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 | [세대횡단 문화읽기]
자유롭다는 춘향이
창무극『춘향전』
박병도 전북도립국악단국악장 상임연출
(2004-02-05 10:32:35)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세상은 기성 제품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우리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골라 입고 사는 것에 불과하다. 색상이 다르고 무늬가 다르고 크기가 다르다는 것은 고유성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중략----- 다르면 얼마나 다르며, 고유한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해아래 고유한 것은 더 이상 없다.'(이승우/작,독(毒)중에서)
독(毒)에는 '새처럼 자유롭다'는 관용구에 안위하는-녹슨 기성에 침을 뱉는 이단자적 모습이 보인다. 새들이 '새처럼' 자유로운 것이라면 꽃이나 돌이나 사람은 왜 자유롭지 않으며, 또한 새의 날개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는, 그들이 '날아 다녀야만'하는 '숙명'을 '자유'로 규정해 버리는 기성관념 안에 늘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한다. 꽃이나 돌이나 사람이 새처럼 자유롭지 못하다는 관념은, 새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새가 있고, 자유롭지 않은 새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허망한 지혜가 아닐 수 없기에, 병든 새, 배고픈 새, 사랑을 잃고 우는 새, 근심이 가득한 새가 날아다니는 창공을 기성화된 고유성에 대입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동물원 우리 안의 동물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는 것처럼, '날아'다니며 그것을 '어슬렁'거리는 자유와 '훨훨' 나는 자유의 차이일 것이며, 새들의 자유도 창공이라는 우리 안의 자유일 것이라고 말한다면, 모두는 숙명 안의 자유일게고 숙명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는 것이다. 작가의 상념은 늘 새로운 심연의 지하세계를 파고드는 습성이 있기에 그 상념의 날개는 훨훨 날아 원시의 고유한 지평 위에 안착하고파 늘 파닥거린다. 그러나 늘 저만의 세계에 아무도 보지 않는 언덕에 서서 발가벗고 환희의 춤을 춘다한들, 그 성취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승전의 춤이 얼마만의 자유희구의 몫으로 침전이 될까.
우리는 이미 기성복을 걸채 버린 「춘향」을 숱하게 만났고, 그 여자는 절대로 외간남자에겐 치마말미를 쥐어주지 않으며, 또한 이십이 안 된 나이에 전광석화 처음 만난 사내와 사랑을 하게 되고, 만난지 수 시간 만에 치마를 풀어 줬으면 절대로 감옥에서 죽을 수 없는 운명으로 존재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돌려놓을 수 없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초연되었을 때, 브로드웨이 극장 앞에서 수많은 크리스챤이 피켓을 들고 와 "왜 지저스가 인간이냐? 신이다. 고로 청바지를 벗겨라."고 데모를 했단다. 마찬가지로 저 신성의 대명사요 절개의 화신이 감옥 안에서 죽어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민중의 희망과 의사를 무시한 이단적 비행(飛行)기록이 될 것이 자명한 일이고, 그렇게 허망이 죽어버린 놈의 절개는 어느 짝에 쓸 것인지 권선징악의 교본에도 도시 어울리지 않는 일임을 염려하며, 죽은 혼령 앞에 출도한 장관(壯觀)의 암행어사는 줄 떨어진 개밥통격이 되어 오장 터지는 박수 한번 제대로 갈겨줄 개제가 없어지는 꼴이 될 것을 모두는 염려한다.
나는 애초, 언젠가 기회가 주어져 「춘향」이를 요리할 때가 된다면, 처음 장면을 꼭 옥에서 죽어 나자빠진「춘향」이로 시작하고 싶었다. 그 다음의 세계는 아주 자유로울 수 있다고 가정한 나의 신비(神秘) 도금(鍍金)적 몽환은, 언제나 그 미지의 자유언덕을 향한 분망한 야간비행을 시작할 수 있겠다. 그 자유야 내 한계 안의 자유겠지만, 어째 거나 그렇게 시작한「춘향」은 일단은 현실과 비현실을 지맘대로 왕래할 수 있으니-, 그담의 예기는「춘향」의 숙명일 수밖에.
「춘향」이가 언제 살았든, 혹은 앞으로 살아 갈 것이든 관계없이 그「춘향」이는 하도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입 맞추고 버리는 다시 껴안은 여자이기에,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좀 특별히 만나고 싶은 열망으로 스스로의 상봉의 의미를 각별히 갖고자 하는 데 나는 유감이 있다.
올해만큼 「춘향」이가 내장산 단풍만큼이나 허천난 일도 없을 것이다. 창무극으로, 오페라로, 가무극으로, 무용극으로, TV드라마로 제작되어 국내외를 누빈 적이 일찍이 드물었고, 제각각 만드는 이마다 특별한 고유성과 독창성을 주창하고 나서기에 그나마 수없는 세월 속에 만신창이가 된 가련한「춘향」이는 또다시 별다른 작가적 양식에 의해 억지로라도 헤픈 여자로 치장이 되어 우리 앞에 나서야 했다. 전통 한국 춤을 춰야 했으며, 가야금에 창을 해야 했으며, 현대무용에 가랑이를 찢어야 했고, 피아노에 목젖을 올려야 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선 「춘향」이는 다 그렇고 그런 여자였고, 만든 이에게 특별한 의미를 인각한 나르시스트들의 말랑한 탐닉의 제리였다.
