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8 | [문화저널]
참외서리에 애호박 씹는 맛
김두경 / 서예가. 편집위원
(2004-02-03 16:30:56)
긴 장마도 지나고 무더운 삼복시절입니다. 짜증스럽게 생각하면 한없이 짜증스런 계절이 여름이지만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여름만큼 사연도 많고 낭만이 넘치는 계절도 없는 줄 압니다. 하기사 요즘처럼 잘 먹고(?) 잘 입고(?)잘 살기(?)에 혈안이 된 세상에는 그저 모든 것이 아우성이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조촐하게 살아가는 벗님들은 시절 따라 요즈음에 알맞은 추억을 가슴 벅차게 만들며 사는 줄 압니다. 또한 지금 번쩍번쩍 광나게 살아가시는 분들도 나름대로 최신형 뉴로퍼지 에어컨 켜놓고 창넓은 집에 앉아 정원 가득히 기르는 자연을 만끽하시기도 하고 동남아나 하외이 해변의 낭만을 추억하시거나 계획하며 사는 것처럼 사시건만 아련히 떠오르는 도랑 치고 가재 잡던 시절을 잊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쩌다 보면 모여 앉아 이런 이야기 보따리도 깨낼라치면 그 시절 닭서리 참외서리의 무용담을 침튀기며 뻥튀기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내게도 남들이 들으면 거짓말같은 참말인 서리 무용담이 있기에 해볼까 합니다.
그시절 이야기를 꺼낼치라면 으레 그렇듯이 ‘어렸을적이 우리동네 악동들이 모여’남자들은 강냉이도 따오고 고구마, 감자, 풋콩, 동부등 먹거리를 서리해오고 여자들은 몰래몰래 그것들을 삶아왔지요. 악동들의 언어로 갱냉이 따오는 것을 하늘좃, 고구마 캐오는 것을 땅좃이라 이름지어 부르며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비석거리에 땀을 뻘뻘 흘리며 모여 앉아 이웃마을 참외밭을 기습하기로 결정하고 몇 번의 작전회의를 겨쳐 사전답사와 모의 훈련도 끝내고 작전에 들어갔지요. TV에서도 그렇고 소설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렇듯이 언제나 욕심은 있고 겁이 많은 동지기가 있기마련 아닙니까. 우리 악동들 중에서도 예외없이 그런 녀석이 있엇지요.
치밀한 작전아래 거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모든 대원들이 무사히 비석거리로 귀환했고 성급한 잔치가 벌여졌습니다. 칠흙같은 밤 비석거리 아지트에서 주먹으로 퍽퍽 참외를 깨서 코를 담그고 먹는데 어떤 녀석이 옆구리를 찌르며 귓속말을 합니다. “니껏 맛있냐 내껏은 크기는 큰데 맛탱이가 없어야!”어둠속에서 손을 더듬어 그친구 참외를 가져다 한입 베어무니 이거 왠일입니까. 그것은 참외가 아니고 밭드럭에 심어둔 호박이었습니다. 이 소심한 친구가 침외밭 깊숙이 침투하지 못하고 밭두럭에서 오금을 저리다가 뭉클 잡히는 것이 있어 옳다 땡이야! 하고 싶숙히 침투한 친구들을 비웃는 회심의 미소를 지며 따온 것이 애호박이었던 것입니다. 칠흙같은 밤이었지만 우리는 이빨 드러내며 배꼽잡으며 웃었습니다.
참외서리에 애호박 씹는 맛이란 이렇게 재미있는 사연을 지니고 태어났고 아직은 옛 말씀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우리가 되씹어 볼 수 있는 이 열므날의 맛일 것 같아 되씹어 보았습니다.
자! 지금부터 진기불을 모두 끄고 달을 바라봅시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모두 끄고 하늘을 봅시다. 달이 없거든 별을 보시고 별도 없는 흐린 하늘이거든 칠흙의 어둠 속에 안겨 바람을 느낍시다. 도시의 퀴퀴한 밤 공기라 비록 애호박 씹는 맛이라 할지라도 그 시절 참외맛 나는 추억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 봅시다. 그리고 생각해 봅시다. 그때 잘먹고 잘살아서 그때가 그리운건지 아니면 그 무엇 때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