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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 | [문화가 정보]
<갑오동학농민전쟁 백주년을 준비하자 - 사료로 읽는 동학농민혁명 ⑮> 임실 남원지방 동학관련 인물과 유적지(2)
박맹수&#8228;원불교 영산대학 교수 (2004-02-03 16:40:10)
4) 남원성과 김개남군의 집강소 자리 남원성은 갑오년 당시 김개남이 이끌던 농민군이 오래도록 웅거했던 곳이다. 정석모의 『갑오약력(甲午略歷)』에는 동학농민군이 전주화약을 맺고 자기들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 잘못된 지방행정을 혁신하는 활동을 벌일 때, 전봉준은 금구 원평(院坪)을 본부로 삼았고, 김개남은 남원성을 본부로 삼았다고 쓰고 있다. 한편 매천 황현(黃玹)이 남긴 『오하기문(梧下記聞』제 2필 갑오 7월조에 보면 &#43090;이달 보름경에 전봉준과 김개남이 중심이 되어 남원에서 대회를 여니 모인 무리가 수만명이었다. (是月望問 琫準開南等 大會于南原 衆數萬人)&#43091;라는 내용이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바로 지난 호에서 살폈다시피 남원은 전라좌도 동학농민군들의 사령부와도 같은 고장으로서 남원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임실 순창 곡성 담양과 구례 순천 광양 하동 그리고 운봉 안의 산청 함양 진주 지방에 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사료들이라 할 것이다. 즉 위에 열거한 고을의 농민군지도자들은 대체로 대접주 김개남 포(包)에 소속된 수접주 또는 접주드이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설 『토지(박경리작)』에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김개남을 모델로 했다고 하는 &#43088;김재주&#43089;라고 하는 농민군지도자가 소설 『토지』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하동 평사리에 까지 진출하여 활동하였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소설로 치부할 수 없는 귀중한 시사를 해주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모여든 수만의 농민군들은 남원성 어디를 그들의 본부로 삼았을까?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개남이 이끌던 농민군들이 어디에 주로 진을 쳤는지, 김개남이 전라좌도 일대를 호령하면서 폐정개혁활동을 벌일 때, 그 본부인 집강소를 어디에 두었는지 정확한 사실을 담은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저 남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필자는 지난 8월 11일 7월 1차답사에 이어 다시 남원땅을 찾았다. 백년전 성황을 이뤘던 농민군들의 희미한 자취나마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남원문화원 노상준(魯相俊) 원장님을 만날 수 있었으며, 몇가지 관련자료복사와 함께 농민군의 집강소 즉 농민군의 본부가 바로 광한루 근처에 있었을 것이라는 귀중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노원장으로부터 들은 증언을 소개하기로 한다. 노원장은 아래의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원래 노상준 원장의 외조부는 광한루 근처의 객주(客主) 주인으로 상당한 재산가였다고 한다. 그런데 갑오년 농민군이 남원을 점령했을 때 농민군들에게 잡혀가 주리 틀림을 당하고 상당한 돈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농민군에게 끌려갔던 곳이 바로 광한루 근처인 &#43088;검멀&#43089;이라 부르던 곳이라는 것이다. 즉 노원장의 외조모가 노원장의 어머니에게 &#43090;아버지가 검멀에 끌려가 주리를 틀리고 돈을 빼앗겼다&#43091;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증언에 대해 문화원 사무국장 이석홍(李錫鴻)씨도 동학농민군이 진을 쳤던 곳이 &#43088;검멀&#43089;이라는 말을 여러 주민들로부터 들었다고 동의해주었다. 