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3 | [문화저널]
세 번의 만남, 그 구원의 연인
「마리/사드」
정초왕 전북대 교수 독문과 시립극단 상임연출
(2004-02-05 14:23:25)
1979년 9월, 내 이름으로 올라간 나의 첫 연극 연출작 「보이 첵 」프로그렘에 실린 이른바 '연출의 글'을 보니 당시 나는 거기에 이런 구절을 적어 놓았다.
"어느 순간 우리는 어떤 의문도 필요치 않는 최고의 상태를 겪는다. 수없는 불면의 밤을 지새우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진실이, 아름다움이 마치 예감과도 같이 뇌리를 스쳐나갈 때 그것을 고정시키는 작업은 그러나 수 많은 패배의 잔해를 바닥에 깔고서야 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우리가 괴로워 해야 할 일은 순간에 스쳐가는 영원을 볼 수 없음이 아니라, 그것을 붙잡을 패배의 토대를 만들지 못한 것이어야 한다..."
과연 그럴까? 그럴지도 모른다. 벌써 16년전, 20대 중반 청년 문학도의 다소 현학적이고 미학주의적인 언사중에도 쓸만한 것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이후 나는 지난 일을 기억해내기를 몹시도 꺼리는 습성을 몸에 지니고 살았으며, 일기라는 것을 쓴적도 거의 없다. 아마도 삶에서 '어떤 의문도 필요치 않는 최고의 상태'를 겪어본 적도 '예감처럼 뇌리를 스치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붙잡을 '패배의 토대'를 쌍하온 적도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참에 그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 후, 다른 것도 아닌 연극, 잠시 무대 위에 올랐다가 금새 무로 돌아가버리는 그 '순간의 예술"과 관련된 일들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리려는 것은 적지 않은 에너지를 요하는 일인 듯 싶다. 무엇보다 그 일이 깜감한 머릿 속 영사막에 조각난 슬라이드처럼 불연속적으로만 투영되었다가 바로 꺼져버리는 그런 기억의 파편들을 애써 엮어 짜맞추기를 요구하니 말이다.
전주시립극단의 제16회 정기공연 작품인 「마리사다」의 연출을 맡아 공연했던 것은 1991년 3월초, 벌써 꼭 4년이 되어가는 일이다. 그전에 이미 두차례 그 작품과 씨름을 했던 전력이 있으니 모두 세 번에 걸쳐 「마리사다」와의 만남이 있었던 셈이다. 돌아보건대 시기적으로도「마리/사드」는 마치 잊을만 하면 나타나 괴롭히는 첫사랑처럼 불현 듯 눈앞에 솟아 올라 몸과 마음을 쇠진시켰고, 기묘하게도 나의 연극이력이 거쳐 나온 세 영역에 고루 출몰하기도 하였다. 인연치고는 질긴 인연이라고나 할까.
첫 만남은 나의 첫 연출이 있던 다음 해인 1980년 봄, 독문학도들 중심의 극단 프라이에뷔네에서 였다. 일컬어 '서울의 봄'이라던 그 시절, 목전의 좌절을 못보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래서 더 초조했던 것일까, 시위의 물결은 한참 일렁이고 있는데, 차기 공연의 연출을 맡은 극단 동기 녀석이「마리/사드」를 들고 나선 것이다. 내노라던 극단 선배들, 그리고 나 역시 욕심만 부리다 여러 여건상 미루어 두고 말았던 작품을 감히... 그게 시국에 편승한 것인지 진정한 용기인지 그 당시는 어쨌든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석사논문을 빌미로 한걸음 물러나 잔소리만 하던 내가 급작스레 연습중 군대에 끌려간(?)후배 녀석의 대타로, 작품 한복판으로 진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에겐 중요해졌다. 본디 '샤랑통 전신병원 극단이 사드씨의 연출로 공연한 쟝 폴 마라의 박해와 살해'라는 긴 제목을 가진 작품은대본에서 받았던 섬찍한 인상 그 이상으로 짜릿했다. 그러나 그렇게 타오르던 그 열기의 결말은 허무했다. 결국 정세의 급변으로 공연 사정은 어려워졌고, 버팀목이 되어주길 기대해던 독일문화원 당국도 꼬리를 내려 버렸다. 하릴없이 비공개 자체공연으로 타협을 하고서도 공연을 끝낸 단원들은 야반도주하듯 마음졸이며 독일문화원 강당을 삼삼오오 도망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후암동 골목 허름한 술집에 모여 비분강대하듯 기울이던 술잔도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 연극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관객도 없이 메아리 없는 의침을 마스터베이션했으니, 그러나 돌이켜 보면 80년 6월,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던가. 그래도 그 덕분에 살아남았질 않은가. 씁슬한 추억의 여운만 남는다.
