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2 | [문화저널]
참교육 실천, 그 4년반의 세월
해직에서 복직까지
최병흔 / 전 고창심원중교사
(2004-02-05 11:59:09)
안팎으로 세상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분단의 현실과 맞물리면서 사고와 이념의 폭도 늘 그것에 규제 받아왔고 삶의 질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끊임없이 제한 받아 왔습니다. 정치, 경제적 조건 혹은 구조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삶을 파악하려는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더욱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변화의 진폭이 국내외적으로 그 어느때보다 격렬한 시대임을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김영삼 정권의 '개혁'의 함의가 다분히 언술의 차원에서 유포되고 있는 심리적인 효과라 하더라도 지금껏 변화를 꿈꾸어 왔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고 때로는 도전받고 있습니다. '국제화'라는 대체된 이데올로기까지 덧붙여져 민주와 반민주, 혹은 진보와 보수 등의 대립구조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저널지즘의 영향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는 일상의 삶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다른 국가와 민족의 삶의 형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고, 하나의 생산활동이 생산관계와 생산력,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가치창조 행위로 파악되는 측면보다는, 국가경제 초월하는 국제 교역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실정입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그렇고 권역별로 진행되고 있는 경제 블록화가 바로 그런 징후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상반된 두가지 흐름이 우리의 사고를 교란시키고 있습니다. 솔 동구권, 그리고 아프리카 등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족국가를 지향하는 국가의 해체가 그 한 축이고, 지역간 경제 통합의 짛 또다른 축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이 해체와 통합의 두가지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점에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북한의 현안으로 최근 대두되고 있는 핵사찰과 일괄타결등의 쟁점은 통일기반의 구축을 위한 과정으로 원심력과 구심력 모두들 아우러야 하고 또 활용되어야 하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경제현상 등의 밑바탕이 하나의 정신 또는 일정한 가치 지향없이 추구되면서 마치 시장경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듯한 맹목에 함몰된 듯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다시 교육을 생각합니다. 지난 89년에 전교조를 결성한 이후 벌써 4년 반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의 역사성과 그 정체성은 집단의 권익과 이해를 반영하기보다는 반민주적이고 외세지향의 정치권력과의 지난한 투쟁에서 그 위치를 가늠해 볼수 있습니다. 노사간의 대립이 정권의 개입과 탄압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결론났던 대다수의 경우가 그걸 증명합니다. 이는 국가독점자본주의아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넘어 분단과 군사독재정권 등 한국사의 특수성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보여 집니다.
전교조 결성의 역사적 배경에는 이러한 점이 당연히 전제가 됩니다. 교사운동의 측면보다는 교육운동의 측면이 강조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육부문의 제조건은 결국 정치, 경제, 문화 등 상·하부 구조와의 관련속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흔히 매도당하기 십상인 집단 이기주의에 한번도 전교조가 적용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단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현실생활에서 교육의 비중이 제아무리 큰들 생존의 문제보다 더하랴만은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이 표방하듯 삶의 질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광범위하게 혹은 충격적으로 89년도라는 역사적 지평속에서 제시된 것입니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미래지향적입니다. 물론 교육활동이 인간의 총체적인 문화를 다음 세대에게 전이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내포하지만 그것은 고착의 의미로서가 아닌 다음 단계로의 진전을 위한 축적을 뜻합니다.
89년 전교조에 선뜻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점들일 것입니다.
수만에 이르는 직접적 참여자에게 잠재적 참여자까지 당시 우리교육,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교육이 기능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있어 왔고 그러한 교육구조는 동시대 사회 구성원의 삶을 끊임없이 왜곡시키고 있다는 거시적인 판단이 우선 앞섰다고 생각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분명 옳았던 것 같습니다. 최근의 학교교육의 변화는 일정하게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불완전하지만 통합적 사고력과 창의력의 덕목이 학교교육의 중요과제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생활의 구현과 습득의 과정없이 진정한 시회적 통합도 어렵다는 깨달음도 확대되고 있고, 그리하여 전에없이 특별활동과 자치활동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시적인 변화보다도 새로운 가치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넓혀졌다는 데서 찾고 싶습니다.