노원장은 계속해서 광한루 일대는 일제시대에 들어와 재판소가 들어서기도 하고, 헌병대자리가 되기도 하고, 한때는 국민학교가 들어서기도 했다고 증언하면서 수천 수만의 농민군이 진을 칠 수 있는 장소는 광한루 일대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필자 역시 노원장의 증언이 맞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한 마디 더한다면, &#43088;검멀&#43089;이라 불린 곳은 남원성 남문 밖 근처로서 이곳에는 이미 동학 교조 최제우가 남원에 왔을 때 교도가 된 서공서(徐公瑞)라는 인물이 살던 곳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5) 농민군의 격전지: 여원재, 방아재, 관음재 갑오 11월, 남원의 동학농민군이 운봉(雲峰)을 거쳐 경상우도 지방으로 진출하려다 운봉 민보군에게 크게 패한 장소가 어디냐 물으면 흔히 여원재(女院峙)가 아니냐 그런다. 현재의 여원재는 남원에서 운봉을 거쳐 함양으로 통하는 24번 국도상에 위치하고 있는 데 그 정확한 위치는 남원군 이백면과 운봉면 중간 지점이다. 그런데 남원에 가서 황토사를 연구하는 분들이나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들을 붙들고 갑오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 농민군을 물리친 민보군대장 일목장군 방봉양(一目將軍 朴鳳陽, 처음이름 文達)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같은 이야기를 하지만, 동학농민군과 운봉 민보군이 어디서 싸웠느냐 물으면 여원재에서 싸웠다, 방아재에서 싸웠다, 가남재(관음재)에서 싸웠다고 하여 전투장소가 하나로 일치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남원 향토지(鄕土誌)의 농민군과 민보군간의 전투에 대한 설명 역시 제각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이렇게 들쑥날쑥하는 여원재전투에 대한 정확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7월 13~14일과 8월 11~12일 두 번에 걸쳐 여원재 일대에 대한 현지답사를 하고, 여원재전투에 관한 관련 자료를 검토해 보았다. 검토의 결과를 소개한다. 우선 백년전 갑오 당시의 여원재는 현재의 위치보다 훨씬 남서쪽으로 나 있었다. (지도참조) 그런데 구(舊)여원재 길이 험하여 일제시대 도로를 새로 확장하면서 그 때 난 길이 여원재로 둔갑한 것이다. 남원 황토사에 밝은 이만기(李萬器, 1913년생, 남원시 동충동 253-16) 할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구여원재는 지금의 이백면(二百面) 소재지에서 골짜기를 따라 오르는 길로서 고개마루의 위치만 현여원재와 같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과 운봉 민보군은 현재의 여원재에서 싸웠던 것이 아니라 구여원재 일대에서 싸웠던 것이며, 따라서 그 위치는 현여원재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농민군과 민보군간의 전투는 여원재에서만 벌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1960년에 간행된 『남원지』에 실려 있어 아래에 인용 소개한다. 雲峰에 前注書 朴文達이 屯德의 前進士 李涑儀와 合謀破賊之計하고 初捷山東面方峨峙戰하고 檄招四方壯丁하야 防衛嚴密하니 賤潰에 至南門衝火分散하다. (『남원지』, 1960년간) 이 기록에 의하면, 농민군과 민보군간의 최초의 전투는 산동면 방아재 일대에서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방아재에서 최초로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은 『동학란기록(하권)』에 실려 있는 「박봉양경력서(朴鳳陽經歷書)」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박봉양경력서」에 의하면 최초전투는 갑오 9월 17일 야반에 방아재 일대에서 있었다고 한다. 7월 답사때 만난 김판주(金判柱, 1935년생, 남원시 죽항동)씨의 증언에 의하면, 동학농민군이 방아재와 가남재(관음재로 생각됨)에서 싸웠다고 증언하였고, 산동면 부절리(釜節里) 가말부락의 박정택(朴正澤, 1919년생) 할아버지 역시 갑오동학때 방아재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점에서 방아재 전투가 있었음을 거의 확실하다 할 것이다. 방아재는 현재의 지도상에 잘 나타나 있지 않으나 산동면 부절리에서 운봉면 장교리(長橋里)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또한 운봉면 소재지 서하마을 당산(堂山)에 버려진 채 남아있는 민보군 대장 박봉양의 공적비문에 보면, 관음재(觀音峙)에 진을 쳤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박봉양경력서」에서도 역시 갑오 11월 13일 관음재를 지키고 있던 방수장 정두회(防守將 鄭斗會)로부터 관음재아래 산동면 부동촌(지금의 산동면 부절리)에 많은 농민군이 진을 치고 운봉으로 쳐들어가려 한다는 보고를 받은 박봉양이 민보군 2천명을 이끌고 14일에 출진하여 관음제를 넘어 운봉으로 진출하려는 농민군을 돌을 굴려 