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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0 | [교사일기]
타성
박병윤/이리여고 교사 (2004-02-05 11:07:07)
국어시간이다. 용비어천가 2장을 한참 설명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선생님!'하고 부른다. 선생님은 설명을 하다 말고,'왜 그래, 덕례?'하고 묻는다. '선생님, 제 짝궁이 화장실에 가고 싶대요.' 순식간에 교실은 웃음 바다가 된다. 덕례 짝궁은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 눈치만 보고 있다. '그래, 옷에다 쉬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 가라고 할 수 밖에... 순이, 빨리 갔다와!' 하는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순이는 화장실로 달려 간다. 순이가 나가고, 선생님은 시계를 본다. 이제 10분밖에 안남았다. 불휘 기픈 남 ㄱㅂㄹ매 아니 뮐시를 다시 설명하려니 맥이 빠진다. "얘들아, 고등학교 3학년이 오줌 싸는 것 하나 못 가려서 꼭 수업중에 이래야 쓰겠니? 그리고 내가 학년초에 말했잖아. 영 다급하면 그냥 갔다 오라고. 아주 급한데, 선생님이 가지 말란다고 옷에다 일볼 수는 없을 거 아니냐, 그러니 수업 분위기 흩뜨리지 말고 살짝 갔다 오는 것이 예의라고.."하며 언성을 높인다."선생님! 순이가 깜박 잊었나 봐요.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은 그렇게 말없이 나가면 혼내시거든요." 하고 실장이 대변한다. 고등학교 수업 현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서 그냥 보아 넘길 일만은 아니 것 같다. 학생이 쉬는 시간을 활용하지 않고 수업시간에 화장실에 간다는 것도 문제려니와, 어쩔 수 없이 꼭 가야 될 경우에도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것도 생각해봄 직하다. 더욱 문제가 되는 일은 이런 일이 타성에 젖어 선생님이건, 학생이건 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그로 인해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타성에 젖어 든다는 것이 좋은 일은 못 된다. 타성에 젖어들면 그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생각도 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성은 개인 뿐 아니라, 어떤 단체 속에서도 나타나고 단체에서 굳어진 타성은 더욱 고쳐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타성에 젖어 고쳐지지 않는 일들이 있다. 월요일 1교시, 학급회의 시간이다. 담임 선생님께서 '서기는 오늘 회의 주제를 교무실에 가서 알아다가 학급회의록 작성하여 지도주임 선생님께 내고, 나머지 학생들은 조용히 자율학습 해라'학 선생님도 교탁에 앉아 신분을 본다. 서기는'교통질서를 잘 지키자'는 회의주제를 알아다가 회의록에 적는 다. 회의 내용에는 1)좌측통행을 잘하자(조영순) 2)신호등을 잘지키자(임정옥) 3)횡단보도를 이용하자(김수이) 등을 쓰고, 담임 선생님의 도장을 찍어, 학급회의록을 제출하고 돌아 와, 다른 아이들과 같이 자율학습을 한다. 각 학급의 서기가 제출한 학급회의록은 지도 주임 선생님이 결재하고, 다시 교감, 교장의 도장이 찍힌다. 누가 보아도 이 학교는, 민주 시민으로서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 법정 이수 단위 시간으로 책정된 학급회의가 한치의 빈틈도 없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진실만을 가르쳐야 할 선생님이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학생들에게 연습시키고 있는데도 말이다. 보충수업, 자율학습의 문제도 그렇다. 보충수업은 3공화국시절, 학생들의 성적을 향상시키기보다는 선생들의 봉급을 올려 줄 수가 없으니까 정부가 돈 안 들이고 인심 쓸 방법을 찾은 것이 보충수업이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보충수업이 5,6공으로 접어들면서 정권 유지적 차원에서 팔팔한 고등학생들을 학교에 잡아 두기 위한 목적으로 자율학습까지 강화되었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보충수업, 자율학습이라는 덫에 걸려 죽어 갔다. 학생들에게는 오로지 공부, 공부밖에는 없었고, 옆 짝궁도 친한 친구도 경쟁 대상으로 바뀌어 갔다.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천덕꾸러기가 되어 비행 청소년으로 전락하였고, 공부 잘하는 아이는 자기밖에 모르는 공부벌레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장이나 선생님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교장에게 보충수업, 자율학습은 선생과 학생을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만능 열쇠였다. 학생들을 밥 늦게까지 잡아 놓으니 사고 칠 염려 없어 좋고, 보충수업비 중 20%는 관리비로 책정되어 있어 당신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좋아, 학부형들에게 학생들 공부 잘 시킨 다고 칭찬 들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학부형들에게도 보충수업, 자율학습은 대단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가장 적은 비용으로 공부시킬 수 있는 방법이거니와 너나없이 똑같이 시키니 그런 대로 위안도 되는 것이다. 선생님들도 역시 극구 반대할 이유가 없다. 빠듯한 봉급 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니, 노느니 염불 왼다는 식이다. 결국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학교장, 학부모, 선생님들이 단합하여 아이들을 조금씩 조금씩 죽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누구 한 사람 나서서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일은 지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있어 왔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올해부터 대입 시험 제도가 바뀌었다. 대입학력고사에서 대학수학능력고사로 바꾸어진 것이다. 그동안 학력고사가 단순 암기식 지식 평가 위주의 문제였다면, 수학능력고사는 종합사고력 평가 위주의 시험이 될 것이다 하여 전국민의 관심속에서 지난 8월20일에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다행히 평가 문항이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평이었다. 이에 따라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육 방향이 많이 달라 졌다. 그런데 그 달라졌다는 것이 바꾸어진 출제방식에 적응시키기 위하여 대학 수학 능력고사에 나올 듯한 문제들을 만들어 훈련을 시키는 것이 고작이다. 보충수업만으로 부족하여 특보(특별 보충수업)을 만들고 특특보(특수아를 위한 특별보충수업)을 만들어, 또다시 대학수학능력고사에 대비한 문제들을 풀게 하여 수학능력고사 문제 잘 푸는 기계를 만들어 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타성의 힘이 얼마나 큰 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본래, 대학입시제도를 수학능력고사로 바꾼 목적은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한 교육 개혁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작태로 보아서는 본말이 전도되어 학생이나 선생님들에 부담만 가중시킨 결과가 되지 않을 가 걱정된다. 종합적 사고 능력을 기르기 위한 다양한 수업 방법이 모색, 독서 교육의 활성화, 정상적인 학급회의 운영, 학생들 스스로 자기의 삶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린 상담 등 교육의 본질적인 면에서 달라지는 것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대학수학능력고사가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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