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2 | [문화저널]
일기를 잡자!
어린이 일기지도
이현재 어린이 글쓰기 지도교사
(2004-02-05 10:30:11)
일기는 그날그날 있었던 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새로운 일, 써두고 싶은 일을 쓰는 글이다. 마음이 내켜서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이니 길게 쓰고 싶으면 길게 짧게 쓰고 싶으면 짧게 써도 된다. 또 생활문이나 책감상문, 기행문, 편지글, 시 따위의 종류에서 스스로 골라 쓸 수 있다. 일기는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자기 양심의 소리 그대로 정직하게 쓰면 된다. 일기의 쓸거리는 하루 생활 모두이다. 그 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모든 일들이 곧 글감이 될 수 있다. 일기를 쓰려면 누구나 쓸거리를 찾기 위해 먼저 하루 일을 돌아보는데 그러면서 자신의 생활을 정리할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주위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필 수 있어 좋다. 또 낮에는 가볍게 지나쳤던 문제도 다시 생각을 넓히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새롭게 느낄 수 있어서 더 더욱 좋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늘 일기에 쓸거리가 없어 고민한다. 오늘은 별로 재미있는 일도 없었고 별로 한 일도 없으니 쓸거리가 없다고 투덜댄다. 아이들은 어느 곳을 다녀오거나 손님이 오거나 친구들과 싸움을 한 일 따위가 없으면 글로 쓸 만한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럴 때는 생활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들을 떠올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아이가 하루동안 보고 느낀 것은 매우 많을 것이다. 아침 학교길의 사람들 표정과 몸짓, 온 몸을 파고드는 찬바람,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어두컴컴한 하늘과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눈가루, 어쩌다 길가의 나무나 학교 지붕을 보고도 새롭게 느껴지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고 가족이나 이웃, 친구들의 몸짓, 또는 읽은 책의 내용과 느낌 따위도 있다. 듣고 느낀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이나 친구들,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 집이나 학교, 길에서 들은 많은 소리들이 있다. 또 자기가 한 일도 생각날 것이다. 집에서의 생활, 친구들과의 놀이, 공부한 내용, 가족이나 친구들과 주고받은 말들이 있다. 꼭 하루의 일이 아니더라도 요즘 며칠 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답답한 이야기, 흐뭇했던 일,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 사람이나 자연, 동물, 곤충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한 일들은 모두 훌륭한 쓸거리가 된다.
쓸 거리가 떠오르면 그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을 한 가지나 두 가지 정해서 쓰는 것이 좋다. 하루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다 쓰게 되면 '00을 했다. 00을 하고 놀았다,00을 먹었다,00을 갔다...'로 이어져 무슨 보고서나 기록장 같은 글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일이나 느낌, 생각이 하루 가운데 어느 때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쓰도록 한다. 날마다 '나는 오늘...'이 들어가는 일기는 쓴 자신이 읽어도 정말 새로움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되도록 상황이나 감정을 잘 들어내기 위해 '주고받은 말'이나 혼자 생각한 '속엣말'을 많이 쓰도록 하면 더욱 좋다.
