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2 | [교사일기]
보물찾기를 제대로 못한 아쉬움
진동규 시인.신흥중 교사
(2004-02-05 13:49:06)
'일어서는 돌' 그 뒷이야기를 해보라는 주문인데 어찌보면 좀 열적은 일임에 틀림없다. 소풍갔다온 아이처럼 재잘재잘 하라는 것인데도 대답하고 말았다. 소풍의 보물찾기를 제대로 못한 아쉬움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 아쉬움 같은 것들이 고리처럼 끈끈하게 내안에 파문하고 있는 것이리라.
문협지 '문맥'3호의 교정을 보는데서부터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원광대학교 양은용 교수의 특집원고를 보고 있었는데 내심 조금은 떠름한 기분이었다.
양은용 교수의 논문이 짜증스러웠던 것은 그렇다. 먼저 주문한 제목이 아니었고, 그리고 본인이 쓴 글이 아닌 일본 사람 목전 누구인가 하는 이의 번역물이었던 것이었다. 그러고도 논문의 반절, 아니 거의 사분의 삼까지 읽어 가도록 이글의 배경 설명이 지루하게 나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찌어찌 저찌저찌 자료조사부터 일천여년의 세월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나는 뜻밖에도 억누를 수 없는 감동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먼저 눈을 번쩍 뜨이게 했던 것은 "백제 무왕이 지모밀이라는 땅으로 도읍을 옮기고" 라는 대목이었다. 또 바로 뒤따라 나오는 "제석정사에 화재가..." 라는 글귀는 실로 내가슴을 방망이질 하는데 충분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글자들이었다. 짤막한 내용의 '제석사'영험기의 한글역이다.
"백제 무왕이 지모밀이라는 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새로 절을 지었다. 정관 13년 기해(639) 11월에 큰 비가 오고 뇌성이 치더니 드디어는 제석정사에 화재가 났다. 불당과 7급부도(불탑)내지 회랑과 방이 전부 타버렸다. 그런데 탑아래 초석 가운데에는 갖가지 칠보와 불사리와 수정병이 있었다. 또 구리판을 만들어 금강반야경을 새겼는데 목칠함에 들어 있었다. 초속을 열어보니 모두 타 없어졌는데 오직 불사리병과 반야경과 칠함만이 그대로였다. 수정병을 살펴보니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사리가 하나도 없었다. 병을 대왕에게 가지고 가니 대왕이 법사를 청하여 곧 참회하고 병을 열어 들여다보니 불사리 6과가 병안에 영롱하게 들어 있었다. 밖에서 보아도 6과가 완연히 보였다. 대왕과 모든 궁인들은 신심을 더욱 돈독히 하여 곧 공양을 올리고 절을 다시 지어 이를 안치 하였다."
내 장편 시극 '일어서는 돌'이 책으로 인쇄 된것은 한달 전이지만 실은 한해 전 월간문학 8월호에 전재 되었던 것이었다. 탈고한 것은 그보다 또 한해 전이니까 이년전의 일이었다.
백제 무왕의 마지막 천도와 의자왕의 멸망, 그리고 풍왕의 부흥운동과 운주사 천불천탑의 건립을 극화시킨 내용이다. 이글에서 내가 가장 미심쩍어 했고 조금은 얼버무리기도 했던 부분이 마지막 도읍지 지모밀이라는 지명이었다. 익산 왕궁의 백제때 지명을 밝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몇 역사로 전공하는 분들을 만나보면 그냥 웃음으로 뭉개버리는 것이었다.
"마지막 도읍이 왕궁이다." "어디서 읽었느냐?" "발로 뒤졌다." 여기까지 가면 "그러는게 아닙니다." 웃어버리는 것이었다.
백제사를 어디서 뒤져낸단 말인가? 무슨무슨 주하거나 무슨 부리라는 지명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모밀은 정말이지 얼버무린 지명이었다. 진포율사가 지모밀 사람이라 했는데 거기서 빌려오기로 했다. 진포야말로 백제가 망한 백년뒤 사람인데도 스스로 백제인임을 자처하지 않았던가. 이런 궁색한 가차였던 것이다. 아 그러나 뒤에 뒤에 생각한 일이었지만 만경 진포는 마지막 백제의 아련한 그리움인 지모밀을 자기의 이름위에 붙여 지모밀 사람이라 자처했을 법도 했다.
이렇게 자신 없었던 대목이 일천여년전의 기록이 내앞에 나타나 든든히 받침해 준다는 일은 여간한 흥분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숨기고 싶은 비밀하나가 시극 출판과 때를 맞춰 기연으로 생기었다.
"미륵사 기와조각은 아니고 제석사 것이여." 미륵사터에 안달하는 내 모습이 재미 있었던지 미륵사 기와조각 하나를 주어다 준다는 친구였다.
반가움을 옹골지게도 전신으로 표하는 친구, 대포 한 잔 살테니 나오라는 것이었다. 만나자마자 가슴 안자락에서 신문 꾸러미를 꺼내 펼쳐놓는 것이었다.
연꽃 이파리가 양각되어 있는 수막세 였다. 많이 삯아 보이는 황기와 조각이었다. 어린 아이 손바닥 크기만도 못한 기와조각, 제석사 운운하는데 보도듣도 못한 이름 아닌가. 그러나 서운한 표정을 할 수는 없었다. 받아다가 내 책꽂이의 시집 칸에 얹어 두었다. 보고 또 보고 그러면 시집 한권 몫은 하겠거니 싶어 거기 두었던 것이었다.
이 작은 기와조각이 천년의 세월을 반짝이며 다가 오리라 어찌 생각인들 했겠는가. 초롱초롱 빛나는 역사의 눈동자로 나서리라고는 누구도 상상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시를 쓰고 나면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이 남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기실 새로울 것도 없다. 요즘 내가 몇가지 작은 인연으로 설레고 그러는 것도 그런 것이거니 생각한다. 그 여운이 쉬 가시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내게 문학 소년의 감상이 남아있는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