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2 | [문화칼럼]
예향, 공허한 인사치레 용어의 퇴락
이영욱 미술평론가·전주대 교수
(2004-02-05 13:45:15)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술이란 무언가 좋은 것, 혹은 무언가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하긴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 차체에 매몰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술잘품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되는 깊은 의미와 아름다움은 동경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으리라. 최근들어 우리는 외국의 유명한 미술가들의 전시나 유명 발레단 혹은 교향악단 등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서 그 관람객의 숫자가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나고 있는 것을 보곤한다. 또한 골목골목마다 피아노, 무용, 미술, 서예 학원 등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현상 역시 피부로 실감학 있다. 예술이라는 것이 일정정도의 경제력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개화할수 없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제 비로소 우리도 먹고사는 일의 긴박함에서 일정정도 벗어나 그야말로 문화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긍정적 시대로 접어드는 신호로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러한 열기라면 열기에는 무언가 미심쩍은 것이 있다. 예를들면 이런 것들이다. 혹시 무슨 무슨 음악회에 가는 우리들은 실제로는 음악을 즐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즐기는 자신을 즐기러 가는 것은 아닌지? 아파트 벽마다 걸려있는 우화들이 실제로는 주인의 교양있음을 치장하기 위한 장식에 불과할 뿐 그 주인의 감식안과는 무관한 것은 아닌지? 어린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는 어머니의 욕구는 그 아이의 풍부함 삶보다는 예술이라는 교양이 덧붙여짐으로써 더 배가될 아이의 세속적 성공과 권력에로 향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사실 오늘 날 우리들은 매우 복합적인 세계 속에서 산다. 옷 하나를 사입을 경우에도 고려하는 것은 단순히 그 옷이 얼마나 따뜻하고, 질기며. 유용하느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또한 그 옷이 자신에게 어떤 이미지를 부여하는지 예를들어 교양있게 보이는지, 자신이 가진 혹은 가지지 못한 부를 드러낼 수 있는지 아니면 성적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지 등등을 고려한다. 하긴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만이 독야청청 순수하게 이해되고 향수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예술이 바로 이렇듯 순수하고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다름아닌 예술과의 순수하지 못한 만남을 부추기는 주범이라는데 있다. 물론 예술에는 이러한 가치와 순수함이 있다. 하지만 모든 예술이 그런 것은 아니며, 또 흔히 추측하곤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순수하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순수함과 높은 가치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결과이다. 하지만 적지않은 작품들은 이 순수함과 가치를 하나의 결과로서 경험케 해주려 하기 보다는 바로 이 순수함과 가치 자체를 목표로 한다. 그리하여 일종의 유사품 - '순수하기 보다는 순수하게 보이는' 혹은 '가치있다기 보다는 있어 보이는' - 들이 만연하게 된다. 그저 '고급스러운' 작품들, 그리하여 그저 '심오한' 작품들, 그저 '풍경스러운'작품들, 그리하여 그저 '예술적인' 작품들 등등을 우리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과 이러한 작품들을 기대하는 관객들, 이들은 서로 순환고리가 되어 삶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우리들을 풍부하게 해야할 예술의 생동하는 영향력을 마비시키고 우리들을 상투적인 삶의 틀 속에 가두어 버리는 작용을 하게 된다. 게다가 문제는 이러한 부정적 작용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넓고 깊숙이 우리들의 예술과의 만남의 방식을 지배하고 있으며, 또 온갖 문화의 제도에 틈틈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모모한 예술'회관'이나 혹은 예술의 '전당' 같은 곳을 한번 떠올려 보자. 고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기둥과 높은 계단. 화려한 샹들이에. 그리고 길게 늘어뜨려진 커텐들에 둘러싸인 그곳은 우리들을 자연스럽게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는다. 그 곳은 실상 대다수의 서민들이 자신의 삶에 근거를 두고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을 향수할 수 있게 하는 장소라기 보다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화려하고 교양있는 삶을 몇시간 동안 경험케 하는 장소일 뿐이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저 순수하고 가치있어 보이는 작품들을 접하고는 해갈되지 않는 갈증만 느낀 채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오곤 한다. 물론 회관이나 전당에서의 예술체험이 전적으로 이런 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회관이나 전당이 바로 이러한 식의 체험을 부추기는 원리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하드웨어만 갖추었을 뿐 황량한 정도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느다는 것 등은 우리들 모두 익히 경험하고 있는 바이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문제점은 '전당'이나 '회관과 같은 제도 뿐아니라 신문이나 잡지, TV등의 예술관련 보도나 작가소개, 상투적인 비평문이나 교육제도 등 관련 모든 분야에서 정도의 차이만 있지 마찬가지로 반복되고 있다. 실상 문화는 그리고 예술은 결코 문슨 제삿상의 떡이나 보물처럼 떠받들여져야 할 무엇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들 옆에 우리들과 함께 머무르는 무엇이어야 하며 그리하여 서로를 풍부함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문화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바탕 위에서만 즉 사람대접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만 풍요로운 성과를 낳을 수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작가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인이 자동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보장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너무도 비문화적이다. 문화는 결코 올림픽 식의 경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들 전주를 '예향'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말이 지금 얼마나 생활에서 확인되는 자부심에 근거를 두고 쓰여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제는 거의 공허한 인사치레의 용어로 퇴락한 것은 아닌지? 이제 곧 지방자치제가 시작된다. 지방자치 시대의 문화예술이 또 다시 중앙의 표준에 따라 찍어내는 제삿상의 떡과 같은 것이 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예향'이 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진정 시민들의 삶에서 확인된 자부심으로 표명되는 용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