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1 | [문화칼럼]
대중문화의 인기
조 성 용 / 전북연합 지도위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부회장
(2004-02-05 11:18:43)
대중문화와 인기
요즘 TV등 연예가에서는 「랩」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이 인기 정상을 누리면서 「서태지 증후군」을 자아내고 있다. 그들의 노래는 앞 부분과 사이 사이에 빠른 솜씨로 중얼대는 이른바 「랩」이 나타나는데 노래인지 ′세설(細說)′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랩」(rap)이란 말은 미국 흑인가 청소년들의 입버릇 같은 중얼거림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야기, 수다, 책망, 비난」의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랩」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와 함께 책망을 듣는 셈이 된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말이다. 「랩」음악은 몇 해 전 「엠 씨 해머」라는 가수가 미국을 휩쓸면서 전세계로 확산되었고 한국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우리사회에서 「서태지 신드롬」의 요인은 무엇인가?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유행의 직항로를 이유로 댈 수 있다. 이런 천편일률적인 대답이야 누군들 못하랴. 그럼 「랩」음악이 미국자체를 석권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적이랄까, 미국 젊은이들의 입맛과 정서에 맞는다고 할까, 그런 저런 사연을 갖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랩」음악은 한국에서도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을까?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좋아한다는 근거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에서 좋은 것은 한국에서도 좋다」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사람들의 옷차림, 걸음걸이, 몸짓, 표정, 말투 등등이 너무도 미국적이다. 미국영화나 TV를 보아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필경 그들이 우리를 닮지 않았을 터이니 우리가 그들을 닮아버린 것이다.
「 통일전망대」같은 프로에서 북한 TV화면을 보면 생소하다 못해 민망스럽기 조차하다. 그들이 너무 변한 탓이겠지만 우리 또한 너무 변했다. 북쪽 사정은 제쳐두고 남쪽 사정만 놓고 본다면 ′변했다′는 것과 、미국을 닮았다′는 것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미국의 영향을 입은지 48년동안에 이토록 닮아버렸으니 장차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전통문화와 외래문화
전통문화는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외래문화는 비판적으로 수용하자!
말깨나 하고 글줄이나 쓰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어느 구석을 살펴봐도 전통문화는 비창조적으로 계승되고 외래문화는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으니 이야말로 큰 일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전통문화의 중요성이 부쩍 강조되는 현상은 다행한 일이지만, 그러다보니 전통이란 것은 없는 가짜들이 시류를 엿보고 끼어든다.
부잣집 응접실 안에 들여 놓은 과거 일본군의 우마차 바퀴, 정체 모를 무당의 푸닥거리, 민속예술경연대회에 뛰어든 디스코풍, 이런 따위는 전통문화가 아니다.
전통문화는 조상의 숨결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분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이 줄기와 가닥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받들고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전통문화를 흠없이 보전하고 그것을 잘 가꿔서 후손들에게 인계할 책임이 있다. 유서깊은 고분을 마구 파헤쳐서는 안되지만 마냥 방치해서도 안된다. 얼핏 듣기에 앞뒤가 모순되는 얘기 같지만 책임이란 이렇게 까다롭고 힘든 것이다.
외래문화는 어떤가?
미국문화가 나쁜 것이 아니요, 외래문화라고 해서 배척할 일은 아니다. 서양문화에는 근대정신의 기틀이 있다. 지금 우리사회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규범인 민주주의와 평등사상,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관리법 등은 서양문화 전통에서 유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아무리 따르고 배워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서양문화 특히 미국문화에서 긍정적인 면 보다는 부정적인 면, 예를 들면 소비문화, 퇴폐 향락문화, 개인주의, 편의주의를 쉽게 받아 들인다. 우리는 외래문화에서 받아들일 것과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을 구분해야 한다.
그 기준은 우리사회, 우리들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주체성이다.
민족문화의 창조
통일이 되면 남북한 동포가 한데 어우러져 무슨 노래를 부를까? 「아리랑」을 부를까? 「고향의 봄」을 부를까? 「아리랑」이라도 있어서 망정이지 그밖에 마땅한 노래가 없다. 통일 축제에서는 무슨 곡을 연주할까? 궁중음악인 「수제천」을 연주할까? ′베에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연주할까?
우리는 문화민족임을 세계만방에 자랑하고 있지만 몽매에도 그리는 통일이 성취되었을 때 연주할 곡목 하나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통일은 아직도 하나의 허상(虛像)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핀란드사람들은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를 들을 때 머리끝이 솟구친다. 체코사람들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들을 때 마음이 하나가 된다. 프랑스사람들은 1789년의 「인권선언」을 인류역사에 으뜸가는 쾌거로 내세운다. 구태여 어거지로 화합과 단결과 자존심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이런 것을 만들고 이런 정신을 배워야 한다.
2시간 10분벽을 깬 마라톤에만 5천만원, 1억원의 상금을 지급할 일이 아니다. 몇 년의 기간이 걸리고 얼마의 예산이 들더라도 온 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교향시 한곡 쯤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이런 일은 문화단체의 몫이 되어도 좋고 정부가 앞장서도 좋다. 이렇게 우리는 정말 소중한 자산을 하나씩 하나씩 가꿔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