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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 | [사람과사람]
우리시대를 위한 음악적 출발에 대한 기대 작곡가 유장영
이복남 KBS전주방송국 스크립터 (2004-02-05 12:15:47)
대학가요제에 나가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던 사촌오빠와 청소년기를 같이 보낸 적이 있다. 내 청소년기의 우상이었던 그 사촌오빠는 '소망'이라는 노래를 교과서 삼아 연습을 하고 했었는데, 그 노래의 주인공이 유장영이라는 것을 나는 뒤 늦게야 알았다. 92년 겨울, 눈이 많이 와서 도로가 꽁꽁얼어붙었던 성탄전야에 나는 창작극회의 뮤지컬 『레미제라블』 마지막 공연을 보았었다. 노래, 춤 그리고 행복한 결말이 제법 따뜻한 연말 분위기를 연출했던 그 뮤지컬에서 나는 또 한번 유장영을 만났다. 이번엔 창작극회의 음악감독이란 이름으로. 세 번째 만남은 우연히도 국악무대에서 이뤄졌다. 창무극 『시집가는 날』의 작곡자로 서였는데 내가 이렇게 띄엄띄엄 읽었던 유장영의 음악경력이 바로 그의 음악변화를 한눈에 읽은 것이란 걸 훗날에야 알 수 있었다. 유장영이 대중음악에서 출발해 연극과 국악무대에서까지 그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고 있는 전천후 음악인이었기 때문이다. 유장영은 현재 전라북도 도립국악원의 수석 연구원이며 창작극회의 음악감독이다. 서영음악과 대중음악 거기다 판소리 미학까지 두루 공부한 보기드문 예술인인 셈이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토대로 그는 국악과 연극무대에서 성실히 자신의 음악세계를 쌓아왔고, 지난 4년동안은 수십편의 연극음악을 통해 전북 연국계에 작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예술이라는 나무가 하나의 몸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고, 미술·연구·역사·음악등 다양한 가지와 뿌리를 갖고 뻗어 가는 나무라고 볼 때, 유장영을 보면 뿌리깊고 튼튼한 나무로 자라기 위한 토대를 잘 갖춰가고 있는 예술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극계에서는 그를 '드라마를 아는 작곡가'라고 얘기한다. 연극적 감각과 음악적 재능을 다 갖춘 음악인이라는 말이다. 그럼 국악계에서는 어떤가, 국악계에서의 유장영은 그저 신통한 젊은이로 통한다. 법학을 전공한 샌님이, 그것도 국악에 대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한 적도 없는 사람이, 한번 듣기 만하면 우리가락을 척척 악보로 적어내고, 노래 소리에 악기 다루는 솜씨까지 쓸만한 것 보면 분명 물건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유장영의 재능과 관심은 지금까지 이렇게 연극과 국악 두분야에 걸쳐 있었다. 그러나 그가 추구해온 것은 하나다. 음악 바로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통음악인 것이다. 새로운 전통음악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유장영은 많은 예술분야에 관심을 쏟아왔다. 연극음악을 시작한 것 역시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술전반에 대한 다양한 관심은 어렸을 때부터 습관적으로 있어온 것이라고 한다.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유장영은 어린 시절을 완도에서 보냈다. 늘 유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엄격한 집안에서 그는 음악, 미술, 문학등 다양한 예술 분야를 접하면서 자랐고, 그런 만큼 재능도 보였다. 학예회 무대에서는 언제나 남자주인공역을 따냈고 음악부와 미술반을 오가며 부지런히 기초수업을 쌓았다. 욕심이 많았던 만큼 배우고 익히는 것도 빨랐고, 당연히 부모임이 거는 기대 또한 컸다. 유장영은 이런 기초 재능을 토대로 고등학교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다. 생일선물로 받은 만돌린을 켜면서 고향노래를 만들어 불렀고, 목소리가 좋았던 터라 성악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진학을 앞두고 그는 성악가의 길을 포기해야 했다. 똑똑하고 재주 많은 아들이 성악가보다 판검가사 되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시대 모든 아버지의 바람이었으므로. 그러나 전북대 법대에 입학한 유장영은 학과 공부보다 합창단, 그림동아리'아름'등을 기웃거리며 과외 활동에 더 신경을 쓴다. 대학가요제에서 '소망'이란 노래로 동상을 받은 것도 이즘이고, '노모스'라는 통기타 동아리를 만든 것 역시 이 무렵이었다. 공부는 뒷전이었고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음악성을 인정받으면서 한때 레코드 취입을 하고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홍보한번 제대로 못해 본채 그의 첫 번째 음반은 실패하고 만다. 그후의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수난기였다. 밤무대에서 노래도 했고 생계를 위해서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음악에 대한 갈증은 더해갔다. 그러면서도 유장영은 자신을 채우는 일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림공부도 계속했고 「황토」단원으로 연극무대에 서기도 했다. 훗날을 위한 투자였던 것이다. 연극『물보라』는 유장영의 첫 번째 연극무대였다. 그는 소리꾼역을 맡으면서 명창 조소녀씨에게 처음으로 판소리를 공부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우리소리에 빠져든 것은 그 이후였다. 음악에 대한 탈출구가 필요했고 생활의 통로도 필요했던 무렵, 그는 갑자기 우리소리가 미칠 듯이 좋아져서 절로 들어간다. 굳이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우리음악을 알고 지켜야한다는 신문사설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때부터 그는 우리소리를 공부하며, 우리 가락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전통음악을 꿈꾸기 시작한다. 음악적 관심이 국악으로 옮겨간 것이다. 가정도 잊고, 세상도 잊어버리고 두달동안 절에서 판소리 공부에 매달리고 있을 때 전라북도 도립국악원에서 창극단원을 뽑는다는 소문을 들렸다. 