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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 | [한상봉의 시골살이]
한번 그렇게 지난 여름. 1993
김유석/시인 (2004-02-03 16:37:06)
우울한 일기이다 지운 연필자국 같던 어제 하루의 하늘빛은 그나마 어디가고 공중에는 물먹은 솜뭉치들이 낮게 걸려있다. 입추 지나 처서를 건너는 절기건만 어느 한 곳 터진 새없이 꾸무룩한 저 하늘을 두고 기상대에선 사홀간 큰 비가 질거라는 일기예보를 벌써 내렸다. 유감스럽게도 요즘의 일기예보는 너무 정확해서 탈이지만 그래도 행여나 싶어 농약치기를 날잡아 둔 조소리양반은 나절내내 하늘님 눈치만 보다가 제풀에 겨운듯 헛간에 경운기를 밀어넣고 물꼬를 보러 나선다. 금새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하늘은 나절가웃이 다 되도록 일손 급한 농투사니들의 애간장을 태우다가 마르지 않은 빨래깃을 붙잡고 찔끔거리기 시작한다. 잠깐 어레미친 아침놀빛이나마 받으려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며 깻대, 들콩, 토란즐기를 담느라 허등대는 아낙네들의 뭉툭한 허리를 찍으며 굵어지는 빗방울. 후즐근히 땀절은 등줄기를 시원스레 씻어내려주던 여름비의 그 맛은 저리두고 예기치 못한 한발에 물꼬싸움 잦던 그 해의 고마움도 그만두고, 예년 같았으면 하다못해 김장거리 채소를 놓는 채전이라도 촉촉히 적셔 주었을 늦여름비. 그러나 금년엔 영 웬수가 되어버린 비가 또다시 내린다 아. 아니 퍼붓는다. 애초 올 장마가 예년에 비해 좀 길거라는 예보를 접했을 때만해도 우리는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난데없는 기후변화 아닌 장마는 우리의 자연이 오랜 세월동안 되풀이해온 우기를 일컫는 것으로 이따금 태풍과 함께 폭우를 퍼부어 큰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계절치레에 지나지 않았었다. 장마철이라해서 연일 굿은 날만 게속 되는 것이 아니라 겨울날의 삼한사온처럼 한 이틀 혹은 사나홀 이상 맑은날이 끼기에 틈틈히 병충해를 방제하고 논둑을 깍으면 농사에 별 탈은 없었다. 어느해엔가 진장마 대신 마른 장마가 들어 되려 가뭄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듯이 장마철엔 적당히 비가 내려야 하고 또 적당한 기일내에 끝나야 체격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곧잘 후덥지근하고 지루하다고 입발림을 하는 장마가 끝나면 본격적인 한여름 무더위가 쫓아온다. 살갗을 벗겨낼듯한 탱볕이 내리쬘 때쯤엔 벌써 팔월이 깊어 우기에 잘자란 곡식들이 패고, 이글거리는 태양을 머금고 알차게 여물어 풍년농사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금년엔 삼복이 무색하리만치 여름내내 장마가 졌다. 장마전선은 걷힌지 오래인데 고대하는 띄약볕은 내리지 않고 하루 걸러 비만 내린다. 꼽아보면 달포동안 근 스무날 이상을 비가 내렸다. 것도 내렸다하면 사나흘을 질척거렸고 겨우 개었다 싶은 날에도 아침 저녁을 추적이곤 하였다. 귀동양을 해보자니 엘리뇨현상 탓이라는데 그 해석이야 어떻든 우리 농자꾼들에겐 이만저만 예삿일이 아니다. 이미 수차례 매스컴을 통해 보도된 것처럼 아무래도 올 농사는 글러버린 것 같다. 섣부른 절망감이지만 이제까지의 작황으로 보아 농투사니들의 시름을 달래기엔 너무 늦었다. 며칠간만 볕이 쬐어도 한결 나아지리라는 일말의 바램마저 져버린 것은 아니나 술기운을 빌지 않고선 들여다볼 수 없는 가슴 한구석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격의 그것이 묻어있을 뿐이다. 잦은 비는 일조량의 부족과 함께 이상저온을 불러 일으켰다. 햇볕의 부족콰 낮은 기온은 농사에 있어서 거의 치명적인 것으로 작물의 발육부진과 온갖 병충해의 발생을 초래하는데 올 벼농사가 바로 그러하다. 예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일조량은 벼의 생육을 저해하여 키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줄기가 연약하여 온갖 병해충의 온상이 되었다. 갈수록 발병 빈도가 뜸해가던 도열병이 극성을 부렸고 땡볕이 내려야 한풀 꺽이는 잎짚무늬마름병은 입때까지도 도대체 그칠줄을 모른다. 계다가 이화명충, 혹명나방은 제철을 모른 채 잎줄기를 감아대며 농민들을 괴롭혔다. 하여 햇볕만 반짝하면 농약통을 매고 논머리를 내달렸지만 채 약효를 보기도 전에 다시 비가 내렸다. 하다못해 농민돌은 값비싼 수화제며 입제를 마구 쓰기 시작했지만 효과는 별무신통하여 농약값만 덤터기쓰는 억울함을 당해야 했다. 따져보자면 농약값 더 들어 손해, 부족한 일손에 농약 한 번 더 치느라 손해. 잦은 비로 씻겨졌다 하더래도 조금은 의심이 가는 쌀을 먹어야 하는 건강상의 손해 등등의 냉가슴을 앓으면서 농투사니들은 길고 고태스런 여름을 나야했던 것이다. 이상기후의 피해는 비단 수도작 뿐 아니라 밭농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바람에 쓰러진 참깨는 일어설 줄 모르고 역병, 탄저병에 걸린 고추는 아무리 용한 약을 써도 붉어지지 않았다. 벌써 애벌재벌 솎아땄건만 마당에 널린 멍석귀는 널찍이도 비어 서울 사는 큰딸과 작은집을 꼽고 사는 어머니의 마음을 자꾸 서운하게 만든다. 싸디싼 것이 흙에서 나오는 것이라지만 마늘 한접, 고추 근 이나마 꾸려야 나들이를 나서는 마음이 오죽했는지 손바닥만한 들밭을 허구헌날 끌안고 산다. 이리도 하늘이 무심하매 올여름 팔월신선이 된 농투사니는 하나도 없다. 잠시만 들판을 비워도 좌불안석이 되어 동구밖 한 번 벗어나보지 못한 채 울안여름을 나야했다. 철없이 칭얼대는 아이들은 커녕 모처럼 마음을 챙겨 찾아든 친구들마저 한가러히 마증 하지를 못했으니 어느 세월에 못다한 마음을 구할까 여느해 같으면 한창 새쫓는 아우성이 들판 곳곳 메아리지고 일찍 팬 조생종 벼들은 누릇 누릇 익어가리라. 그러나 금년엔 도통 고개숙여 여물줄을 모르고 무심한 하늘 원망이라도 하듯 오래 찌르고 서있다. 열홉이상 출수가 늦어진 중만생종 벼들은 벌써부터 가을서리 피해가 우려되는데 다시 또 비는 내리고 멀쑥하게 키만 자란 창밖 한단수수는 배젊은 농사꾼 시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뉘기찬 방안으로 물음표같은 빗방울을 하염없이 받아넣는다. 밤깊자 바람에 뇌성, 남도들판에 내리는 호우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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