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2 | [시]
낡은 집에 살며
이철송
(2004-02-05 11:54:51)
낡은 집에 살며
이철송
네 식구 몸 푼 지산동 집에서
아내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놀랠 것 이미 많이 놀래고
월수 이십만으로 한달을 버팅기는, 그녀였지만
유독 벌레에겐 약한 모양이다
나왕 썩은 창틀에서, 방안의 동태를 좌사하는 바퀴며
하늘색 타일이 기계충 앓는 머리빡처럼 듬성듬성 빠져나간
욕탕겸 화장실에서 모르스 부호를 두르리며 귀뚜라미
벽틈을 수시로 들랑거리는 쥐며느리
하늘 흐릴 때, 수채구멍을 어슬렁거리는 지렁이
이놈들이 아내를 놀래키는 주범들이다
동년배의 분신 소식을 듣고도 안쓰런 마음 잠시 보내고
까던 마늘을 계속 까는 아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타죽은 동무에 놀라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최루탄에 죽은 이웃에 놀라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정치에 경제에 세계사에 놀라자 않는다
아마도 누군가 아내의 신경을 담배불로 지져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는 아내가 세상의 미물, 미물 중에서도 처지는
바퀴며 귀뚜라미 쥐며느리 지렁이에 놀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지금 우리가 놀래야 하는 것이
이런 것뿐일까 악악 악쓰며 우리가 놀라고
분노를 보내야 할 것이
정말 낡은 집의 이런 하찮은 것들 뿐일까
60년 전남 나주출생으로 제2회'윤상원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실천문학」(91,가을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목포대학원 국문과에 재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