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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3 | [문화저널]
문화강좌 지상중계 시대를 넘나드는 문제의식이 진정한 전통을 창조한다. 백대웅교수의「판소리 현대화, 어디까지 왔는가」
백대웅(2004-02-05 14:29:26)
오늘 제게 맡겨진 강좌는 '판소리 현대화 어디까지 왔나'라는 주제입니다. 판소리가 현대화된다고 하는 것이 궁극적인 형태는 창극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겠는데, 판소리와 창극은 엄연히 다른 장르이고 따라서 잡근방법을 조금 달리 해야할 필요가있습니다. 18-19세기 우리 음악을 대표하는 것은 판소리 였습니다. 그 당시에 판소리를 한다는 것은 곧 출세의 길이 었기 때문에 음악을 한다면 가장 먼저 판소리를 해서 이름을 날리고 돈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판소리를 하지 않고 서양음악의 길로 들어서는 까닭에 자질면에서 일단 뒤처지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지금도 판소리를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일생을 보장한다고 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겠지요 판소리에 쏟는 공력만큼 댓가가 아직은 미약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판소리가 등장한지 2세기가 지나면서 산조라는 음악어법이 줄기를 같이하는 기악 독주곡으로 변화를 겪게 되고 이 같은 변화를 기점으로 하면서 판소리의 시대적 역할은 사실상 일정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판소리에 진한 감동을 받고 순수한 민족적 감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판소리의 미래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하겠습니다. 판소리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전통음악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악이 들어온 시기 1116년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 시대의 음악은 사실상 전설로만 남겨져 있습니다. 당시 고려에 음악적 체계가 서지 않았을 때 들어온 대성악이 조선조로 넘어오면서 종묘제례악으로 변화합니다. 이 시기의 음악은 대개 악보가 남아있어서 당시의 음악의 모습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과정이 임진란을 겪으면서 이 시기의 음악은 삼 이 삼삼 이 삼 이라는 육대강의 장단구조를 보여줍니다. 이 시기에 악보로 남겨진 음악의 장단은 조선조초에 예약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수단으로 즉 일조으이 규범으로 사용된 듯 합니다. 평조와 계면조라는 두가지 조만으로 우리 음악을 모두 그리고 있듯이 대단히 규범적인 틀입니다. 어쨌든 1600년대까지 모든 음악은 대개 삼 이 삼 장단으로 구성되어 불규칙한 장단으로 되어 있고 평조와 계면조가 중심이 되어있고 음역이 좁고 하는 등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의 음악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음악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서양음악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음악은 중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의식의 한 형태적 요소 였습니다. 그러나 임진란이 지나면서 실학 사상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보다 실질적인 음악을 추구하면서 현존 전통음악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대부나 중인층이 음악을 수용하고 즐기면서 가곡이 나타나고 시조, 가사 등의 음악이 나타납니다. 조선조에 실학이 등장하면서 한 시대의 음악사조가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대표적인 실학자중의 하나였던 홍정희가 남긴 문헌에 예악을 비판하면서 '음악의 미는 곧 미와 통한다' 즉 음악의 아름다움이란 관념적인 예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감성에 있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등장합니다. 음악은 즐거워야 하고 기쁨과 슬픔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실학적 영향이 비로소 시대속에 들어섭니다. 이러한 경향은 음악뿐 아니라 미술, 문학 등 거의 모든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음악사에서 18세기는 무척 난해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전통음악이라는 것은 모두가 이 시기에 만들어집니다. 대개 전통음악이라고 하면 몇백년쯤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7세기이전의 음악은 전승되고 있는 것이 한편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음악의 역사는 17세기 이후 새로 생겼고 현존 전통음악은 길게 잡아 3백년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 종묘제례악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음악이 새롭게 변화해 갑니다. 특히 영조 시대에 이양법이 개발되면서 모를 심고 논을 매고하는 작업들이 농사의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자리잡으면서, 지금 농요의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집니다. 지금에 와서 판소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장단이 변화하는 즉 규칙적인 장단(균등박자)으로 바뀌면서 등장하는 음악이라는 점입니다. 판소리를 들어보면 엇모리 하나를 빼고 모든 박자가 균등박자지요. 