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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 | [문화저널]
우리 삶과 놀이가 곧 예술이다 유영대교수의 「민속의시대, 풍속과 음악의 역사」
문화저널(2004-02-05 12:09:04)
판소리라는 음악적 장르를 포괄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판소리 주변에 있는 것들, 판소리라는 것이 어느 시대의 어떤 예술이었는가, 또 다른 예술과는 어떻게 겹쳐지고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예술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식적인 어떤 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기본적으로 상식이라고 얘기하는 것들에 대해서 반대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지요. 시대가 마땅히 이러이러 해야 된다라는, 윤리가 강조되는 사회일수록 반대의 가능성은 혹시 없는가 라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것, 말하자면 그러한 것들이 일정하게 틀을 갖추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예술행위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보았던 『필라델피아』라는 영화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를 소재로 하여 예술행위에 대한 중요한 함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흑인변호사의 성격변화는 무척 재미 있습니다. 흑인변호사는 처음에는 에이즈나 동성연애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 꺼림칙함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 여기서 소설이나 작품들에 등장하는 이른바 성격이 변화가 감동적으로 나타납니다. 변화는 뜻밖에도 게이 파티에 이 흑인변호사가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 됩니다. 그는 그 파티에 가서 처음엔 무척 지겨워 합니다. 도대체 이 파티라는 것이 자기네들은 좋다고 하는데 이친구에게는 이게 다 욕지기나는 그런 분휘기를 갖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일을 앞세웁니다. 물론 저 사람은 곧 죽을 사람이니까라는 동정에서 그 자리에 가긴 했지만 그에게 당장 급한 것은 내일의 재판에서 입을 맞추는 콘티를 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들러서 집으로 가서 그얘기를 하자고 조르고 파티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주인공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집에 가서도 내일할 질문을 하는데 주인공(톰행크스)은 질문에 대해선ㄴ 답변 하지 않고 지금 자기가 느끼는 여러 가지 정서들, 특히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지금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며 또 자기가 갖고 있는 취향이나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때 글려오는 것이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오페라 아리아입니다. 그 아리아가 너무 아름답고 섬세하면서 슬픈 정서를 가지고 있는데서 주인공은 완전히 동화되어 버립니다. 이 흑인변호사는 그 정경을 보면서 갑자기 주인공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물론 상당히 암시적으로 처리를 했습니다만 동정의 마음보다는 조금 더 나가서 사랑하는 마음 같은게 잠깐 생기죠. 그래서 그냥 노래도 미처 끝나기 전에 자기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서 그 집을 뛰쳐 나옵니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자고 있는 자기 아내 옆에서 한숨을 쉬고 동성연애에 대한 자기의 생각이 일종의 편견 같은 게 아니었는가 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 영화는 예술해위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회적으로, 통념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적으로 옳다' 라는 그 상식의 정면에서부터 문제를 삼아가는 것. 그것이 제도가 되었든 간에 관습이 되었든 그런것들이 갖고 있는 폭력적인 상식에 대해서 대항하다가 그냥 무참히 뒤로 물러나고 마는 비극적인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 낸다거나 하는 것들이 예술작품의 가장 근원이 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작품이 지닌근원에는 그같은 부정의 정신이 이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후기는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아주 대단한 질곡의 회였습니다. 특히 양반의 신분을 갖지 않고 태어난 일반 사람들에게는 거의 지옥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 그냥 이게 나한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신분의 상황이려니 하고 생각하면서 그길을 묵묵히 가는 것, 자기보다 춸씬 나이 어린 양반이 나이 많은 민중들에게 " 어이, 고기 한칼 주게"라고해도 "예, 나으리" 하고 굽신거릴 수밖에 없는 것, 말하자면 이것은 당당하게 '이것은 내팔자니까'. '어쩔수 없는 것이니까' 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식으로 사는 것은 그냥 편하게 사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의문을 갖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사실은 예술활동의 출발이라고 할 수 도 있겠습니다. 