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3 | [문화와사람]
우리 생애의 거대한 보석
「한국성폭력예방치료센타」를 찾아서
김선경 전북청년문학회 사무국장
(2004-02-05 14:25:09)
만일 누군가 나에게 많고 많은 소원 중에 한 가지만 대라고 한다면 약간의 망설임이야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성을 인격적으로 동등하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천하는 남성을 '죽기 전에'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과연 죽기 전에 내가 그런 남성을 만나볼 수 있을것인지, 현재로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먼지 한 점 티끌하나 없이 고결한 지성과 품성을 지닌 남성도, 여성을 대하는 시각 만큼은 대단히 굴절돼 있으며 기가 막힐 정도로 꽉 막혀 있음을 자주, 너무도 자주 발견해 왔기 때문이다.
오,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성인들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는가?양성 모두가 이데올로기의 피해자가 아닌가? 남성을 적으로 생각해서는 정말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남성들은 왜, 잘못된 사회구조나 인간을 말살하는 제도악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분노하고 실천하면서도 유독 여성관에 있어서는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하기, 거꾸로 돌려서 생각해 보기에 그토록 인색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부르조아적 기득권을 일찌감치 포기했던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들도 남성으로서 갖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는 서툴기 짝이 없고, 오히려 다른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한 대가로 남성적 기득권만은 철저히 누리겠다는 배짱을 스스럼없이 내보일 때가 많다. 나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남성을 의심(?)하는 설익은 페미니스트다.
전주시 경원동 3가 39-10. 한국성폭력예방치료센타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격렬한 논쟁처럼 들리는 거친 목소리들이, 블라인드가 쳐진 회의실 저쪽에서 새어 나왔다. 한 남자가 엉거주춤하니 서서 인사를 보내왔다.(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이 김부남씨의 남편이었다. 그동안 쉼터와 병원에서 요양 치료를 받고 있던 김부남씨가 퇴원을 하는 날이어서 인사차 들렸다고.)
회의는 1시30분이 지나서야 끝났다. 늦은 점심을 먹을 시간. 상담원으로 일하는 아주머니가 대보름 뒤끝의 찰밥과 나물들을 싸온 보따리를 풀었다. 찰밥을 한 술 뜨며 박상희 대표(전주 나눔교회 목사)까 입을 열었다.
"올해로 우리 지역의 여성운동이 10년을 맞았어요, 부끄럽습니다. 전북은 여성운동이 활발해줄 수 있는 많은 여건들을 갖추고 있는데도, 당장지자제 선거를 앞두고 내놓을 만한 후보 한 명도 없다는 것... 정말 반성합니다. 하지만 '여성의 전화'나 저희 '센타'가 여성들의 생활과 밀접한 자리에 버티고 있어서 든든한 위안이 되기는 해요"
그랫 10년이 됐구나! 설익은 페미니스트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목사님은 단순히 '성폭력 사업'만 이야기하기에는 여성운동에 대한 꿈과 희한이 너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내가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처음에는 나도 좀 꺼려지고 쑥스러웠어요. 장난이겠지만, 전화로 거기가 성폭력하는 데여요?하고 물어오면 기분이 참 그랬거든요. 근데 지금은 의식적으로 성폭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확산시킬려고 그래요. 용어만 다르게 포장한다고 본질이 달라질수도 없는 거고, 성폭력이 어디까지나 성폭력인거지, 다른 말이 없거든요."
다른 어떤 말로도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이름, 성폭력.
지난 10년간의 여성운동이 여성운동의 당위성을 전파하고 교육해온 시기였다면, 이제는 구체적인 현장에 뛰어들어가 문제점을 해결하고, 그 해결을 위한 정치력 향상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하는 박상희 목사님. 그에게 성폭력 척결은 전 생애를 걸 수도 있는 지상과제다.
지난해 11월 개원한 이후 예방센타(줄여서 부른다)에 들어온 상담건수는 현재의 상담원과 간사 2명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만치 많다. 단순히 상담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건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이 겪는 고충은 더 심하다. 어린시절에 겪은 성폭행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중학생. 직장 상사의 노골적인 성폭행에도 대응할 방법이 없어 억울한 김모씨. 사연 하나하나가 구구절절하고 끔찍처절해서 상담자들은 애가탄다. 그나마 여성들의 의식이 높아져서 고소율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2%에 불과했던 고수율이 지금은 25%가 됐다.)주위 여건은 여전히 냉담하다.
성폭력예방치료센타가 그 동안의 위기센타나 고발센타와 비교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예방교육활동"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쉼터'와 같은 일시적인 보호시설이 시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고 이전의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한게 바로 성폭력이다. 또 이런 문제는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노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므로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관심이 필요하다. "누구에 의한 어떤 성폭력"도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월1천원에서 3천원의 후원금을 내는 형식으로 예방센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무조건 내라고 하지 말고 좀 세련되게 광고를 해달라"고 주문하는 박상희 목사님. 그러나 도와 달라는 말을 세련되게 표현 한다는 것이 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차 한 잔 값으로 성폭력을 없앱시다? 뭐 그런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꼭 이런 간지러운 말을 들어야 도와 줄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올해 예방센타에서 해야 할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A4용지 5장에 달하는 사업계획서. 내가 들어왔을 때 논쟁처럼 들렸던 회의내용도, 사실은 이 많은 사업들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였다. 2월부터 시작되는 성폭력 예방교육과 호신술 강좌, 3월중에 상담원 기초교육, 가을에 전문교육, 11월에 실습교육이 이어지고 상담원 재교육이 1년에 6차례 진행된다. 상담전화는 일요일만 제외하고 매일 오전10시부터 오후6시까지 받고 있다. 따로 독립돼 있는 '쉼터'를 운영하는 문제도 만만치 않다. 이 모든 일들을 박상희 대표와 김금옥 총무, 간사 2명과 자원봉사 상담원들이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개원한 지 3개월 남짓, 체계는 아직 서투른데 상담 건수는 갈수록 늘어만가고 해야 할 일은 산더미다. 상담원 아주머니가 싸온 찰밥에 토란나물, 시금치 나물, 깻잎 장아찌를 엊어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얼굴에서는, 그러나 그늘과 피곤을 찾아 볼수가 없다. 늘 일에 쫓기는 박목사님은 건강이 계속 말썽을 부려 얼굴이 반쪽이 됐지만 누가 감히 그만 쉬시라고 섣부른 위로를 건넬수 있겠는가. 힘들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일 맡기를 자청한 사람들이다. 일이 편하고 궂음을 탓하는 어리석음과는 오래전에 이별한 사람들, 간사 두 분은 자꾸 샛노란 유정란찜에 젓가락이 가고, 목사님은 깻잎 장아찌에만 손이 간다. 얼음이 서걱서걱 씹히는 동치미를 솜씨좋게 내놓은 김금옥 총무는 굳이 찰밥이 싫다고 맨밥을 맛나게 먹는다. 취향도 다르고 입맛도 다른 다섯 명의 여성들. 이들이 이름도 긴 한국ㅇ성폭력예방치료센타를 이끌고 간다. 그러나 이들이 거느리고 보살피는 여성들이 몇 명인지는, 그리고 몇 명이 될지는 아무도 가늠하지 못한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엄청난 보석이 숨겨져 있고 그 보석의 광채아래 만신창이의 몸을 누이는 이땅의 여성들이 있다. 나는 이들을 '우리 생애의 거대한 보석'이라고 부르고 싶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남성을, 죽기 전에 단 한 명이라도 만나보고 싶다는 나의 소원은, 이 보석 같은 사람들로 인해 어쩌면 성취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그래서 나는 가져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