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8 | [문화저널]
“돈 있어 가꼬 시골살면 좋지!...”
김태경/경인여자전문대 교수
(2004-02-03 16:25:22)
중학교 때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주인공 박동혁에게 반해 촌에서 농사짓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느날 서울로 시집간 누나가 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대뜸 하는 말이 “돈있어 가꼬 시골 살면 좋지!!”라고 했다.
”돈있어 가꼬 시골 살면 좋지 !”
각박한 서울인심에 쫓겨 살다가 추석날 고향마을에 가면 마음이 푸근한 건 좋지만 불편한 부엌에 시당숙, 시외삼촌의 고종사촌까지 들추어내는 고루함이 금새 지쳐 그래도 서울이 편하고 심플해서 좋다고 오면. 또 서울은 서울대로 꼴불견이니 돈만 있어 가지고 시골에 가면 시어른, 시당숙도 가진 놈한테는 별 수 없고 그저 지 편할 도리만 쫓아 공기좋은 전원을 즐기며 별장같은 생활을 할 수었기에 하는 말일 터이다.
요즈음은 내가 서울 살면서 이말의 되새김을 정확히 할 수 있다. 이말은 서울 사람들의 공통된 잠재의식으로 보면 대과가 없다. 서울사람들만이 아니고 대도시 사람들이면 다 그렇다. 얼마진 까지만 해도 돈 있어도 시골에서 맘 편히 살지 못하는 것은 그놈의 학군이 맘에 걸려서 못 떠났지만 이제 입시제도가 바뀌어서 그 잘난 아이들을 시골에 풀어 놓으면 날마다 놀고 먹기만해도 내신성적 특등급은 맡아 논 당상이라 생각들을 할 터이니 떠나는데 걸릴 것이 없다. 그렇다. 돈없이 시골살기는 너무 불편하고 힘이 들며 돈있이 시골살기는 금상첨화라니 그 아니 좋을 쏜가?
우리가 친구를 대하는데 있어서도 잘 사는 사람이 못 사는 친구를 찾아갈려면 몸에 옷치장도 좀 덜하고 같이 놀러가면서도 자기 차가 비록 캐딜락이라 해도 그 친구의 형편을 고려해서 버스여행도 할 수 있는 일 정도는 너무 당연한 일이고, 또 이런 상식정도들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이말에 수긍을 못하는 삶이 없을 터이다.
그런데 자연을 대하는데는 왜 그다지도 그 입장을 고려치 못하고 안 나온 배도 더 내밀고. 없는 차를 세내어 캐딜락을 몰고 가고 싶어 하는냔 말이다.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말이 없고 저항을 못하고 그저 자기를 내세우지도 못하고 그저 겸허할 뿐이다. 그런 친구를 찾아가면서 친구로서의 도리를 하지 못하고 친구로서의 예의는 커녕 짓밟아간다면 우리가 어디 잘 한 것이 무엇인가? “돈있어 가꼬 시골 살면 편한 사람들”은 시골서도 서울서 할 짓을 다하고. 다만 서울은 공기가 안좋으니까 시골에 와서 서울의 편리한 생활을 다하며 살고 싶은 사람들인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자기 돈벌어 자기하고 싶은대로 시골에 와서 떡을 치던 밥은 치던 왈가 왈부 할바는 아니지만 따져볼 것은 지연을 대하는데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벗처럼 대하지 못하고 비단금침에 잠을 청하는데 필요한 바람정도로. 다시말하면 자기 편리를 추구하는데 필요한 도구정도로 그것을 대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이 말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우리가 현재 자연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을 적나라하게 나타낸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점이다. 돈있어야 시골살기 좋다는 사람들은 (여기서 돈이란 상징적인 것이므로 여러가지들 미유할 수 있지만) 진정으로 자연이 좋아서가 아니고 자연이 자기의 일신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며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에 접하는 순간 또다시 자기의 편의를 위한 더 많은 개발을 해야 마음이 후련하고, 또다시 어떻게 하면 더 편하게 할 수 없을까? 을 새기게 된다는 것이다. 한 두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대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잠재의식이 이렇게 형성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편의를 위한 도구로써 자연의 개발이란 그래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덤벼대게 되는 것이며, 이제는 자연의 파괴라는 것이 예사로운 일처럼 되어버렸다. 생각해 보면 지금 얼마나 환경적으로 어려운 시기인가? 우리들 마음 깊숙히 이점을 정말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말을 조금 바꾸면 국제사회에서도 지구전체의 자연을 좀먹는 똑같은 논리를 찾을 수 있다. 바로 회색문명의 선진국과 녹색의 원시림의 미개발 국가의 논리이다. 선진국이라는 데에서는 앞으로의 에너지자원의 충당을 위해서 자국의 자원은 철저히 보호하고 3세계 등의 자원을 이용하며,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구의 환경보호을 위해서는 현재의 원시림이 더 이상 개발되어서는 안된다는 등의 국제적 선언을 간간히 하고 나선다. 