사실 군사정권의 폐해가 교육부문에까지 미친 영향은 심대합니다. 가령 학습시간만 많이 투여하면 양질의 교육은 보장된다는 식의 논리나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의 과다한 실시) 명령과 지시만으로 학교행정의 효율성을 삼으려 했던 점은 그런 예에 속합니다. 교육주체를 하나의 객체로서만 이해했다는 증거입니다. 성과주의에 집착하면서 교육의 전문성과 자주성 확보에는 실패한 것입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러한 잘못에 대한 인식이 교육주체뿐만 아니라 교육의 실수요자(?)라 할 수 있는 대자본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입니다. 과거와 같은 낡은 교육방식으로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인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단순 암기와 획일적 사고의 인간형이 아닌 개성과 창의력, 그리고 통합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형을 필요로 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업의 필요에 의해서라도 교육의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수학능력시험이 이를 대표합니다.
해직교사의 복직도 새정부가 표방하듯 국민화합의 차원도 있겠지만 해직교사, 또는 전교조가 지닌 개혁역량을 활용해 보겠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엄밀히 말해 이런 정도의 변화에 대한 예견과 준비는 전교조 결성 이전부터 상당수의교사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 존엄에 대한 자각과 궁극적인 인간성과 자아실현, 그리고 그러한 사회 변화에 더 큰 무게중심을 두었다는 점입니다. 전교조는 그러한 내용을 조직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한 세월을 성큼 지나왔던 것만 가지고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고백컨대 해직 당시 개인적으로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확신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저 잘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당시 수업을 받고 있던 아이들한테도 빠르면 한두 달만에 돌아올 수 있으리란 말까지 해댔습니다. 아직도 너훌거리는 향내를 기억하는 석란 한 주도 한아이에게 맡기면서 돌올 때까지만 잘 길러달라는 예의 부탁을 한 것입니다. 3년쯤 되면서 해직기간이 좀 길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느낌을 재촉한 것은 연로하신 부모님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진데 아직껏 어머님을 설득하는데는 성공을 거둔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특히 당신의 체험에 바탕을 둔 역사인식을 바꿀 재간은 다른 누구라도 없을 것입니다. 평생을 땅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오시고, 격변의 근현대를 거쳐오면서 '앞에 나선 사름은 다 다치거나 망했다'는 경험적 사실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게다가 해직기간동안 한 '일'들이 나름의 교육운동이라면 어머님은 그걸 일로는 쳐주질 않습니다.
세대간의 갈등과 사고의 차이가 단순히 관습과 전통의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 소산이라는 점을 뒤늦게 확인한 셈입니다. 학교현장에서도 부분적으로 이런 점들이 인정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쉬운 점은 너무 많습니다. 전교조 결성과 그 이후의 여러 활동을 갈등의 관계가 아닌 교육계의 활력을 모색하는 창조적 긴장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점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쪽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따위의 논리로는 다원화되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처할 능력을 곧 상실하게 마련입니다. 공정한 경쟁의 룰을 활용해야 합니다. 만약 교육계가 사회변화와는 관련없이 지켜내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권력이나 기타의 정파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인간궁극의 가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가치조차도 다중의 지혜를 모아내는 과정에서 성립하는 것이 온당한 방법입니다.
해직기간 동안 우리는 새로운 교육질서를 모색해왔습니다. 불가피하게 정권의 탄압속에서 복직투쟁에 상당한 역량을 투입하면서 교육대안 세력으로서의 자기역할에 과연 충실했는지 자신하진 못하지만 그러나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를 이끌어 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광범위한 실천역량도 또한 축적했습니다. 중안집권화된 체제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지역사회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가치정립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지역사회 교과서 개발을 기획중에 있습니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와의 상호신뢰도와 서로 그들을 바라보는 태도도 일정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그러한 노력은 더욱 확대될것입니다. 지역별로 진행된 향토사랑반과 집단상담반의 활동들이 그런 예에 속합니다.
교사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 이처럼 역동적인 방법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교사 학생과의 새로운 인격으로의 만남으로 인한 인간의 변화가능성에 대해 참여교사 모두가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내년 3월이면 대다수의 해직 교사들이 다시 교단으로 돌아갑니다. 복직을 원점으로의 회귀가 아니 새로운 체험과 도전으로 받아들이면서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도 해갈 작정입니다. 겸허하게 말입니다. 처한 조건에서 조금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지 결코 해직교사들 이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에 다들 동의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도움될만한 것은 무엇인가.함께 찾아내서 현직에 계신 선생님이나 해직교사는 물론 아 나라 교육 모두가 더불어 풍부해지는 계길고 삼았으면 그만한 보람도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