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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 | [문화시평]
새로운 우리음악에 대한 갈망 충족 신음악연주단 「어울림의 소리맞이」 공연
글/황미연 전북대 국악과 강사 (2004-02-05 12:08:26)
우리 전통음악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상황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설득력있고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음악 찾기 운동이 요즘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몇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현재의 감각과는 거리가 먼 테두리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현실의 대중과는 괴리감을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올해가 국악의 해이지만 뚜렷한 방향제시 하나도 못하고 그저 관례적, 소극적으로 몇몇의 공연만이 선보였을 뿐 대중과의 교감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은 음악대로 청중은 청중대로 각자 흘러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국악계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화저널이 창간 7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12월 17일 전북예술회관에서 가졌던 신음악연주단 「어울림의 소리맞이」공연은 우리 음악에 대한 청중들의 목마름을 어느정도 해소시켜주는 좋은 기회였다. 어울림의 창단취지가 대중에게 친근하면서도 우리다움과 대중성을 잃지 않은 음악과 현대적 감각에 맞는 음악을 연주하고자 하였던 것처럼 이날의 연주는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전주의 청중들에게 새로운 음악의 그리움에 대한 답을 던져 주었다. 특히 이날 연주가 지나치게 도식적이지도 않고 의례적이지도 않으면서 우리다움을 표출하는 연주에 관중들은 음악의 편안함과 신선함을 경청할 수 있었다. 요즈음의 국악창작곡이 대부분 관현악곡과 독주곡으로 너무 무겁거나 정적으로 흘러 실내악단 창단은 곧 실내악곡의 창출이 기도하다는 측면에서 환영을 받을 만 한 것이 사실이다. 이날의 연주는 1분 2부로 나뉘어져 가야금과 대금, 해금, 장고, 기타 그리고 신디사이저가 만나, 외래악기로도 우리음악을, 우리악기로도 새롭고 현대적인 감각에 맞는 음악을 연주할 수 이음을 시사했다. 특히 이러한 일련의 만남은 우리악기의 은은함과 서양악기의 경쾌한 소리의 화합과 노래로 이어져 우리음악이 어렵고 멀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으며 얼마든지 쉽고 가까이서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악기가 사랑방 음악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악기인 만큼 음향에 있어서 서양악기에 비해 적고, 또한 큰 무대에서 음향이 문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크를 사용하는데 이는 우리 악기의 음색을 변질시킬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마땅치 않다고 본다. 이는 곧 무대 설정이 문제로도 연관이 되는 것이다. 무대가 그리 크지 않는 소형이라면 굳이 마이크를 사용치 않아도 된다. 크게 벌려서 공연해야만이 잘된 연주회라는 생각보다는 실내악에 맞게 자그마한 공연장에서 악기의 음색도 충분히 느끼고 호흡할 수 있는 그래서 관중들 자신이 마치 공연하다는 착각이 드는 듯한 공연이 정말 성공한 연주회인 것이다. 신디사이저와의 만남은 마이크를 사용하는 두 번째 이유다. 전기로 인한 음향의 거대함에 우리악기의 섬세함이 고개 숙여버리는 불상사가 생기고 기타와 신디사이저가 음과 음사이의 공백을 메꿔 나가면서 주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검도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어울림의 우리악기 구성은 가야금, 대금, 해금등 고음악기만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것을 받쳐주는 저음의 역할을 신디사이저가 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악기중 저음악기가 적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쟁같은 경우는 저음이면서 음도 쉬지 않고 연결시킬 수 있는 연음악기이기 때문에 신디사이저가 행하고 있는 이 두가지 역할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본다. 가야금이 두 대이지만 신디사아저와 기타소리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어울림이 굳이 우리 악기만을 고집하지 안고 섞어서 사용하는 것은 좀더 대중과 친숙해지기 위한 여러 음색의 표출로 인한 것이겠지만 우리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실내악과 우리음악의 시김새를 살리는데 강점이 있다면 다시금 생각해 봐야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대의 가야금을 위한 모리중 두 대의 가여금이 조여주는 음을, 저음의 가야금이 툭 던져 풀어주는 소리는 다시 한번 저음의 역할을 상기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가야금 연주자와 대금 연주자의 기량은 부러움을 받을 만큼 뛰어난 연주였다. 연주자들의 진지함과 즐기는 듯한 연주는 관중으로 하여금 우리음악에 대한 소외의식을 회복시켜 주었고 지금까지의 국악공연이 들려주기 식이었던 반면에 청중의 중심으로 다가가려는 동참의 공연으로 이끌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실내악을 좀처럼 대하기 힘든 전주에서 어울림의 공연은 국악의 대중화란 명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안겨주는 것이었다. 다만 한 작곡자의 곡으로만 일관되지 말고 좀더 폭넓은 만남으로 여러 방향을 제시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어울림이 문화의 수용자 입장에 서서 우리 것을 상실한 뿌리 없는 대중화에 대항하여 우리다움을 잃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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