자기들은 실컷 개발해서 편하게 살고 (혹은 현재까지의 환경오염이 선진국의 책임이라는 설도 있음) 이제는 지구의 환경보전 운운하면서 개발을 그만 두자고 미개발국가에게 호소한다는 것도 사실은 어딘가 형평 의 문제가 있지 않은가? 돈있어 각고 원시림에 가서 각종 편의 시설을 다 해두고 두다리 뻗고 살기는 정말 편해할 것이지만 지연이 좋다고 그 윈시림을 그대로 즐기지는 못할 것이다. 꼭 그런 심보로 선진국이 후진국의 자연자원을 대하니 지구상으로도 남아날 자연이 많지 않다. 지구의 허파라 하는 아마존이 그렇고 일본의 동남아 지역에서의 환경자윈의 수탈이 그렇다. 돈 있어 가지고 자연에 들어가면 자연이 나에게 도구가 되지만 그렇지않으면 나와 자연은 대등한 관계가 되어 일거수 일투족을 같이 움직여야 한다. 현대인들은 그것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인상은 팍 쓴 것이 그만 토끼가 용궁에서 술잔이나 먹고 까불다가 병어새끼한테 “토끼 뱃속의 간 들었네...”하는 순간이 된 것이다. 토끼는 이통에 놀래서 술이나 확 깻지만 우리 안간이야 아무리 잘못을 꼬집어도 술이 깰 리가 없다. 잘났다 잘났어! 자라가 말하듯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에게 어떤 화망살이 뻗칠지 모른다.
이러한 논리를 한차원 크게 생각해 보자. 자연을 우리의 벗으로 생각하고 그를 찾아가는 것은 생태학적인 논리요. 돈 가지고 코란도 타고 찾아가서 자연이라는 친구앞에서 교만을 떠는 행위는 경제적 논리에 급급한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이 앞달의 글에서 환경문제란 자연의 논리와 인간의 논리가 서로 갈등을 일으킨 것이고 이 갈등의 극복이 곧 환경문제 해결이라는 말을 했었는데 이번 마지막 호의 글에서는 그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왜 어려운가?를 바로「돈 있어 가꼬 시골 살면 좋지」라는 우리들 마음 구조에서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동안 경제개발이냐? 환경보전이냐?의 논란은 끊임없이 많았고, 지금도 이문제는 여전히 시대의 숙제로 남아있다. 이에 대한 해결의 논리도「작은 것이 아름답다」「적정기술의 개발논리」「자급자족의 사회」「생존을 위한 청사진」등 수없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한 논리이다. 인간이 현재까지 발전시킨 문명이라는 터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고 개발은 계속해가되 그것이 곧 파멸로 이어지는 개발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지속가능한 개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안간의 것은 최대한 도로 다 챙겨서 넣고 지속가능성만 담보하면 별탈이 없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그동안 개발과 보전을 조화시키려는 어떠한 논리도 다 포함한 듯하여 인간의 체면을 마지막으로 유지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 이상을 넘어가서 우리가 자연과 타협을 할 수 있는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상은 없을 것 같다. 이것이 마지막 배수진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야 할 때인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
산에 놀러 가면서 그 시끄러운 굉음의 테이프를 들고 가는 것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환경문제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도 아니다. 설령 연결이 된다하더래고 지금 그런 걸 지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른다. 하지만 문화저널을 통하여 그동안 필자의 글을 읽으신 분은 첫 글에서 환경문제는 우리의 여과된 문화속에서 얽혀져 나온 아주 작은 것이라는 저의 말을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굉음의 테이프를 가지고 가는 것은 환경오염과 직집 연결되는 것이 아니나 그 이면에 자연이라는 친구를 도구로 보는 악독한 배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꼭 우리를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살얼음판 같은 상태로 만들게 된 것이다.
바로 자연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오랜 친구들 찾아가듯 그렇게 대하자는 것이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오랜 친구에게 자기가 뭐 좀 잘 됐다고 그 앞에서 교만하고 젠 체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친구는 언제 보아도 그대로 정다운 친구고 그 사이에 어떤 벽도 있을 수 없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