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8 | [특집]
왕성했던 민족극 운동과 연극 대중화 작업
김정수/연극인, 편집위원
(2004-02-03 16:24:14)
해방공간이 그 어느 시기 보다 의미있게 거론되고 있는 것은 고조된 통일 열망과 함께 그 가능성도 높아가고 있는 이즈음, 시급해진 분단이데올로기 극복과 민족동질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재정리를 요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방공간은 우리 한반도 2O세기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격동의 한복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보수적 학자에 의해 무시되거나 편향된 시각으로 왜곡되어 왔다. 따라서 통일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이 시점에서 아직도 우리안에 잔존하는 정권안보격 반공이데올로기나 학문적 기득권을 유지키 위한 편파성을 걷어내고 객관적이며 올곧은 시각을 마련하는 작업이 시급하고도 필연적인 과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남한의 연극만 보더라도 해방공간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던 민족극 운동이 분단이란 최악의 비극적 상황 아래 그 싹이 잘린 뒤, 신파극의 잔재에 서구의 각종 실험극이 기형적으로 결합하여 현대연극을 구제하기 어려운 양상으로 변모시켜 왔으며, 오늘날엔 외설과 상업주의 연극으로 덧씌워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행히 7O년대의 마당극 운동을 시발로 80년대 민중의 각성에 힘입어 연극계 일각에서 활발해진 민족극 운동을 맞이할 때까지 3-4O년의 시간을 훌려보냈던 것이다.
기존의 연극사들은 해방공간의 연극을 극히 단편적으로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3O년대를 전후해 서울에서 신극운동이 점차 징착되어 갈 무렵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기조로 한 혁명연극이나 해방공간의 평양쪽 연극은 최근의 연구들이 나오기까지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 몰론 해방공간의 희곡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고 이론적인 논의들도 미학 논의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대중화의 방법론에 집중되었다고 하나 편중된 이데올로기로 이무렵 진보적 연극운동을 “광복과 더불어 온 혼란의 틈을 타서 좌익 계열은…ꡓ 운운하거나 ”직극적 인 친일 어용극을 쓴 작가일수록 열렬한 프로 극작품을 썼던 것도 흥미롭다ꡓ라는 등. 연극사 기술의 가장 중요한 형평성을 잃는 태도 역시 우리 연극사의 한 날개를 꺽어 없애는 깃이다.
해방공간의 연극계 주류는 단연 좌익계였다. 제일 먼저 결성된「낙랑극회」를 비롯하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던 『조선예술극장』『서울예술극장』『혁명극장』『자유극장』등이 재조직 되었으며 『인민극장』『극단 칭포도』『십오극장』『극단 동지』등도 결성되어 활동에 나섰다. 이러한 좌익 계열의 극단이외에는 신파적 흥행극이 시의 전부였을 정도로 우익측의 목소리는 미미했다. 신탁통치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 정치와 밀집한 관계를 갖는 연극은 당연히 정치적일 수 밖에 없었고 그러기에 극단의 공인활동과는 별개로 연극운동단체가 앞서 결성되어 활동했다는 점도 이시기의 한 특징이다. 후에 『조선연극동맹』으로 결합되는 『조선연극건설본부』와『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이 그것이다.
『조선연극건설본부』는『조선본학건설본부』의 결성에 때맞추어 45년 8월. 송영(위원장). 안영일, 나웅, 김태진, 이서향, 박영호, 김승구 등이 조직했다. ‘조선연극의 해방’ ‘조선연극의 건설’ ‘연극전선의 통일’을 구호로 내건 이 단체는 일제하의『조선연극문화협회』의 이사들이 중심이 됐고 배우들이 조직의 주도적 위치에서 제외됐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하여 나웅, 강호, 송영, 신고송, 김승구, 김욱 등이 연건에서 이탈하여 45년 9윌 28일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을 조직 하고 ‘1.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연극의 건설과 그 예술적 완성을 기한다. 2. 우리는 일제의 반동연극과 싸운다. 3. 우리는 연극활동이 노동자, 농민의 생활력과 투쟁력의 원천이 되기를 기한다.’는 강령을 내세웠다. 연맹은 연건측으로부터 종파주의적 연극인들이 조선의 혁명단계가 부르조아민주주의 혁명단계라는 것을 망각하고 연맹을 조직했다는 비판도 들었지만 결성 후 한달여 만에 전 연극인의 90%를 가입시켰다고 주장될만큼 조직의 위세가 훨씬 컸다. 이들 단체의 운동 노선이나 이론적 깊이는 단연 연맹측이 앞서 있었으며 심도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연맹이 KAPF연극운동의 적자임을 주장하는 점과 상적직으로 도덕성이 강한 조직으로 자기비판으로부터 논리전개를 시작했다는 점, 신고송, 한효와 같은 연극이론가들이 포진하여 논리적 토대를 갖추고 있있다는 점 등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1945넌 12월 2O일 연건과 연맹은『조선연극동맹』으로 결합하게 된다. 