 반 전체로 확대시켜 일명 이삼이(2학년3반)의 방학계획으로 간주하고 계획서 속으로 돋보기를 들고 들어가 보자. 여기엔 1993년도 고등학교 2학년생들이 짊어져야 할 것과, 교사인 나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들이 조목조목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아침 기상시간을 라디오 영어프로그램을 접하여 영어도 듣고 노래도 같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선택한 실속파의 계획이다. 그러나 꼭 이렇게 여유 시간까지도 학과 공부와 관련시켜야 하는 것이 첫 번째의 계획이라면 그 다음 계획이 기대된다. 둘째, 신문사설, 칼럼부분은 93년부터 바뀐 대입제도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면서 신문을 들여다보면 부모님, 선생님 할 것 없이 무조건 책망했던 때가 어느 때이던가. 이제 우리의 이삼이는 사설이나 칼럼뿐 아니라 또 다른 지면도 읽고 이해하는 시작의 첫걸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셋째, 5일에 책 한 권 독파하면 방학 35일 동안에 7권의 책을 이삼이는 읽게 될 것읻. 학기 중에 2학년 문과 반인 이삼이는 16개 과목을 공부하고 시험을 치러냈다. 이삼이에게 있어서 학과공부의 예습 복습 시간 확보하는 것조차 고문이었을 터인데, 방학동안 책읽기 계획을 생각한 것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오히려 안쓰럽기도 하다. 넷째 영어 독해집 1-2권 완성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의 영원한 숙제이자 의문점이 영어 공부이다.
예전에 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10년차인 이삼이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국어로 된 소설, 시 읽기 보다 영어로 된 독해집이 지금 이삼이에게는 더 급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리 외우고 들여다보아도 노력한 만큼 물리(物理)는 트이지도 않고 나는 그 속에서 또 격려하고 좀더 노력해 보라고 다그치는 역할을 충실히 했었고 할 것이다. 다섯째. 계속하여 교육방송을 듣자 학기가 방학의 연장으로 지속되는데 우리에게 있어서 또 다른 교육의 파행을 통과하도록 만드는 것이 서글프다. 결국 교육방송에서 나오는 것이 다 일수는 없는데도 교육 당국에서 진행하는 것이니 노파심에서라도 교육방송을 들을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여섯째 우리는 낮잠자지 말자의 의미를 새겨보는 것이 어떨까. 말 그대로 놓아서 배우게 하니 솔직히 낮잠이라도 실컷 배부르게 자야되지 않은가. 학기 중 2,3학년 수업을 맡은 입장에서 나는 학기초부터 지금까지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아이들을 매시간마다 보아왔다. 이제 한해의 절반 고비를 막 넘은 때에 학생들의 체력은 현격하게 저하되어 있다. 연일 장마와 무더위에 지쳐서 미쳐 몸도 가누지도 못하고 무기력해진 학생들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학생들이나 교사들이 방학을 기다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에게 방학은 요원한 것이다. 무시무시한 부총수업 20일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의 이삼이는 낮잠을 자지 말자고 계획하고 있다. 아마도 이 계획은 일학년 방학때도 계획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무엇이라고 책망하겠는가. 이삼이에게 건투를 빌어본다. 일곱째, 역시 수학능력시험의 고뇌가 안 나올리 없다. 한 문제당 2점의 배점이 가해지는 형벌에 해당되는 수학문제는 문과반인 이삼이에게는 무척이나 괴뇌의 과목일 것이다. 거기다가 담임인 나는 학기말 성적이 꼴찌한 이래로 꼴찌한 몫을 톡톡히한 수학을 공부하도록 얼마나 정신적 압력을 가했던가. 여덟째. 이제야 여유를 찾으려는 이삼이 영화, 음악감상 계획은 어떻게 될지 담임인 내가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집마다 비디오세트가 있을 터이고 여름방학 동안의 영화관도 다양한 영화가 상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학동인 이삼이의 정서에 맞는 영화, 음악을 감상하여 많은 여유를 찾았으면 한다. 그리고 나 역시도 무턱대고 이삼이의 문화를 매도하기보다는 10대와 20대의 차이를 줄여보기 위하여 보다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되겠다. 아홉째. 이제까지의 모든 계획이 방학동안 차근차근 진행된다면 이삼이의 일기장에는 인생의 일부분인 10대의 삶이 메꾸어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성인이 되어 그 일기장을 들쳐 볼때가 있다면 많은 감회와 그 시기의 삶의 한 단계가 다른 삶의 한 계단을 구축해 놓았음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열 번째 즐거운 방학! 이제 이삼이의 즐거운 방학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우리 교육현실에서 이삼이의 방학계획 자체가 바람직한가 아닌가 하는 판단은 뒤로하자. 과연 여름방학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보충수업 20일과 나머지 보름을 합쳐 35일간의 방학이 채워진다면 우리들의 이삼이가 행복해져 있을까. 지금은 즐거운 방학을 외치고 있지만 이삼이 아닌 우리들의 아이들은 지쳐있고 방학이 끝나도 나서도 지쳐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방학을 기다린다. 그 속에는 또 다른 성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아이들에게 힘을 내자고 격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