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12 | [특집]
미술 평년작,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김선태 미술평론가
(2004-02-05 10:36:21)
올 한해도 전북미술계를 뒤돌아 볼 때, 양적인 면에서는 예년과 비슷한 수준의 개인전, 그룹전, 기획전이 열렸으며, 질적인 면에서도 뚜렷한 변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러한 양상은 이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추세로 여겨진다. 특히, 80년대부터 계속되어온 모더니즘 대 민중미술 논쟁이 한풀 꺾이면서 다원화적인 추세에서 작가 스스로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획득하기 위한 일면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구상과 추상의 혼재, 일상적 주제의 부각으로 인한 시점의 확산, 다양한 이미지의 표출 등의 현상들이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전북미술계의 몇 가지 특징적인 경향 중에서, 우선 작품 및 작가의 내적요인의 변화로는 첫째로, 젊은 구상계열작가들의 적극적인 작업태도로 인해, 다분히 향토색이 강한 답보적인 수준의 사실 풍을 벗어나, 전주 구상회화의 기반을 다져 가고 있다. (쟁이전, 조병철, 정병수, 김명식 전)이들의 작업은 사실 풍에 근간을 두고 있으나, 향토적 서정이나 민족적 정감을 추구하면서, 특히, 인물화에서는 인간의 본질이나 내면에 나타나는 근원적인 고뇌를 표출하고자 하는 새로운 경향도 보이고 있다.
둘째로, '한국성'과 '전통성' 추구에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작가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김한창, 김부견, 최원, 여태명, 전양기 등등)이들의 작품은 전통을 계승한다는 취지 하에 한국적 미의식을 통해 우리 민족 고유의 그림 내용과 현실을 펼쳐 보이는데 있어서 단순히 한국적 소재주의나 미의 특수주의에 안주하지 않고 서구화된 미술풍토에 나름대로 정당성을 확보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셋째로는, 예년에 비해 장르 구분 없이 "3인전" 형식의 친목위주의 전시회가 빈번했다. 그 원인은 90년대의 미술계의 현저한 이념적 표류로 인해 같은 경향의 색깔을 지닌 다수가 참여하는 번거로운 그룹전보다는, 삼인전 형식의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서로가 격려하는 수준에서 전시회가 이루어지고 있음이며, 이는 장르 구분 없이 관객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전시 행태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넷째로, 여류화가의 활동이 요즘 들어 눈에 띄게 활발했다. 물론 현행 미술대학의 남, 여 비율로 볼 때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여성들의 적극적인 작품 활동은 그만큼 전북미술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점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하다. 그러나 여류화가들의 작품이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바탕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자세도 중요하겠지만 , 아쉬운 점은 남성의 사회, 문화적 영역에 여성이 동참하기 위해서 왜곡된 역사, 문화를 인식하고 이 과정을 통해 여성의 자아실현이 가능할 수 있는 올바른 여성주의의 미술이 탄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으로, 외적인 변화요인으로는 첫째, 화랑 연합전을 들 수 있겠다. 미술시장의 침체를 극복하고 나아가 관객확보 초점을 맞춘다는 취지로 열린 화랑연합전은 미흡한 행사나 홍보로 약간의 어려움도 따랐으나, 장기적으로 볼 때 , 연합전의 형태를 미술제로 발전시켜 그 목적에 부합하는 형태로 가꾸어져 이 지역 미술발전에 기여하리라 여겨진다. 미술시장이 없는 이 지역화단의 회생이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가들의 작품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질 때만이 지방미술의 활성화가 가능할 것이다.
둘째로는 작년에 정갤러리의 개관에 이어서 올해에도 상업화랑의 면모를 갖춘 갤러리 '민촌'의 개관으로 전시공간의 확대와 "전북문화 예술연구소" 설립에 의한 미술 분야 기획부분의 전문성 추구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상업화랑의 개관과 미술연구소의 설립은 대중과 미술과의 거리를 좁히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에 관심을 갖게 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올 한해도 다양한 전시회가 열렸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가 담긴 전시로는, 먼저 "동학혁명100주년 기념 순회전"을 손꼽을 수 있겠다. 여기에 출품된 작품을 통해 동학농민의 정신을 상기해 보면서, 과거와 현재사이에 무엇이 그르고 정당한가를 되새겨볼 때 , 미술인들이 해야 할 일과 일반대중이 해야 할 일등 각자의 자기 몫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전시였다. 다음으로, 얼화랑 7주년 개관 기념전으로 권영술 화백의 초대전이었다. 그의 현재의 작품이 보여주듯이 우리의 근대 미술사를 장식하고도 부족함이 없는 그의 독특한 미의식의 세계가 이제라도 올곧은 자리매김이 이루어지기에 퍽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올 한해도 풍성한 작품전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화가는 많은 작품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의 정신 속에서 표출되는 세계를 작품으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전시는 결국 화가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며, 그의 정신과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다. 전주에서도 많은 전시들이 잇달아 열리고 있지만, 화가 자신과 대중과의 소통을 이루어내면서 감동을 줄 수 있는 전시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를 염두해 볼 때 전북지역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인식해야 할 부분은, 여러 가지 지역적인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서구적 유행이나 서류를 쫓지 않고 올바른 지역주의 미술을 추구할 때, 비록 그 작가의 우수성은 곧 바로 다수의 시각을 모아둘 수는 없더라도 그 오롯함에 꿰인 소수의 눈들은 그들을 계속 주시해 볼 것이고 아울러 가장 한국적인 작가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