우리 음악을 어떻게 이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느냐와 어떻게 보존하느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마치 그것도 15세기에 유효했던 음악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지요.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 음악 스타일을 이해해야 판소리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될 수 있습니다. 판소리가 처음 우리 음악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18세기입니다. 1750년경부터 판소리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보다 보편화되고 사람들이 즐기는 시작하는 시기는 19세기 초반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촌로부터 임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자리하고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가기도 합니다. 안동김씨의 세도시절에는 송흥록이라는 명창이 그 권력과 운명을 같이합니다. 그것도 아마 송흥록이 우리 나라의 문화를 장악하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송흥록의 동편소리가 판소리의 주류를 이루었겠지요. 그러나 안동김씨의 세도가 무너지고 1850-60년대 대원군 시대에 들어서면서 송흥록은 세상속에 잊혀진 인물이되고 그때 부상하는 인물이 박유진입니다. 이 사람의 노래 스타일은 전형적인 계면조에 따른 음악형식인데 바로 이 시기의 판소리를 일컬어 서편소리라고 이름이 붙여집니다. 이처럼 동편 또는 서편이라는 개념은 바로 시대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동편소리는 20세기 이후 일어난 서편소리와는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오히려 동편소리는 단가소리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송흥록, 권삼득, 염계달, 고수관 등에서 조금씩 남아있는 더늠을 보면 예외없이 남도 계면조가 아닙니다. 이들의 음악 어법은 가곡, 가사, 시조 등과 같이 들어 넘길 수 있는 계면조가 아닙니다. 초기 명창들을 보면 전라도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이후 판소리와는 전혀 다른성격을 보여주는데 아마도 박유전이 판소리를 대표했던 시대부터 전라도 출신의 명창들이 주로 등장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전라도의 무당출신들이 대거 판소리를 주도하게 되는데 이런 까닭에 판소리가 무가에서 시작되었다고 이야기되기도 합니다만 그것과는 또 전혀 상관없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무가 역시 전형적인 삼 이 삼 장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무가에 판소리 장단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판소리가 나온 이후의 시기입니다. 따라서 무당들이 판소리의 장단을 빌어 섰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러한 18세기의 변화로부터 판소리는 시작해서 당시의 대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받게 됩니다. 왜냐면 시조나 가곡처럼 느리게 가는 장단은 알기가 무척 어렵지만 판소리 장단은 처음 듣는 사람도 바로 알 수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장단에 규칙적인 형태로 익숙해지면서 바로 알아듣는 음악이 되면 사람들을 이런 음악에 감흥을 느끼고 즐기게 됩니다. 초기의 판소리 명창들은 긴 이야기를 가지고 이처럼 균등박자를 사용하여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발전해온 판소리가 차츰 계면조로 바뀌어 갑니다. 계면조로 바뀌어간 판소리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임방울입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는 무려 백만장 이상의 판을 팔았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아마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던 듯 합니다. 나라 잃은 설움이나 그 시대적 애환을 담아TEjs 것이지요 1910년부터 시작된 20세기는 우리 역사에서 실패의 시대였습니다. 20세기 격동의 소용돌이를 살아오면서 무엇이 가치있는 것이고 무엇이 전통인가에 대한 생각들, 즉 미적 가치관들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지금 국악계에서 문제가 전통음악 하면 무조건 과거지향적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청산별곡, 만대엽, 중대엽, 북전 등의 노래들은 단 하나도 전승되지 않고 있는데 이런 전통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전통의 개념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많지요, 전통음악이 시대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장단구조가 변화하면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전통음악이 2세기 전만 가더라도 전혀 그 모습이 다르다는 점은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노래하고 있는 오음계자체가 우리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 전통음악에는 당나라, 명나라, 원나라, 심지허, 몽고 음악까지 섞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해금, 장고, 호적도 몽고 악기로 고려시대에 들어온 것이지요 악기 자체가 외국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무엇이 전통인가를 따질때는 아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통을 말할때는 국수주의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언제 어느때부터 들어온 것인지도 모르고 전통을 말합니다. 