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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9 | [문화와사람]
명창 강 도 근 (3) 농민적 심성과 예술을 향한 치열함
최동현․군산대교수․판소리 연구가 (2004-02-03 16:54:54)
김정문․송만갑․유성준 등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뒤, 강도근은 해방을 전후해서 창극단 활동에 뛰어든다. 동일창극단․조선창극단․호남창극단 등을 전정하며, 조상선․박동실․임방울․정남희․오태석․임소향․정광수․공기남․임준옥․박초월․박봉술․김연수․김소희 등과 공연을 하면서 해방 전후의 혼란기를 보낸다. 그가 해방을 맞은 것도 박동실(朴東實)의 호남창극단에 속해 경상남도 동영(지금의 중부)에서 공연할 때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창극단 생활을 오래 하지는 않았다. 6․25가 지난 후, 강도근은 서울․목포․전주․이리․여수․순천․부산 등지의 국악원에서 창악 강사로 있으면서 틈만나면 쌍계사에 들러 독공을 하였다. 그는 7년여에 걸친 쌍계사 독공이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했다. 1973년 남원국악원 창악 강사로 부임한 이래, 강도근은 계속 남원에 머물며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흔히 강도근을 남원 판소리의 대들보니, 남원 판소리의 대부니 하는 것은, 그가 남원 출신일 뿐만 아니라, 1973년 이래 남원국악원에 머물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오면서, 남원소리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 동안 국악에 끼친 공로로 강도근은 한국국악협회 국악공로상(1981), 남원 시민의장 문화상“(1985), KBS 국악의 상 대상(1988), 동리대상(1992) 등의 상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 12월 1일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흥보가로 지정되었다. 강도근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 밑바탕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소리에 대한 집념과 끊임없는 노력을 들어야 할 것이다. 쌍계사에서의 7년여에 걸친 독공은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점심을 마로 때우면서 피나는 수련을 거듭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집념과 끈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쌍계사 독공뿐만 아니라, 남원집에 머물 때도 거의 날마다 도시락을 가지고 남원산성을 찾아가서 종일 소리를 했으며, 남원국악원에 있을 때까지도,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도시락을 싸 가지고 지리산 골짜기를 찾아다니며 꼭 연습을 했다고 했다. 요컨대 끊임없는 수련으로 인하여 오늘의 강도근이 있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 들 것은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존심과 예술 이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는 그의 태도디아. 강도근은 고집스런 소리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태까지 배운 소리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돈이나 명예에 초연한 태도,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시골에 묻혀 후진양성에 전념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를 고집스런 소리꾼으로 보이게 하였다. 그런데 이런 고집스런 이면에는 농민적 심성과, 예술을 목적으로만 대하려는 태도가 굳게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영대(전주우석대 교수)와의 대담 내용은 이러한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나는 서울 사람들허고는 판이 달러. 그 사람들은 창이면 창, 연극이면 연극으로 먹고 살아야겠다고 나선 사람들이지만, 나는 내 손으로 농사지어서 곡식으로 먹고 살아. 그것이 나는 좋아. 서울 사람들이 촌놈이라고 비웃어도, 나는 오히려 그 사람들은 비웃네. 나는 돈을 싸줌서 서울서 살라고 혀도 못살아. 시끄럽고, 사람 많고, 차도 많고, 그것이 사람 사는 곳인가? 그리고 서울 가면 사라이 버려. 옛날에도 멀쩡헌 청년들이 소리헌다고 서울 가서는 계집질에, 술에, 아편에, 몸버린 사람들이 많았어. 지금도 그려. 서울 가서 보면, 순전히 술에다, 화투에다, 놀고 먹자판이여. 그리고서 언제 소리 공부 하는지 모르겄어. 그리고 돈. 돈에 눈이 벌개져서 돈밖에 몰라. 그러니 우리는 촌에서 농사 짓고 사는 게 마음 팬허고 좋아. 모다들 문화재 헌다고 야단들이지만, 나는 문화재 헌다고 쫓아다니기도 싫고, 저희들이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주지 말라, 그말이여. (문화예술 1988년 1,2월호) 강도근은 필자에게 여러차례에 걸쳐 자기는 소리보다 농사짓기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였으며, 지금도 기운만 있으면 농사를 짓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실제로 그는 지금도 20여 마지기의 논을 가지고 있다. 젊었을 때는, 공연을 다니다가도 농사철이 되면 집에 와 농사 일을 거들곤 했다고 했다. 강도근은 우선 땅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강한 농민이었던 것이다. 곡식을 가꾸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향략과 소비에는 관심이 없는 근면하고 성실한 태도, 도시생활에 대한 강한 거부감 등이, 강도근이 건강한 농민적 심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한 강한 자부와 함께, 예술을 어떤 것으로든지 수단화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소리를 통해서 돈을 벌려고 한다거나, 명예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만 아는 일부 타락한 도시 소리꾼에 대한 강한 혐오감과, 인간문화제에 대한 초연한 태도 등이 그것이다. 사실 오로지 인간문화제가 되는 것만이 그 사람의 예술에 대한 평가를 받는 길은 아니다. 문화제가 되거나 말거나, 예술은 예술을 감상하는 동시대의 청중들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며, 길게 보면, 역사 속에서 최종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인간문화재는 예술성만이 아니라 정책적 고려도 반영되어 지정되는 만큼, 오히려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좌우간 강도근이 문화재라는 허명(虛名)보다는 예술적 실질을 항상 더 중요시하고, 강한 자부심으로 일관해 왔다는 것은, 예술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의 됨됨이를 짐작케한다고 하겠다. 그동안 강도근이 자신의 소리의 녹음을 기피한 나머지 최근에야 녹음을 시작한 것도, 사실은 끊임없이 완전을 지향하는 그의 예술가적 태도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흔이 넘어 비로소 자신의 음반을 가질 수 있었던 강도근은, 일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소리가 세상에 내놓을 만하게 되었다고 판단했을 것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강도근의 예술에 대한 치열하고도 경건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요컨대, 강도근의 생애는 판소리의 완성을 위해 70여 성상을 한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달려온 삶.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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