아이들 일기 지도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일기장을 보통 공책으로 바꾸어 쓰게 하는 것이다. 아이가 일기를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무엇보다 자기 생각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기장은 날짜와 날씨를 쓰고 나면 일어난 시각, 잠자는 시각, 오늘의 반성, 내일의 할 일 들을 써넣게 되어있다. 엄마 나 몇 시에 일어났어?' '오늘 뭐가 중요했지?' 오늘 잘못한 것은 없나?' '내일은 뭐하지 이런 것들을 묻고 기억하다 보면 정작 오늘 쓸 일기는 뭘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잊어버릴 때도 있다. 물론 하루의 기록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긴 하지만 진짜 일기를 쓰기도 전에 지쳐 버린다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또 대부분의 일기장은 오늘 일기를 '이만큼만 써라'하고 쓰는 난이 정해져 있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그 주어진 칸에 맞추어 쓰려는 버릇이 들어 다른 글을 쓸 때에도 "나는 요만큼만 써야지!"하고 미리 줄을 정해놓거나" 선생님 열 줄만 써도 돼요? "하고 물어본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 날의 일기가 몇 줄 안 되어 빈칸이 많으면 불안하고 많이 써서 다음 쪽까지 쓰면 대단히 많이 썼다고 믿는다. 아무런 방해 없이 생각을 깊고 넓게 마음껏 쓸 수 있게 하려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일기장이 필요하다. 다만 보통 공책에 쓸 때에는 전 날 쓴 일기와 한두 줄 띄어 주는 버릇을 들여 구분하는 것이 좋다. 또 아이에게 친구들과 일기를 바꿔보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비밀도 없으면서 비밀이라고 서로 감추다 보니 또래들의 좋은 점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잘 쓰는 아이는 계속 잘 쓰는데 일기 쓰기가 힘든 아이는 더욱 발전이 더딘 게 아닌가 싶다. 친구의 일기를 보면서 '맞아, 이런 것도 글감이 되는구나!' '참 실감나게 썼네!'하고 스스로 깨닫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서로 비밀을 지켜줄 수 있는 믿을 많나 친구와 바꿔 보기를 권해보고, 혹 아이가 머뭇거리면 자신이 비밀이라고 여기는 부분을 테이프로 붙여 안심시킨 뒤 원하는 만큼 바꿔보는 것도 좋다. 실제로 아무리 일기에 대화 글과 속엣말을 써보라고 해도 잘 쓰지 않던 아이가 친구들과 일기를 바꿔보고 난 뒤에 표현력이 아주 달라진 예가 많다. 친구와 바꿔볼 형편이 아니라면 억지로 하기보다 요즘 책으로 나오는 어린이 일기 글을 한 권쯤 사주는 것도 좋겠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아이들은 일기의 내용 때문에 야단맞아 본 적이 많다고 한다. 그것도 낮은 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그 다음부터 그런 내용은 다시 쓰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엄마 아빠의 나쁜 점이나 집안의 부끄러운 이야기, 선생님을 원망하는 내용 따위를 쓰면 혼나거나 혼날 것 같아 떨린다고 털어놓는다.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어쩌다 아이의 버릇을 고쳐주려고 매를 들었는데 '엄마는 날마다 나를 심하게 때린다'라거나 부부 사이의 작은 말다툼을 '우리 엄마 아빠는 맨날 소리 지르고 싸워서 못살겠다'라고 쓴 일기를 보면 매우 당황하게 된다. 또 '선생님이 싫다'라고 써서 혹시 우리 아이가 미움을 받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스럽다. 그러나 아이들은 마음이 순수한 대신 모든 느낌에서 자기중심이 강하다는 점을 우리 어른들이 헤아려야 한다. 비록 어른들이 보기에 심하게 표현되거나 사실을 부풀려 쓴 글이라 여겨져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늘 품어오던 감정이 아니라 그 날 그 순간에 강하게 전해오는 느낌을 그대로 쓴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아이가 그냥 나오는 대로 쓴 문구들을 자꾸만 문제 삼고 근본원인을 밝히고자 하면 아이는 또 다른 궁지에 몰리게 된다. 끔찍할 만큼 그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많은 아이들은 그 다음의 올바른 환경에 의해 늘 툭툭 털고 제 자리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으니 어른들의 걱정은 괜한 기우가 될 때가 많다.
그리고 아이에게 날마다 일기를 길게 쓰라고 강요하지 말았으면 한다. 높은 학년은 무조건 한 쪽 이상을 쓰라고 하니 아이들은 글자를 크고 넓적하게, 띄어쓰기를 많이, 줄을 자주 바꾸는 것도 모자라 일기장 한 쪽 부분을 고속도로 같이 넓게 비워 두고 쓰는 경우도 있다. 어린 아이들의 마음에 벌써 얇은 눈가림을 가르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일기는 한 사람의 역사와도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무조건 쓰라고 채근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고 인간의 당연한 권리인 자유로운 표현을 익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방학 때 일기를 미뤄보지 않은 아이는 드물다 그리고 일기 때문에 야단 쳐 보지 않은 부모님도 드물 것이다. 아이들도 일기에 대한 불만이 크다. "왜 어른들은 일기 안 써요?" 일기는 어쩌다 가끔 속상하고 울적할 때만 쓰는 것이라고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거든 오늘이라도 어느 구석엔가 처박혀 있는 내 자신의 일기장을 찾아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연필을 잡아보는 것이 훨씬 떳떳한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