그런 제도를 제대로 개선하는데는 혁명적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통사회가 갖고 있는 대단히 폐쇄적인 구조의 틀 속에서 혁명은 그렇게 간간한 상황이 아닙니다. 혁명을 일으키고 그 정황에 까지 이르게 하기 위해서 생각을 더 고양시키고 의식화해 하가는 방법의 하나로 이루어진 기법 같은 것들이 예컨대 예술행위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예술행위라는 것은 근원적인 예술행위이기도 하지만 흔히 민중예술이라고 얘기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흔히 민속학이란 학문을 FOLK LOVE 라고 합니다. 민속학이라고 저는 얘기 합니다만 사실은 글자 그래도 얘기 한다면 FOLK 라는 것은 '民' LOVE라는 것은 '學'을 말하니까 '민학' 이라고 쓸 수 있고 요즘에는 이런 용어도 빈번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속(俗)'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그야말로 상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진보적이고 뭔가 현실 에 대해서 그것을 문제적으로 인식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예술행위라는 점에서 민학이라는, 또는 민의 예술이라는 그런 용어가 나름대로 그럴듯하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컨데 요즈음의 국민이라는 개념보다는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그리고 개인이 아닌 집단이라는 개념으로,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이란 개념으로 그리고 글자를 향유하지 못한 무식층의 사람들이 다'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문맹률은 거의 10%도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문맹률이 80-90%이상이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역사의 저 밑바닥에서 역사를 이끌어 오고 문학과 예술행위를 향유해 왔던 그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했던 예술행위가 바로 설화, 민요, 판소리, 굿, 민속극, 속담, 수수께끼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의미를 축소해서 속담이나 수수께끼, 방언, 은어, 땅이름 이런 것들다 예술의 영역이라고 포함시키기엔 좀 그렇습니다만 어떻든 이처럼 다채롭게 여러 부분에서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들을 작품으로 만들어 냈었습니다. 설화 가운데 '떡보와 사신' 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아주 무식한 그야말로 떡만 좋아해서 결국은 떡장사가 된 '떡보' 와 중국에서 온 아주 거만한 사신이 주인공입니다. 조정을 까보며 거들먹거리던 이 사신이 어느날 시장에서 나와서 떡보하고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떡보가 떡을 짊어지고 가는데 이 사신이 어디 저 친구는 실력이 어느 정도 되나하고 시험을 해보자하며 말로는 안통하니까 수화로 했지요. 사신이 먼저 하늘에 가르켰습니다. 그랬더니 떡보가 땅을 가리켰죠. 그래서 이번엔 손가락을 세 개를 들어 보였더니 떡보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보입니다. 사신의 입장에서 이 질문의 뜻을 풀어본다면 너 하늘의 도리가 뭔줄 아느냐라고 했더니 떡보의 대답은 나는 당의 도리도 알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었죠. 세상의 원리는 삼강이다라고 했더니 이봐라 오륜도 있다라고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의 원리를 네가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하나만 가르쳐 달라라는 뜻으로 주먹을 쥐어 보였더니 이 떡보는 좋다고 대답했지요. 하지만 떡보의 속내는 좀 다릅니다. 떡보는 떡값이 올랐느냐? 아니 떡값은내렸다. 그럼 하나에 삼십원이냐? 아니 오십원이다. 십원만 깎아달라. 좋다 이런식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떡보는 떡보대로 그랬지만 사신은 사신대로 놀랬죠. '야, 이거 내가 조정에 와서 사람들을 대수롭지 않다고 깔봤는데 시장에 돌아 다니는 사람마저 저런 실력가라면 이거 만만하게 볼게 아니다' 라고 행동을 바꾸었다는 이야기죠. 여기엔 아주 은근한 야유와 풍자가 들어 있습니다. 설화는 그런 것들입니다. 민요는 흔히 있는, 일반사람들이 일하면서 현장에서의 고달픔이나 애환을 이겨내기 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자기가 어떤일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리듬이라든지 율격이라든지 이런것들이 저절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발을 맞춰서 해야 될 일이라면 박자가 아주 딱딱 들어 맞아야 됩니다. 모심기 같은 노래들은 기가 막히게 맞아야 됩니다. 그러나 자가가 혼자 물레질을 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한없이 늘어질 수 옫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한테 있는 심사나 정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민요는 살아가면서 구체적으로 느꼈던 일들을 별다른 수시ㄹㄱ없이 가지긩 정황을 설명해주는 노래로 발전해 왔습니다. 