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2 | [서평]
한국적 한의 긍정적 가치 지향
『한의 구조 연구』
(1993, 천이두, 문학과 지성사)
전정구 / 전북대 국문과 교수
(2004-02-05 11:54:27)
한에 관한 논의들은 정한론(情限論)과 원한론(願限論/怨恨論)을 비롯하여 민중적 한론, 혹은 심리적 복합정서로서의 한론(恨論)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다양한 관전과 시각에서 한국적 한의 본질과 실체를 구명하려는 기존의 논의 과정에서 드러난 바, 한에 관한 이론적 접근은 그 성과가 의심스러울 만큼 정설이 없고 복잡다기하다. 한은 한국인의 심성에 내재한 민족성으로부터 연워된 불가해한, 그리하여 그 실체를 가늠할 수 없고 일정한 이론의 틀로 포착하기 어려운 대상인지도 모른다, 한은 우리의 문학/문화 속에서 때로는 저항과 분노로, 때로는 좌절과 탄식으로, 혹은 체념과 절망으로 표출되면서,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의 전반적 정서와의미를 구획짓는 내재적 요인이 되어 왔다. 그러나 한이 우리 고유의 예술양식의 하나인 판소리나 민요, 나아가 한국문화전반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내는 wndyu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상호모순적이고 다층적인 복합성 때문에 학문적 영역에서 한을 규정짓는 작업 자체가 무모한 일처럼 보였다.
한민족 근원 정서로서의 한에 학문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않은 채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방치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우 때문이다. 뛰어난 현장 비평가였고, 지금은 한국문학 연구의 중진/원로 학자인 천이두 교수가, 10여년의 고뇌에 찬 열정을 바친 연구 테마가 바로 '미지의 /불가해한 한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한의 구조 연구』하는 이름으로 발간했다. 이론적/객관적 한문체계로 수립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던 '한국적 한의 본질과 실체'를 탐구한 이 저서의 가치를 이미 누군가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지적했다. 이 저서는 "다양한 내포를 가진, 때로는 상반된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한에 대해 그것의 심성과 태도, 성격과의미를 면밀하게 해명하면서 우리 고전 문학들에서 그 구체적인 작용의 예들을 풍부하게 붆석하고 가령 일본의 전통적 심성과 어떻게 다른가를 날카롭게 비교함으로써, 느끼기는 하지만 설명하기 까다로운 한 의 숨은 구조와 복합적인 의미망"을 성공적으로 건져 올리고 있다.
기존의 논의들이 한국적한의 일 측면만을 강조하거나 혹은 그것을 이우적 대립 구조로 파악함으로써 그것의 다층적이고 상호모순적 속성을 일원적 구조로 통합 정리하는 데 일정한 한RP를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우리 문화를 지배해온 정서의 중심과 영혼의뿌리, 사유의 형식과 심정의 결을 심층적이며 체계적인 논리로 정립"하여 이런한 한계를 극복한 바, 이 저서는 한국적 한에 관한 총괄적 결산서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한이 자의(字義)를 통하여 그 의미의 내포적 명암(明暗)을 조명하고, 이어 한의 다층성과 다면성의 측면에서 기존의 한론을 비판점검함으로써 한의 통합적 논의를 지향하고 있다. 통합적 논의의 핵심은 「한국적 한의 일원적 구조와 그 삭임의 기능」과 「한국적 한의 화해 지향성」인데, 그것들은 「상극의 원리와 화해의 원리」그리고「삭임의 미학적 윤리적 표상」에서 완결된 성과로 집약된다. 저자는 그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카타르시스로서의 삭임과 그 그늘, 그리고 한의 역설과 그것의집합적 표상"등이, 판소리 중에서도 한의 정서에 가장 맞닿아 있는 「심청전」과 「춘향전」에서 구체화되는가를 분석한다. 심청과 춘향이라는 인물의 액션을 통하여 "한의 풀이와 삭임" 그리고 "한과 정"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분석한 것이 그 실천적 사례이다.