크게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 7월 19일 임실접주 김영원(金榮遠)의 손자 김정갑(金正甲. 1916년생)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증언에서도 역시 운봉 민보군이 남원에서 운봉으로 가는 여원재 일대를 막고 있음을 안 동학농민군이 남원 산동(山東)에서 운봉으로 통하는 고개를 넘어 기습적으로 운봉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농민군속에 숨어있던 박봉양의 측근이 밀고하는 바람에 농민군의 운봉 공격계획이 탄로나 실패함으로써 많은 농민군들이 살상을 당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남원에서 벌어졌던 농민군과 민보군간의 가장 중요한 전투는 바로 관음재전투를 말한다고 하겠다. 관음재는 산동면 부절리에서 운봉면 권포리(權布里)로 통하는 고개를 말한다. 김판주씨의 증언을 다시 빌리면, 운봉면 권포리 덧몰(加洞) 사람들이 민보군 식량운반에 동원되었다고 하였고, 지금도 권포리와 장교리에 가면 주민들로부터 갑오 동학때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여 말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갑오년 당시 동학농민군과 운봉 민보군간의 치열한 전투는 현재의 여원재 일대에서 벌어졌던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동북쪽 방향에 있는 방아재와 관음재 일대에서 벌어졌음이 분명하며, 이같은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몇가지 사료와 남원 향토지 및 남원 주민들의 증언이 서로 일치됨으로써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독자들께서는 참고로 제시한 지도를 통하여 갑오년 당시의 전투상황을 짐작해길 바란다. 4. 새로 발굴된 자료들 임실 남원 지방의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알려주는 기존의 사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하여 많지 않은 사료 때문에 이 지방 동학혁명사는 거의 방치된 채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두 번에 걸친 현지답사를 통해 상당한 분량의 문헌 사료들과 현지 주민들로부터 귀중한 구술(口述) 증언들을 채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새로 발굴되고 채록된 사료들은 임실 남원지방 동학혁명사를 재구성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임실 김영원 접주의 손자 김정갑 할아버지로부터 찾아낸 관련자료 중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자료만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1) 임실 김영원접주 관련자료 * 무성서원 장의(掌議) 임명장(1878. 9) * 무성서원 색장(色掌) 임명장(1879. 4) * 동학접주 임명장 (1894. 8) * 김교민(金敎民: 김정갑의 큰아버지) 사립 창동학교 수업증서(1906) * 천도교 일등봉교(一等奉敎) 임명장(1906) * 천도교 순창군 교구장 임명장(1907) * 순창군 천도교 교안(=교도인명록)(1907) * 천도교 교령 임명장(1907) * 천도교 교훈 임명장(1909) * 천도교 집강 임명장(1909) * 김영원 관내 천도교 교적부(1910) * 임실교구 강도원 임명장(1911) * 임실 진안 양군 교구감독 임명장(1912) * 임실군 교구장 임명장(1912) * 임실군 교구장 임명장(1914) * 김교옥(金敎玉: 김정갑의 아버지) 임실군 교리강습소 수업증서(1915) * 봉황각 도선사 연성인 명부(1918 ?) * 3&#8228;1운동관련 김영원 판결문(1919) 위의 자료들 외에도 여러 자료들이 있으나 생략하기로 한다. 위에 열거한 자료들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원래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 장의를 지낼 정도로 상당한 지식을 지녔던 김영원이 갑오년에는 동학 접주가 되어 활약하다가 1900년대 천도교 중요간부로서 임실지방을 중심으로 계속 활약하고 임실을 근거지로 한 천도교 활동 배경 위에서 1919년 임실지방 3&#8228;1운동을 적극 주도하여 옥고를 치루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은 갑오년 이후 동학이 천도교로 이어지면서 줄기찬 민족운동을 계속하였음을 증명해주는 유력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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