판소리 역시 지금에 와서 무척 세련되었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세련됐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대를 거쳐오면서 전문적인 창자가 아주 오랜 수련을 거쳐서 불렀던 것이죠. 이 전문적인 창자들은 자기 예술을 직접 팔아야 되기 때문에, 말하자면 청중들이 자기 소리를 듣고 좋아해서 자기 한테 돈을 던져 줘야만 비로소 살수 있기 때문에 청중의 취향에 훨씬 더 영합하고 또 청중의 기호를 민감하게 고려해야만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 청중의 수준에 따라서 내용도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물론 판소리 창자만이 아니고 전통사회에서는 전문적인 이야기 장수들도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 장수는 이야기를 아주 그럴듯하게 하는 사람이지요. 그들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만 가면 이야기책을 펴놓고 읽습니다. 『숙영낭자전』을 읽기도 하고 『춘향전』을 일기도 하는데 낭랑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격정적이고 재미있는 대목에 가면 책읽는 걸 멈춥니다. 그때 다음대목을 듣고 싶으면 청중들은 동전을 던집니다. 동전을 받은 다음에 이야기 장수는 그 대목을 읽습니다. 전문적인 이야기꾼들도 사람들이 많은 서울쪽에서는 일정한 구역이 있지만 지방으로도 돌아다닙니다.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지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마을에 들어가서 자기가 이야기 장수라는 것을 밝히면 그 동네에서는 그래도 제일 잘 산다는 집에서 초대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선 저녁을 든든하게 먹고 사람들에세 다 기별을 한 다음 그 집에서 얘기를 듣게 합니다. 그리면 그 이야기꾼은 『장화홍련전』을 풀어놓습니다. 한참 얘기를 하다가 계모의 포악이 극도로 달하는 장면에서 잠깐 눈치를 보니 안방마님 안색이 영 좋지를 않고 뭔가 뒤가 마려운 듯한 표정을 지으면 이야기 장수가 금방 눈치를 챕니다. '아, 저 여자가 계모로구나' 그러면 그 다음부터 지금까지의 서사적인 맥락이 완전히 무시되고 갑자기 이 계모가 개과천선하는 훌륭한 여자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뒤죽박죽이 되지만 마님 얼굴은 환하게 피어나고 다음날 부터는 밥상이 달라집니다. 결국 작품은 청중의 취향과 맞게 갈 수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왜 좋아하는거라는 것들을 잘 생각하면서 작품들을 세련시켜왔는데 그런 것들이 대표적인 것이 판소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굿을 보겠습니다. 굿도 역시 종합예술형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굿은 철저하게 내림입니다. 측히 전라도 쪽에서는 완벽하게 굿하는 방식을 익히는데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장고소리를 들으면서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계속해 가는 겁니다. 굿이야말로 전통사회에서 가장 완벽하게 우리 음악, 우리 예술을 구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민속극이 있습니다. 민속극은 탈춤입니다. 탈춤 역시 아주 건강한 삶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반영하고 있고 특히 거기에는 양반과 상놈과의 대립 같은 것들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표현됩니다. 흔히 말뚝이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하인, 편임 계층과 양반 삼형제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말뚝이는 상놈이며 마부이고 양반집의 심부름꾼 시종인데 그 말뚝이가 쓰고 있는 탈은 아주 커다란 것입니다. 3명의 양반얼굴을 보면 큰 양반샌님, 가운데 양반 서방님, 그 다음에 결혼도 안한 도련님, 이렇게 세 사람이 있는데 세사람 표정들이 다 재미있습니다. 샌님은 언챙이고, 서방님은 코도 비뚤어져 있으며, 도련님은 아주 못났고 얼굴 전체가 비뚤어져있습니다. 말하자면 비뚤어지고 일그러진 그런 것들이 양반의 전형이라고 묘사되어서 둘이 서로 대립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컨데, " 야, 이놈아" 하고 말뚝이를 부르면 말뚝이가 "아이, 샌님. 나도 이름 석자가 번연히 있는데 왜 이름을 안불러 주고 그렇게 이놈아 하십니까?" 그러면 " 그래 네 이름이 뭐냐?" " 네 아자범잡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자 범자라면 뭐죠? ' 아범' 그러면 아버지를 부르게 되는 거니까 "아자 범자야" 라고 부르니까 " 아이, 아자 범자가 뭡니까?" 라고 하자 "아-" 하고 소리만 질러댑니다. 그러니까 말뚝이가 "누가 잘못 깨물었냐요? 제대로 불러보쇼. "합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아범'하고 부르니까 그앞에 가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면서" 그래. 그동안 밥 잘먹고 계집차고 잘 놀았냐?"