물론 응시했고, 당당히 뽑혔다. 88년에 그렇게 해서 그는 도립국악원의 창극단원이 됐다. 유장영이 창극단원에서 지금의 연구원자리로 옮겨 앉은 것은 그의 특별한 채보능력 때문이었다. 입으로만 전해지는 우리가락들을 듣고 악보로 적어내는 재주가 특별했던 것이다. 국악채보는 특히 객관적인 음감각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유장영은 이런 객관적인 감각외에도 소리를 집어내는 주관적인 판단이 뛰어났다. 소리를 듣고 음을 골라내는 감각이 채보작업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의 채보능력은 작곡으로까지 이어졌다. 도립국악원의 창무극 『시집가는 날』의 음악을 작곡했고, 창무극『충햔전』에서는 채보와 『이별가』작곡을 그가 맡았다. 작년 전라예술제때는 국악신내악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악작곡가 유장영으로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요즘도 비디오와 녹음기를 들고 유람하듯 채보작업을 나선다. 언제부턴가는 방언 사투리까지 열심히 모으고 있다. 우리 것, 소중한 것은 하나라도 그냥 버려두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다. 국악계에 터를 잡은 유장영이 연극과 다시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경이다. 도립국악원에 있으면서 국풍가요제등을 통해 국악가요를 선보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창작극회 연출자 곽병창이 그를 찾아왔다. 곽병창과의 만남으로 다시 연극과 재회하게된 그는 91년 연극『방디기뎐』을 처음으로 소위 연극음악이라는 것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그는 곽병창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다시 연극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란다. 그만큼 마음이 잘 맞았고 연극작업도 활기를 띠어갔다. 『방디기뎐』을 시작으로 그는 지금까지 4년동안 약 20여편의 연극음악을 작곡했다. 『레미제라블』, 『싸우지맙시다』같은 뮤지컬 공연부터 『꼭두 꼭두』같은 꼭두극 음악까지 그는 매무대 마다, 우리의 전통음악어법을 대입해 새롭고 창조적인 연극음악들을 발표한다. 마라사든, 애니깽, 풍금소리등등 90년대 전북 연극무대에 올려진 작품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쳐갔을 정도다.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시립극단과 도립예술단 작품도 맡아했고 『싸우지맙시다』는 음악은 물론 연출까지 직접했다. 이런 과정에서 연극인과 음악인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것도 바로 그다. 그는 거의 기적적으로 많은 양의 연극음악들을 만들어냈다. 재능만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노력과 집중 그리고 성실함이 덧붙여진 결과였다. 유장영이 연극음악을 맡게 되면서, 배우는 연극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고, 연출가는 자기 작품만을 위한 연극음악을 갖게 됐다. 이것은 전북연극계의 새로운 변화기도 했다. 이전의 연극음악이라는 것은 대부분 기존의 음악을 적당히 삽입해서 쓰는 정도였다. 즉, 분위기 맞는 음악을 찾아서 적절한 부분에 골라 쓰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장영이 연극계에 뛰어들면서, 도내 연극음악이 달라져 갔다. 바로 그 연극, 그 장면만을 위한 음악이 만들어졌고, 연극자체로 생동감과 질감이 더해갔다. 연극이 완성도에까지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순수 창작 뮤지컬 『레미제라블』과「싸우지맙시다」가 공연될 수 있었던 것도 유장영이라는 음악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장영이 연극계를 도왔듯 연극 역시 유장영의 음악에 새 출구를 주었다. 살아있는 예술 현장인 연극무대를 통해 그는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극무대가 그의 음악발표무대가 돼준 셈이다. 작곡료 한번 제대로 챙겨줄 수 없는 우리 연극계에서 유장영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연극계에서 그에게 공로상을 준 것도 이런 고마움의 표현일 것이다. 도내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곡가들이 하나둘 연극판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유장영의 영향일지 모른다. 『싸우지맙시다』 이후 유장영은 근 1년정도 연극계에서 떠나있다. 그동안 그는 국악계에 더 깊이 뿌리박고 일하고 연구했다. 최근에는 향토사 전국협의회에서 펴낸 『한국의농악-호남편』을 기술했고 앞으로 무당소리와 상여소리 그리고 민요에 관한 연구도 계속 할거라 한다. 이제는 연구원으로서의 자리를 좀더 단단히 다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유장영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전통음악 창작'이 바로 자신의 몫이라고 못박는다. 유장영이 꿈꾸는 새로운 전통음악이란 어떤 특정 쟝르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락이 실린, 모든 사람에게 정당하게 인정 받을 수 있는 우리시대의 음악을 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연극무대를 통해 끊임없이 시도했던 많은 음악들, 여기저기에서 보여준 그 다재다능함 역시 이런 새로운 전통음악을 향한 작은 걸음이었다. 예술은 항상 새로운 것이고 시대마다 정신은 있다. 그리고 예술가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표현해 내야 할 것이다. 베토벤·바하가 아닌 그렇다고 김건모나 성주풀이도 아닌 우리 시대만의 새로운 전통음악은 분명 필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것 이여야 하고 우리시대의 정신을 담은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전통음악, 바로 우리시대를 위한 이 음악적 출발을 유장영에게서 기대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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