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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3 | [세대횡단 문화읽기]
고고한 기품에 서린 강직함과 절개 전북의 사군자- 난(蘭)
이철량 전북대교수 미술교육과 (2004-02-05 14:26:19)
전북의 그림중에서 사군자는 그 비중이 훨씬 크다하겠다. 이러한 연유는 앞서 언급한대로 지역적 특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역시 오랜 지역문화의 산물이라 하겠다. 경제적 풍요와 식자층의 폭넓은 활동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전북의 회화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왔는데 그중 동양회화의 정수로 꼽힐만한 사군자의 높은 수준은 사실 전북회화의 수준높은 내용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군자들이 필자의 지극히 한정된 자료에도 불구 하고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 아니할수 없고 이 부분은 앞으로 본격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아마도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작품들을 발굴 해내는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여타 다른 영역의 전통예술과 함께 전북의 회화는 그 위상이 한층 제고될수 있을 것이다. 전북의 사군자중에서 앞서 언급한 대(竹)는 현대에 까지 폭넓은 인구를 가지고 있으나 난(蘭)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구한말에 배출된 근대의 작가들에서 난그림이 대에 못지않게 많이 제작되었다. 그 대표적작가들이 조주승(趙周昇), 유영완(柳永完), 김희순(金熙舜), 김정희(金正會)등이라 할 만하다. 난그림의 역사는 대그림보다 훨씬 높이 올라간다. 이는 난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형태미와 그 고고한 기품이 여느 식물보다 아름다운데 있고 또한 그 향은 시문을 즐기는 사대부들의 미감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있다. 난의 상장성으로 충성심과 절개가 그리고 후대에 오면서 그 자태의 아름다움과 향기로 인해 미인에 비유되기도 한다. 난을 즐기고 노래하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살았던 중국최고의 서정시인 굴원(屈原)으로 대표된다. 굴원은 초(楚)나라의 시인이며 충신으로 그가 그의 꽃밭에 난을 심고 즐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대에 이미 난을 즐기는 풍류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굴원이 정치적 역경과 낭만을 비유하여 난이 충신의 절개로 상징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되는 형식의 묵란(墨蘭)은 대나 매화보다 훨씬 늦게 유해오디어진 듯 하다. 먹으로 그려진 묵란이 문인화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기는 중국 원(元)나라때 와서의 일로 여기고 있다. 우리나라 묵란의 역사도 대체로 여기에 따른다고 볼 수있는데 조선조 중기에 가서야 유품이 확인된다. 이정(李霆 1541-1622) 이우(李우1541-1609) 그리고 이정(李정 1581-1645)등의 묵란이 남아있고 후기에 가서야 남종화의 영향으로 김정희(金正喜1786-1856)와 같은 묵란의 대가로 등장하게 된다. 김정희는 그의 뛰어난 서체의 획에 기초하여 많은 명춤을 남였다. 이후 우리나라의 묵란의 대가로 불려지는 대원군 이하응(1820-1898), 과 민영익(閔泳翊1860-1914)등이 있고 이 무렵 다양한 소재를 섭렵하며 묵란을 많이 그렸던 허련(許鍊1809-1892)그리고 이하응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김응원(金應元1855-1921)등이 대표적 작가로 불리운다. 이들의 활동으로 묵란은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면 사군자의 여러 화목(畵目)중에서 가장 활발한 전개를 보이는데, 조선조에 들어서며 그림 전반의 화목중에서 대가 차지했던 가장 중요한 위치를 난이 선점한 형국이 되었다. 이는 당대 문인화단의 절대적 지도자였던 김정희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화단의 전반적인 흐름속에서 전북의 난 그림이 형성되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엇다. 그것은 전북화단이 적어도 1800년대 이후에 사군자가 급격히 활발해졌다는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전북의 사군자는 이미 언급되어진대로 이정직과 조주승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좀더 많은 자료의 확인이 필요하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들 이전에 이미 사군자가 수용되어졌을 것으로 보여지나 아직 구체적 사료나 작품이 전하고 있지 않다.이정직이나 조주상이 난 죽에 모두 능하였으나 이정직이 대그림을 그리고 조주승이 난그림이 특히 출중하다. 조주승의 난이 대원군 이하응의 난그림과 상당한 유사성이 있음은 이미 밝힌 바있다. 그리고 이들의 형식을 유영완(柳永完1892-1953)이 이어받고 있다. 유영완은 김제에서 나서 이정직에게서 그림과 글시를 공부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매우 강직한 성품으로 평생 유학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던 선비였다. 그의 그림에서도 소위 대쪽같은 선비의 기상이 서려있는데 그의 전반적인 화풍의 후에 언급하기도 하고 난그림만을 비교한다. 대원군이나 조주승의 그림에서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었던 화면 필치가 유영완에게서 그대로 보이는데 화면 오른쪽 하단 밖에서 피어오르는 난잎의 배치가 화면 중앙을 시원스럽게 하고 있다. 이러한 대련(對聯)식의 구성방식이 앞선 조주승의 영향으로 보인다. 뿐만아니라 가볍게 시작하여 뻗어 올라가며 만든 당두와 잎끝을 쭉 뽑아 올려내는 서미의 묘사가 또한 흡사하다 하겠다. 가늘고 길게 뽑다가 반전 시키는 극적효과는 김정희에서 대원군으로 이어지는 특징인데 조주승과 유영완이 그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본다. 유영완이 조주승과 직덥적인 사승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유영완이 여러 경로를 통해 조주승의 작품을 대하고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난그림에서 명춤을 남긴 작가중에 김희순은 앞선 조주승이나 유영완과는 형식이 다르다. 김희순의 란은 훨씬 정갈하며 선의 변화가 적다. 앞선 두사람이 마르고 날카로우며 극적인 변화를 따랐던데에 비해 훨씬 부드러우며 유연한 섬미를 내고 있다. 돌과 뿌리가 뽑혀진 난과 화분에 담겨진 난이 대각선으로 배치되어 구성상으로는 지극히 단조로우나 이 단조로움이 오히려 고요한 격조를 자야내고 있다. 화분에서 소담하게 된 난과 뿌리가 뽑히고 잎이 묶여진 나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므로 해서 작가의 내재된 심상을 표출한 것 같다. 이 그림을 통해서 보면 김희순은 그림에 대해 단단한 기본기를 지녔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당시 널리 애용되던 개자원 등의 교본을 충실히 익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뿌리가 뽑혀진 한포기의 난은 마치 당대 대원군과 쌍벽의 대가였던 민영익의 난을 연상시키는 필세의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김정희(金正會1903-1970)는 앞선 작가들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른 그림의 작가라 볼 수 있다. 잎이 90도로 꺾이고 필세의 반전효과를 즐기고 있는 점으로 보아 대원군의 난을 연상시키는 점이 없지 않으나 김정희는 나름의 독특한 형식미를 갖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묵죽에 대가였던 해강 김규진에게 서화를 익혔다고 전하나 필치는 해강에게 훨씬 못미친다. 그러나 김정희의 특징은 그림이 천진스럽고 해악이 깃들어있다. 난의 생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필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약점과 그림이 양식화되어있는 단점이 있으나 나름의 독자적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는 장점을 보여주고 있다. 김정회의 그림에서 아무츄어리즘의 전형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앞으로 전북의 난 그림을 지극히 단편적으로 살펴보았으나 수많은 서화가들이 즐겨 다루었던 난그림은 앞으로 새롭게 발굴 정리 되어져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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