심청은 화해 원리에 입각하여, 자기 한을 삭이어 원(願)으로 전화(轉化)시키고, 나아가서 해원 「소원성취」을 이룩한다. 여기에 심청의 한의 꾸준한 가치 지향성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한국적 한의 역설이기도 하다(165면). 타인에 의하여 한이 형성되었다 할지라도 보복 복수로써 이를 푸는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내면에서 삭이는 방법으로써 이를 초극한다. 화해 지향성은 이때 형성된다. 이때에 「怨으로서의」한은 정(情)으로 확산된다. 춘향이 나아간 궤적이 바로 이 길 이었던 것이다(185면).
이 저서는 고전과 현대의 운문과 산문을 넘나들며 그 구체적인 사례분석을 바탕으로 한의 다층적 다면성을 구명하면서, 그 구조적 심층에 간직된 의미가 '한국적 한' 그 자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특히 이 저서는 일본의 가타리모노와 중국의 강창을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판소리의 서사구조와 비교하여 '화해지향성으로서의 한국적 한의 가치지향적 특질'을 지적해 낸 점이 돋보인다. "한은 '풀기'에 앞서 '삭이어야' 한다. '풀이'는 개방 살포 행위릴 뿐이므로, 그 자체로서는 가치 지향적일 수 없다. 한은 풀기에 앞서 이를 삭임으로써 그 공격성으로서의 원(怨)과 퇴영성으로서의 탄(嘆)은 초극되고, 우호성으로서의 정(情)과 진취성으로서의 원(願)이 이룩되므로, 삭인 연휴에 이를 풀어야 비로소 그 풀이 행위는 가치 지향적으로 된다(237면)."
한을 논하면서 혹자는 청상과부의 이미지를 떠올려 한을 원한서린 청색에 비유함으로써 그것의 부정적 퇴영적 의미양상을 강조해 온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한의 구조 연구』의 표지화의 그것처럼 한의 색깔은 주황색. 그리고 그것ㅇ느 짙은 주황색에서 옅은 주황색으로 상승하는 이미지를 가진 가변적 색깔이다. 그것은 괴어있고 멈춰있고 고정되어 있는 색깔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묽어지는 색깔, 말하자면 응어리진 원한의 감정을 풀어내는 화해의 색깔이다. 동시에 그것은 미당이 읊었덩 "내 누님닽이 생긴 노란 국화꽃"같은 완숙한 경지에 도달한 여인상, 나아가 이 저서의 표지화로 등장한 연꽃같은 화해로운 여인사에 비유될 수 있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한국적 한은 어두운 자락에서 밝은 자락으로 나아가는 긍정적 가치지향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거의 모든 고전 서사 문학의 구조가 '행복한 결말'을 지향하고, 특히 판소리의 서사 구조가 화해 지향성을 반영하고 있는 사실은, 한국적 한의 구조가 어두운 자락에서 밝은 자락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실과 궤를 같이 한다.(237면)" 한의 긍정적 가치지향성에 대한 저자의 지적이, 해피엔딩을 향한 천편일률적인 고전 서사문학의 결말처리 방식에 대한 필연성과 그 유용성을 해명하는 한 계기가 될 것이다.
초기 저서 예컨데 『한국 현대소설론』이나 『종합에의 의지』등에서 보여준 날카롭고 섬뜩한 언어의 자취가 한의화해원리를 통하여 삭여졌거나, 혹은 묵중한 학문적 무게에 눌려있는 것이아쉽기는 하지만, 『한의 구조 연구』는 인접학문의 통합/화해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학문적 탐구의 엄격성을 철저히 고수한 미덕을 지녔다. 니체와 셸러 등의 르상티망론과 역설적 한을 비교한 『한국적 한의 역설적 구조』, 한국적 한의 승화 과정과 불교의인욕 정진의 과정을 대조한 『한국적 한과 불교』등에서 저자는 이순의 나이에 걸맞는 학문의 종합화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천이두 교수는 다각적이고 다채로운 비교방법을 통하여 한국적 한의 실체를 추구해 나간 바, 이 저서는 이와 유사한 방면의 연구작업이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답안이라는 점에서 동학은 물론 후학들에게 시사나는 바가 크다.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독자들은 이 책을 대하는 순간 깊고 그윽한 학문의 향기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