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2 | [서평]
목표의 재확인을 위한 시도
『참된 시작』
(1993, 박노해, 창작과 비평)
정철성 / 전북대 강사·편집위원
(2004-02-05 11:52:34)
올해가 저물기 전에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시집이 있다. 바로 박노해의 두 번째 시집『참된 시작』이다. 여기 쉰네편의 시들이 4부에 나뉘어 실려 있는데 그 1, 2부는 주로 감옥에서 쓴 옥중시들이고 3, 4부는 노동현장의 시들이다. 이는 제작시기가 다르느 두 종류의 시들을 시간의 순서를 거꾸로 세워 하나의 시집에 담은 결과이다. 우리는 이 시집에서 현장체험으로부터 그의 최근의 tlarud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그의 시가 거쳐온 변모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첫 시집『노동의 새벽』이 던져준 충격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십여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가를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에는 격동의 시기가 아닌 적이 없었고 지난 십년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월항쟁과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대표되는 국내외의 변화를 겪은 후 우리는 이른바 신한국의문님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사정을 시인은 "경악하여 눈 싯고 보니 현실은 급변하고/민중의 마음도 저만큼 달라져가고 있네" (「닭갈비」)라고 전하다. 시의 목소리 다시 말해 시의 화자를 통해 박노해 시의대체적인 윤곽을 그려보자. 첫 시집의 발언자는 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달아사는 노동자들 이었다. 두 번째 시집의 후반부에서는 조직력을 갖춘 노동자들이 파업현장에서 외치는 함성이 들린다. 그러나 전반부의 목소리는 감옥 '독거방'에서 들려온다. 이것을 연결시키면 몇몇 의식있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하나씩 모여들더니 이윽고 커다란 함성으로 터져나왔다가 갑자기하나의 외로운 절규를 남기고 사라져 버리는 과정이 떠오를 것이다.
『참된 시작』제1부의 시들은 패배의 가락을 담아 창백하다. 패배가 더욱 힘겨운 것은 이념의 한 구심점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동구의 변화 및 소연방의 해체가 가져온 대안의 부재를 의미한다. 한국의 진보세력이 현실사회주의에 빚진 것이 이다지도컸던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방향감의 상실은 운동의 지향점을 처음부터 다시 점검하도록 강요한다.
박노해 역시 "세계를 위흔들며 모스크바에서 몰아친 삭풍"을 "잿빛 하늘에선 까마귀떼가 체포조처럼 낙하하고/지친 육신에 가차 없느 포승줄이 감기었다."(「그해 겨울나무」)는 사실에 못지 않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시는 '패배'를 '참된 시작'으로 지양하려는 시인의 힘겨운 몸짓을 보여준다. "절대적이던 남의 것이 무너져 내렸고/그것은 정해진 추락이었다"는 판단은 누가 뭐 해도 결과론으로 몰아붙일 수 없는 고뇌의 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윽고 "죽음 같은 자기비판을 앓고난 수척한 얼굴들은/아무데도 아무데도 의지해서는 안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결단에 이르면 우리는 그가 새로운 출발에 '참된 시작'이라는 이름ㅇ르 붙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그해 겨울나무」가 보여주는 칼바람, 언땅, 그리고 겨울나무의 뿌리등의 이미지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낯익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핏속으로 뼛속으로 차오르는 푸르름"같은 구절은 새봄을 맞아 수액이 차오르는 나무의 초록빛을 기다리는 해묵은 기대를 새롭게 투영한다.
그가 대지에 뿌리박은 삶을 다짐하면서 감탄하는 또 하나의 대상으로 고목에 돋은 새순이 있다.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돋아오르는 새싹을 그는 "오 눈부신 강철 새잎(「강첲새잎」)이라고 부른다. 강철의 강인함과 단호함은 자본과 노동자를 가차없이 구분하는 전선 가르기의 확신을 품고 있다. 우리는 무쇠를 담금질하여 강철을 얻는다. 박노해는 "우이모두는 무쇠같은 존재" 여서강철이 따로 없다고 힘주어말한다.(「강철은 따로 없다」). 이런 강철을 새싹에 접합시켜 그는 부드러운 우면서도 끈질기고 힘찬 민중의 저력을 부각시키려한다. 그러나 이 작은 강청 새잎을 마주하면 신선함과함께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복합감정의 원인은 유월항쟁ㅇ 이후의 개량 국면에 대한 실망에 있지만. 강철이 이제 변혁의 첨단소재가 아니라 흔하게 굴러 다니는 쇳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박노해의 시에서 느껴지는 힘은 자본과 노동자의대립이라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 대립은 자본주의의 발생과 더불어 형성된 고전적이고 필연적인 갈등의 형식이다. 박노해가 사용하는 소재들이--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가 등한시했을 뿐-- 사실은 낯익은 것들이란느 점은 그의 시가 추구하는 이상이 이미 지난 세기부터 노동자들이 꿈구어온 변혁의 목표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과 통한다. 전 지구의 자본주의화라는 일반적인 상황과 냉전 시대의 논리가 아직도 분단 으로 이어진 한국적 특수성을 동시에 감안할 때 우리의 노동이 어떤 형식으로 목표를 재확인해야 하는 가 라는 과제는 분명 쉬운 해결책을 예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의 현장을 가장 사실적으로 시화했던 박노해의 '참된 시작'에 우리가 다시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작업이 고통스럽지만 버거운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참된 시작』3부에 나오는 몇편의 tgls명나는 시들 덕분이다. 예컨데 「임투전진 촉구 대회」나 「못생긴 덕분에」등의 시는 정체성을 확보한 자신감이 투쟁의 현장에서도 삶에 여유를 부여하는 행복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이런 성취감이 "쓰라린 패배의 노동을"(「조업재개」)다시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견디게 도와주는 토대가 될 것이다.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알려졌던 그의 얼굴이 두 번째 시집의 표지에는 치켜뜬 눈으로 실려있다. 그는 첫 번째 시집 한권으로 이미 문학사의 한면을 차지한 이름이 되엇다. 그의 두 번째 시집이 그만한 충격으로 느껴지지는 않을지 몰라도 시와 현실의 관계를 직시하는 독자에게는 귀한 점검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