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2 | [서평]
인물화를 통해 본 금세기 한국미술사
『수줍게 뒤돌아선 누드』(이주헌 지음, 재원, 1994)
오병욱 미술평론가·원광대 교수·서양화과
(2004-02-05 10:28:14)
책의 저자 이주헌은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동아 출판사를 거쳐 한겨레신문 문화부 담당기자를 역임했고, 현재는 미술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는 일은 곧 그의 책의 서술 방향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서두에 언급한다. 실상 우리는 그의 책 속에서 미술에 대한 풍부한 이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려 본 경험에 의한-가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본다. 잘된 작품들에 대한 열렬한 찬사나 잘못된 것들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은 단순히 안목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그는 시사(時事)를 담당하는 기자직을 역임했으니만큼 시대적 흐름을 읽는 통찰력을 가지고서 인물화들을 통해 한국미술사의 맥을 짚어나갈 수 있었으며, 미술평론가답게 작품의 가치 또한 허황됨이 없이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매겨 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가 "20세기 한국의 인물화"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인물화를 통해 본 금세기 한국미술사이자, 한편 미술을 통해서 본 시대상이요, 우리의 현대사이다. 저자는 이당 김은호의「순종황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식민지 지식인의 냉소적인 초상(고희동), 봉건적 가치관에 대한 정면도전인 여인 누드(김관호). 황국신민으로서의 결연한 자세를 다듬는 간호병(김인승), 민중의 망명정부였던 무당(김중헌), 권번 기생의 딸 (김기창), 해방의 전율을 전해주는 군중도 (이쾌대), 전쟁의 희생자인 전쟁고아(이수억), 가족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아온 50년대의 주부(박수근), 단발머리가 상큼한 여학생(임직순), 4.19함성으로 일어선 고교생(손장섭), 어느 기층 노동자의 부성애(오윤), 갈갈이 찢긴 양공주의 삶(임옥상), 광주항생 당시의 투사들(홍성담). 고비에 선 농민(이종구)실존적 벼랑에 선 전철속의 현대인들(서용선), 청담동의 젊은이들(박강원)에 이르기까지 인물화에 새겨진 역사의 물줄기를 잡아놓고, 지난 한 세기의 우리의 삶을 파란만장하게 엮어놓고 있다.
저자는 시대별 흐름을 따라서, 또 내용적인 접근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적 사건들과 동시대의 다른 예술들을 예로 들어가면서 인물화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한 편 읽음으로써 한 세기 동안의 간략한 역사의 흐름과 미술의 시대적 변천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의 취지인 "일반인들이 우리 미술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을 뿐 아니라, 근대 미술사 연구를 위한 자료집으로서도 풍부하다고 본다. 그가 밝혔듯이 60년대 이전의 미술에 관해서는 이경성, 이구역, 윤범모 같은 선학들의 자료를 충분히 정리 활용하였고, 최근 20여 년간은 그의 경험과 주변의 수집과 집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기 선정된 작가들과 작품들이 서울에서 활동하는 작가들로 한정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물론 홍성담, 곽성동 같은 이도 다루어 졌지만 총 53명의 작가가 다루어진 책 속에서는 너무 적은 분배인 듯하다. 물론 문화가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서술되는 것이야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보다 많은 작가들이 인물화를 그리고 있는 지방 작가들의 아틀리에에도 시선이 주어졌으면 더 좋았었을 듯하다. 사실 잊혀진 비극, 민중의 삶의 진짜 모습은 시정(市井)에 있기보다는 이쪽에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제주 4.3사태 연작을 그린 강요배 「유채꽃엔 오늘도 핏방울이 맺히고」가 언급된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다행한 일이다.
일제의 식민치하의 질곡의 세월부터 해방 후의 격동기와 남북의 분단,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한 민족의 역경과 그 극복기를 거쳐, 이익분배를 둘러싼 집단이기주의의 충돌, 군사독재와 그 항쟁의 시절부터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꿈을 지닌 청소년들로부터 극히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신풍속도까지의 현대사가 그림 속의 인물들의 모습을 통하여 흥미 있게 서술되어 있는 이 책을 미술의 이해를 위한 책이면서, 동시에 우리 현대사를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