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양반들이 화가 나서 " 야 이놈아 뭐가 어째? "라고 하니까 또 물러나고 이렇게 양반에 대한 상당히 시랄한 풍자나 비판의 정서를 탈춤은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민중들이 스스로가 살아가면서 갈등했던 것, 또 마음속에 부대꼈던 것, 즉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한 것들이 이렇듯 다채로운 민중의 예술로 자리잡았고 판소리 역시 바로 그와 같은 예술의 일환으로 성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춘향전은 아주 재미난 문제를 제기 합니다. 겉보기엔 연애 얘기 입니다만 실제는 조선후기의 가장 첨예한 문제인 신분 문제를 반영합니다. 따라서 다른 신분간의 사랑얘기야야말로 조선의 체제 자체를 무너뜨릴 만한 위력이 가진 내용이었습니다. 춘향전은 나중에 성격이 변해가고 춘향이가 기생이 아닌 양반집의 서녀로 묘사되는데 이런 것들은 다 그런 식의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바뀌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렇게 다채로운 장르들을 우리는 흔히 서사나 서정, 또는 극장르로 이렇게 나누는데 문제는 판소리에 바로 이같은 서사적인 성격과 서정적인 성격도 있고 극의 성격도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서사장르란 이야기를 말합니다. 설화는 그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판소리에는 이처럼 처음과 끝이 분명하고 진행되는 이야기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서정장르입니다. 서정장르는 서사장르와는 달리 '작중화자.서정자자'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쉽게'시'를 생각하면 됩니다. 시는 시의 주인공이 자기의 목소리로 상대방한테 노래를 하는 것이지요. 춘향전에 나오는 지조나, 한용운의 「님의침묵」이나 황지우의 시나 이야기의 줄거리가 있는게 아니고 자기가 갖고 있는 아주 애절하고 처연한 심사 같은 것들을 직접 토로하는 '내'가 되는 겁니다. '쑥대머리'는 서정시로서 아주 아름답고 잘된 서정시입니다. 우리가 유행가를 좋아하는 것도 거기에서 말하는 정서하고 나하고 딱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듯 자기의 감정과 그 시에서 노래하는 주인공 작중화자가 완전히 일치되고 동일시 되는, 바로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하는 장르가 바로 서정장르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판소리는 요소 요소에 이런 부분들이 많습니다. 한편으로 판소리는 극이기도 합니다. 한사람의 창자가 내내 부르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두 사람이 하는 것처럼 하는지 완전히 연극적인 특성까지 그대로 갖추고 있습니다. 판소리는 이렇듯 이 세가지의 특성을 고루 갖추고 있는 재미난, 그러면서도 탐구할 부분이 많이 있는 형태입니다.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를 봅시다. 개인적 차원의 글쓰는 행위가 대중적인 문학으로 바뀌는 데는 사회라는 매개항을 필요로 합니다. 판소리가 작품으로 서고 청중들이 그 분위기에 푹 빠져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은 사회라는 매개항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청중들이 박수치지 않으면 예술은 그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술작품은 누구든지 창작하고 누구든지 향유할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굿판이 벌어지면 동네 애들도 맘대로 와서 듣습니다. 봉산탈춤을 예를 들어봅시다. 상인들이 돈을 내서 초청을 하면 사람들이 와서 구경을 하고 그 사람들에게 상인들이 물건을 파는 그런 양상을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드디어 본격적으로 예술작품이 시장에 내놓은 상품으로 되는 것이지요. 원래 전통사회에서 예술가를 지원하는 사람들은 대개 양반, 귀족계층 이었는데 이들을 파트론이라고 합니다. 파트론이 예술가 어릿광대를 보호하고 지원해 주는 대가로 이 광대는 자신의 예술적으로 파트론을 위해서 봉사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파트론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면서부터 예술은 자유롭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자기에게 돈을 대주는 한사람의 취향에만 맞추다가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호를 맞추게 되면서 일관성이 부족한 경우도 생기고 내용의 변화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판소리는 그런 예술의 방식을 역행하는 흐름을 보여줍니다. 그게 뭐냐면 처음에는 민중들 틈사이에서 마음껏 자기 기량을 노래하다가 나중에 양반들이 판소리를 좋아하게 되면서 양반들의 취향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판소리의 노랫말들이 굉장히 까다롭게 발전했습니다. 주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로운 것은 바로 판소리가 양반의 취향에 맞추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굿음악은 이와는 다른 발전 경로를 밝아왔습니다. 굿음악이 자기고 있는 거칠면서도 텁텁한 그러면서도 슬픔이나 기쁨이나 직접 토로하는 이런 정서를 양반들은 속되다고 비판합니다. 노랫말도, 음악도 마찬가지로 바뀌어 갔습니다. 이런 것들이 판소리가 정당하게 발전하지 않고 좀 왜곡되었다고 제가 이야기하는 것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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