두 번째 만남은 전북대 독문과에서 이루어졌다. 세월은 7년이 흘러, 사랑하는 사람과 본의 아니게 맺어지지 못하고서도 은근히 그 사람조차 미워지기 시작해지는 그만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학과의 5회 연극 연출을 맡은 학생(김남재)이 연구실로 찾아와 대본 몇권을 빌려 가더니, 하필「마라/사드」를 골라 공연하겠다고 나섰다. 말려 보긴 했지만 거진 막무가내였다. 때는 바야흐로 87년 6월 항쟁이 서서히 무르익어가던 시절, 그 의지를 만용을 빌미삼아 말려본들 뭐하랴 그이후 공연되기까지의 과정은 연출자와 참여 학생들 뿐만 아니라, 작품을, 내 애인을 도리없이 붙여준 꼴이 되고 만(?)나에게도 엄청난 인고의 시간들이었다. 몇십명의 배우들과 스탭들, 그 뜨거운 여름내내 온졸일 계속되던 연습,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든 점은 그 당시 그들을 그렇게 꿋꿋하게 만들었던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이다. 어쨌든 감히 예술회관 무대까지 진출했던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나로서도 대한민국의 어느 대학생 연극단체가 이만큼하랴 싶었고, 뉴욕무대에 눈이 익은 영문과 김교수께서도 극찬을 연발해댔으니 말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숨어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어서 였을까?연인의 결혼식장에서처럼, 맘 속의 작은 빈 구석으로 파고드는 바람은 웃고 떠들면서도 의외로 차가웠다.
그래서 였을지 모른다. 1991년 초 전주시립극단에서 소위 상임연출을 맡고 있던 내가 직접 연출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단원의 요구를 「마리/사드」를 조건으로 수락하고 만 것은 89년 가을『카라부인의 무기』를 끝내고는 직접 연출한게 없기는 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몹시도 어려웠던 때였다. 마감 기한에 겨우 맞추어 박사논문을 마무리한 시점에서 나는 심신이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이런 몸과 마음으로 내 구원의 연인을 다시 만나야 한다니. 그래도 어줍지 않은 것들 보다야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지금 시국 돌아가는 판이라니, 오락가락하는 심정에서 진행할 연습은 필경 그리 순탄치 않았다. 학생들과 할 때처럼 일사불란이란 이미 불가능했음에도 아기 아빠까지 낀 배우들을 단체 기합까지 줬으니 말이다. 배역은 따지고 보면 여건상 최상이었을지 모른다. 마라(홍석찬)와 사드(장제혁), 해설자(전춘근)와 루우(안동철), 뒤삐레(조민철)그리고 가수와 환자 역을 맡았던 배우들, 무대감독과 미술(안상철), 작곡(류장영)과 조명(양문섭)등 당시 최강의 진용이었고 지금도 배우만 28명, 총 40명이 참여하는 그러한 팀 구성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꼬르데이만이 배역선정에서도 우여곡절이 있었듯 힘겨워했고, 끝까지 마라 살해 후의 젓가슴 노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의외로 홍보 부족으로 파장도 성에 차지 못했고. 종내는 공연 후 얻고 만 병의 치료에 일년여를 보냈을망정 , 나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남아 있다면 군산의 권선생님이 던져 준 격려가 아닐까 한다. 전주 연극이 십년은 앞서 가고 있다고 하는 가슴떨리는 그말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그 여건에서 더 이상의 성과를 바랄 수는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녹화 비디오가 실종해버렸기에 오히려 그러한 아우라를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은 혹 아닌지
실상「마리/사드」는 그리 손쉬운 작품이 아니다. 주제와 기법, 내용과 형식, 모두가 서구 연극 전통의 진수와 백미를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방대한 규모로 하여, 연극으로 제작하기도, 관객의 이해를 얻기도 몹시 어렵다. 더욱이 그 정치적 참여성이 주는 외적 제약은 말할 것 없으리. 수태 공연되는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내노라는 서울의 어느 극단에서도 아직껏 막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따라서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아마도 내가 이 작품을 질긴 애착을 갖고 있다면 바로 그런 점 때문이 아닐까. 어느 연인이든 쉽게 다가와 금새 속까지 열어 보인다면 좀 싱거워지기 마련일테니 말이다. 십수년의 세월에 걸쳐 세차례 만남이 있는 나로서도 대할 때마다 그간 미지 상태로 남았던 점들이 겨우겨우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문풍지 틈새로 보는 달, 뜨락에 서서 보는 달, 그리고 산정에 올라 바라보는 달의 느낌에 관한 이야기가 그때마다 이해할 수 있을 듯도 싶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나의 찬바람 불어오는 빈 구석에 대한 충분한 변명의 이유를 나는 언제든지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간 연극작업들을 돌아보면 '어려움'이라는 단어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여럿이 함께 하는 작업에서 인간관계의 어려움, 이념과 실제의 괴리가 주는 어려움, 이해받기 어려움 아마도 한참을 나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과 세계, 그 무한도의 넓이와 깊이, 끊임없이 당면하는 한계와 좌절 대체 한편의 작품, 한 순간 눈앞에 보여지고 들려졌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공연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뇌리를 스치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얽어맬 '패배의 토대'는 언제까지 쌓아가야 하는가. 난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