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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 | [문화와사람]
판소리의 예술적 광채 덧보탠 고수 명고수 김동준
최동현 군산대교수·판소리 연구가 (2004-02-05 13:37:58)
앞에서 언급한 김동준의 음악수업 과정을 보면, 그가 뛰어난 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북을 배웠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는다. 배워서 된 것이 아니라면, 스스로 터득했다고 밖에 볼수 없을 것이다. 물론 스스로 터득했다고는 해도, 그저 진공상태에서 터득한 게 아니고, 판소리와 북가락의 살아있는 전통 속에서 터득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언어를 습득하게 되는 상황과 흡사하다. 우리는 언어를 배워서 익히게 되지만, 특별히 어떤 선생으로부터 의도된 교육을 통해서 배우지는 않는다. 다만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 속에서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김동준이 북가락을 스스로 터득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우와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김동준이 북가락을 터득하는 데 중요했던 시기는 장판개에게 소리를 배우던 때, 전주 시적 그리고 김여수와 활동하던 시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잔판개는 송만갑의 수행 고수로 활동하다가 명창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김동중의 북가락 형성에 어떻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전주 시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랑은, 명고수 박창을과의 접촉이다. 박창을은 근대 5명창의 한사람인 전도성(임실 출신이며, 태인에서 살았음)의 수행고수였던 전계문의 수제자로, 한때 전주의 전동국악원에서 김동준과 함께 머물며 북가락을 가르쳤던 사람이다. 전계문이나 박창을은 판소리사에 잘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지만, 전라도 북부 지역의 북가락의 전통을 대표하는 뛰어난 고수였다. 그러므로 김동준이 박창을과 함께 같은 국악원에 있었던 척은, 김동준에게는 뛰어난 북가락의 전통과 접촉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김연수와 함께 활동하던 우리국악단 시절은 실제적 기량을 익힌 시기로 보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김동준의 북가락은 세련을 더해갔고, 마침내 국립창극단의 전속 고수가 됨으로써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동준의 북가락이 이러한 전통과 환경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는 없다. 그러한 환경 속에 있다고 해서 누구나 명고수가 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동준이 명고수가 되기까지에는 고수로서의 탁월한 재능과 노력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보고 듣고 익힌 것들뿐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적 변이현들이 덧보태짐으로써. 비로소 명고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김동준이 구사하는 화려한 북가락을 보면, 그가 얼마나 창조적인 고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김동준을 누구보다도 뛰어난 고수로 치는 진정한 이유도 바로 그가 창조적인 고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명고수 박창을의 대표적인 제자이며, 한국국악협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었던 명고수 송영주씨는, 고수의 구비 요건으로 채집(자세), 가락 후임새를 든 바 있다. 김동준의 고법과 관련하여 이러한 요건을 검토해 보면. 그는 특히 가락과 추임새에서 뛰어난 고수라고 할 수 있다. 가락이란 소리의 흐름에 맞게 다양하게 구사하는 북가락의 변이형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가락이 화려하고 다양하면, 변화무쌍한 소리에 맞게 이를 구사함으로써, 소리와 북가락이 상승적, 상호보완적 관계를 맥제 함으로써 판소리에 예술적 광채를 덧보탤 수가 있다. 김동준은 바로 이런면에서 우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추임새는 고수나 청중이 발하는 '으이', '얼씨구' , '좋다'등의 감탄사를 이르는 말이다. 특히 고수의 추임새는 그 기능이 다양하여 판소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락보다 추임새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판소리 언행중의 고수의 추임새는 그것이 판소리 음악의 일부분이 도기 때문에 음색이나 어조가 소리와 잘 어울려야 하며, 창자와 청중 모두를 강하게 연결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함으로써 전채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한다. 김동준은 참으로 신명나는 추임새를 적재적소에 구사함으로써 소리판에 활력을 불어넣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완창 발표회를 했던 소리꾼들은, 김동준의 추임새 소리를 들으면 없던 힘이 절로 났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그만큼 김동준의 추임새는 소리판을 선도하는힘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세나 가락, 추임새가 제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것이 창자의 소리와 어울리지 않으면 아무소용이 없다. 소리꾼과 완전한 호흡이 일치를 이룰 수 있을 때, 소리와 북은 최산의 경지에서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소리꾼들은 항상 자신과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을 원한다. 옛 소리꾼이 수행고수를 둔 것은 바로 장기간에 걸쳐 함께 공연을 하면서 호흡을 서로 잘 맞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시각각 조건이 변하는 소리판 속에서 수많은 창자와 완전한 호흡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창자가 부르는 소리를 잘 알아야 한다. 명고수 김명환이 보성소리에 특히 뛰어난 고수로 알려졌던 것은. 그가 보성소리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동준은 특정 소리에만 뀌어난 고수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소리의 북에서 두루 재능을 발휘했다. 김동준이 이렇게 모든 소리에 북을 잘 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본래 소리꾼으로 명성을 얻은 뒤에 고수로 전환하여, 소리와 소리꾼이 요구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동준이 본래 소리꾼이었다는 점은 후에 명고수가 되는 데에고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또 예술이 어떻든 자기 인격의 표현이라는 측면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할 때, 고수 김동준의 인감됨됨이의 훌륭함을 들지 않을수 없다. 필자는 김동준의 타계하기 직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암에 걸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도 그는 재담을 잃지 않았다. 인터뷰에도 기꺼이 응해주었고 텔레비젼 찰영을 위해 북을 쳐주기를 부탁하자 두말없이 이를 승낙해 주었다. 아마 그때 친 북이 그가 친 이승에서의 마지막 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말을 구차하게 늘어놓지 않더라고, '명고수'라는 말 자체가 벌써 인격적 표현이 아니겠는가. 명고수이자 명창이었던 김동준이 이승을 떠난 지 벌써 5년이 되었다. 그가 떠나고 나자 판소리계는 큰 수멍이 뚫린 듯했다. 그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소리꾼들은 마음 놓고 공연할 수 있는 고수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김동준의 소리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최근에 김동준의 완창「적벽가」가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생전에 김동준을 아끼던 사람들은. 이제 그의 소리를 통하여 그의 또다른 예술 세계에 젖을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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