이 『조선연극동맹』은 ‘일본잔재의 소탕’ ‘봉건유제의 청소’ ‘국수주의의 배격’ ‘진보적 조선연극의 수립’ ‘국제연극과의 제휴ꡑ를 강령으로 내걸고 거의 모든 연극인을 포괄하여 당시 연극계를 지도 통솔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동맹의 2년여에 걸친 환동을 보면 46년 3.1기념공연으로 「독립군」 (서울예술극장). 「3․1운동」(조선예술극장), 「3․1운동과 만주영감」 (자유극장) 「님」 혁명극장)등을 가졌으며, 그해 7월 ‘희곡의밤’ 개최, 『전국문화단체총연맹』주최 ‘제1희 종합예술제’에「하곡」(함세덕 작/안영일. 이서향 공동연출)을 공연하였다. 또 47년 제2회 3․1 기념공연으로 「혁명극장」 『낙랑극회』『무대예술연구회』 공동공연으로 「태백산맥」 (함세덕 작/ 이서향 연출) 과 「예술극장」「민중극장」「문화극장」공동공연으로는「위대한 사랑」 (조영출 작/안영일 연출)을 공연하여 16일간 1O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어서 47년 7월 28일 부터 8월 4일까지 23개 극단이 참가한 『독립신보』후원 제1회 자립극 경연대회를 성황리에 주최하여 당시 소인극운동의 높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자립극운동은 소극장운동과 더불어 『조선연극동맹』의 활동방향을 잘 드러내 보여 준다. 해방 후에도 일본인이나 친일파가 소유하고 있는 대극장의 변함없는 영리추구로 경제적 타,결책이 필요하기도 했거니와 소극장이 갖는 무대와 객석과의 높은 의식교감 효과를 감안할 때 연극의 정치적 특성에 기초한 연극대증화의 한 방법으로 소극장 운동은 필연적이었다. 최초의 소극장인 「서울소극장」 (45년 11월 15일)을 중심으로『극단 전선』이 활동하게 되자 소극장 운동의 가능성과 의의가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극장운동은 자연스럽게 ‘자립연극ꡑ의 방향으로 귀결된다.
연맹 때부터 조직 내에 농촌연극, 공장연극, 학교연극, 아동극 등 부분별 위원회를 두고 활동을 전개한 이 사업은 동맹에 와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져 연극대중화운동의 구제적 실천을 보게 된 것이다. 47년 1월 31일 동맹의 결정서를 보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1. 동맹 산하 제극단의 구제성을 고려하여 가능한 극단으로부터 대극장 공연 중심주의에서 소규모 이동공연으로 전환시키고 점차 전극단에 이 방침을 확대하여 연극운동 대중화를 꾀할것. 2 직장, 농촌, 학교 등에서 대두하고 있는 연극운동을 지도 윈조하기 위해서 기술적, 조직적 방침을 수립하고 서울시 지부 및 지방지부의 결성과 그 기초가 될만한 연극 써클 활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특수기관을 설치할 것 3. 비속주의와 투쟁하며 이를 위하여 비평활동을 강화하고 희곡부의 활동을 왕성히 할 것. 4. 대중에게 해독을 끼치고 있는 가극의 시정을 위하여 노력한다. 5. 동맹중위의 및 일부 약간의 극단에 잠재하여 있는 예술주의를 철저히 비판하고 이깃이 학생극운동에 주고 있는 악영향음 경계하고 지도한다. 6. 각 진문부외 운영을 활발히 하고 정기간행물총서 등을 발간하여 연구의 도움이 되게함.
이와같이 당시 창작직 실천이 부족했딘 문학쪽의 상황에 비해 『조선연극동맹』의 연극운동은 ‘진보적 민족연극론ꡑ에서 ‘자립연극ꡑ운동의 형태로 그 활동이 구체화 되면서 민족연극의 한 결실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47년 8월 이후 정치적 상황으로 동맹 산하 극단이 4개로 축소되고 대부분의 연극인들이 월북을 하게 되고, 8․15기념공연이 준비중에 종단되는 등『조선연극동맹』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전반적인 연극의 침체기를 맞게 된다.
당대에 공연되었던 희곡작품들이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함세덕을 미롯한 몇 작가들의 작폼을 통해 그 시대 작품들의 예술적 완성도까지 짐작해 보는 것은 아직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고하를 떠나 분단으로 말미암아 활발히 전개되던 민족연극론이 우리 민속극까지 포괄하는 보다 전진된 양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중단되면서 남쪽은 서구사조 이식으로. 북쪽은 혁명찬양연극으로 고정되면서 그 골이 깊어지게 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통일을 대비해야 할 지금, 이른바 ‘잃어버린 연극운동사ꡑ를 복원하고 우리 연극의 민족적 전통과 게승이 하나의 역사 안에서 수용되고 정립되는 것이 중대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들어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아직 분단의 상황이 그 여건을 어렵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하나가 될 역사를 위해 부단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