만든 이마다 제 것 이전의 것은 다 화냥년이고, 작가의 몽환적 사추의 부산물이며, 어설픈 드라마트루기의 히어로일 것이라는-그 '단정의 반대급부'를 천명하고 나선 기막힌 대변 효과가 작가적 유약함의 은폐였다면 차라리 나는 일일이 악수라도 청하고 싶다.
굳이 전통양식의 고찰부터 시작하자는 나의 작업은 그 누가 얘기한 전설 속의 요조숙녀도 아니요, 반항적 작가의식이 배양해낸 첨단의 엑스숙녀도 아니요, '현대화'라는 미명 하에 강박감이 빚어낸 '어찌-현대시리 만들어 볼-그냥 마구 현대숙녀라야 하는-그런'여자도 아니요 아무 여자도 아닌, 배역 맡은 그 누구라도 좋은 당사자식「춘향」이면 되었다. 어차피 현대화란 것은 현대를 사는 여자가 무대에 서니 일차적 논거는 해결된 것이고, 160분을 끌고 가는 극적 파워와 작가적 양식과 변수가 말해주는 것이기에, 줄곧 시대마다 그 시대에 현대화되어야 할 특별한 의미의 「춘향이의 춘향이짓」은 논외의 문제였다.
손목을 잡으니 심장을 맴도는 피돌리기의 요동은 윗가슴 아랫가슴을 내리 휘저으며 방망이질 해대는데, 삭풍에 살점 떼는 관솔불 같은 눈빛은 이미 그대의 찢어지는 가슴을 알고도 남아, 그대 등 돌려 내게 차마 마음에 없는 위로라도 한마디 던질 것을 내 이미 짐작하여, 나의 입에서는 아직껏 그대 손금만을 읽고 있는가? 이러한「춘향」은, 관객은 저만큼 가는데 그녀는 아직도 제자리인 셈이다. 나의「춘향」이는 최소한 이러한「춘향」의 극적 행보를 동행하고자 하는 관객들의 시선과 느낌을 존중하고 싶었다. 한국 사람치고「춘향」을 모른다면 말이 안 될뿐더러 이미 이렇고 저런 그녀를 다들 만나본 터에, 단지 음악적(성악적) 증폭이라는 미명하에 하나의 상황 속에 관객을 끝없이 잡아 놓을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구경 없어 눈 허전하고 듣는다야 지게목발 소리에 귀 허전하던 마당에 찾아와, 가락가락 내신세요 마디마디 내 청춘이던 시절이 아니니 말이다.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관점을 들추자니, 첫째는 내 자신 또한 그 구호의 강박사슬에 자유로워야함이 점검되어져야 할 것이고, 둘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음악극으로서의 서구의 오페라에 비견하는 음악적 틀을 관현악의 음궤에 쌓아 보자는 것-그런다고 그 음악은 음악대로 독립된 하나의 음악이 드라마에 합쳐졌다고 우기는 농아(聾啞)가 있다면, 그것도 나의「춘향」이가 만들어 내 수많은 장외인물 중의 하나니까 재미있는 부산물일거고. 아무튼 북 하나에 목청 하나로 버티던 우리의 자랑스런 고유성이라는 것이, 그것도 우리네 악기로 편성된 오케스트라에 의해 음악적 마디(악보)의 콩나물을 펄펄 끓여대고 싶었고, 셋째로 전통적 연희술을 일단을 수용하되 과감히 버리고 취해야 할 것에 양보하지 않는 것. <연출의 변>에 밝혔듯이 차후에 습작해 봐야 할 표현적 양식의 감각적「춘향」을 내놓았다가는 바탕소리에 근원을 둔 성악적 틀을 전면 재고해야 할 것이기에 시기상조인 것이고, 그러기에 정통리얼리즘에 간근한 극적연희를 감히 제시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소리는 소리제로' '드라마는 드라마답게'의 터울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욱 이 관건으로 승부감을 가졌고. 다섯째는 내 이미 한국인으로 태어나 이상 가설무대 국극「춘향」으로부터 수없이 만난 어떤 「춘향」도 좋을 내 내면의「춘향」을 기지개 켜는 20세기의 새로운 아침녘에 만나는 대로 줄줄이 자유롭게 이으면 될 것이었다.
모두의 작가의식은 이미 그가 터득하고 습득한 생리적 심리적 현상에 다름 아닐 것이고, 다만 어떤 형식이나 틀을 빌려 그의 사유를 인정하자는 것일진대, 가도 가도 끝이 없을 자기로부터의 탈출을 본디의 자리를 다시 밟자는 자유희구의 부단한 몸짓임을-막이 오른 무대를 보며 잠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 이제는 또 다른 자유로움으로 미몽 간에 달려오는 저 붉디붉은 치맛자락의 설레임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제 삶의 방식만큼이나 모습을 그려내는 시대마다의「춘향」은 당자의 진실만큼 보여질 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진실 속엔 감동이 존재해야 하며, 그 어떤 모습의 감동이든 일단은 객관의 나를 감동시키고 나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