판소리가 18세기말에 생성되어 19세기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점은 분명하고 동편과 서편의 시대적 변화가 발생하고 계면조가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20세기에 이르면 드디어 창극이 발생합니다. 창극은 물론 서구의 연극과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판소리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옛날에 판소리라면 이면이라고 해서 길바꿈, 즉 장단만 쓰는 것이 아니고 청이 바뀌는(음악적 용어로는 전조를 사용한다는)것이 특징인데 아직도 청이 바뀌는 기법을 사용하는 식의 기법이 전라도의 판소리에만 있는 것입니다. 판소리가 이렇게 내려오다가 20세기 후반에는 서양의 연극적 요소와(정확하게는 중국 경극에 영향을 받은 듯 한데)합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창극을 만들어가면서 그에 맞는 종합예술의 형식을 갖추지 못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개 수성가락이라고 해서 몇사람의 기악하는 사람들이 따라가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즉 판소리는 북반주 하나만 있으면 가능했지만. 창극에는 연주가 필요해지는데 그런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지요. 그런 것도 우리 전통음악의 큰 특징입니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오케스트라는 것은 봉건영주들의 세력확장이나 의식을 위해서 사용되어지면서 자연스런 발전과정을 거쳐왔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중앙집권적인 정치구조에서 한번도 궁중외에 민간과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타악기를 중심으로한한 풍물놀이 즉 농악이 있었을뿐 관현악단이 대중을 위해 만간이나 지방에 있어본 역사가 없었고 궁중에만 있었습니다. 그점이 바로 우리와 서양 음악사와의 차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번도 관현악이 있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 창극이라는 장르가 생겨났을 때 그것을 뒷받침해줄 만한 관현악의 준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강 삼현육간이나 즉각적으로 몇 개 악기를 가지고 반주를 하던 형태로 진행되었고 전형적인 체계가 잡혀 있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창극을 할때 오관청(서양 음악으로 하면 이프랫 쯤 되는)에 전부 맞추어서 소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남자나 여자나 같은 청에 맞추어야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창극을 할때 보면 잚은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같은 청에 맞추어야 되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다까 서로가 음정이 맞지 않고 힘든 작업이 됩니다. 청을 자유롭게 옮겨다니는 훈련이 전혀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청을 하나로 고정시켜놓고(외가닥이라고 하는)처음부터 끝가지 몇시간을 똑같이 노래를 하니 이런 노래가 요즈음의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창극을 보고 나오면 중요한 아리아 하나씩은 흥얼거리면서 나오고 그 여운이 오래 남아야 하는 법인데 두시간 내내 해봐야 오관청에 맞춰서 판소리 하듯이 똑같이 하는 창극에 일반인들이 흥미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창극의 형식에 걸맞는 훈련의 과정이 없기 때문에 관현악단에서 매긴 청에 맞추어서 차고 나오는 훈련도 없고 합창도 없고 늘 비슷한 가락의 노래만 있습니다. 판소리가 `19세기를 풍미하면서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장르로 발전하고 그것이 다른 장르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지만 역시 판소리는 그 나람대로 시대적인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판소리사에서 20세기는 무척 아쉬운 시대입니다. 20세기 초기에 시대의 변화를 먼저 읽었던 궁중음악이나 기악연주자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새롭게 체계화시켜내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판소리 하는 사람들은 그같은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판소리에 매력을 느겼던 이유는 이 시대의 초기 명창들이 가졌던 대단히 진취적인 생각때문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음악을 하고 싶어했던 그들에게 기존의 가곡, 가사, 시조 이런 노래들은 성에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초기의 판소리 명창들은 당시까지 이땅에 있던 모든 음악들을 한데 모아 새로운 형식의 노래를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판소리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같은 비판사고가 문제의식이 판소리라는 새로운 장르의 노래를 개척해냈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의식없이 새로운 음악은 태어나지 못합니다. 기존의 음악으로 자기의 감성을 표현해낼 수 없다는 음악에 대한 반성과 절박감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20세기의 우리가 해야할 작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 우리가 해야하는 작업들은 이땅에 있는 모든 음악, 물론 서양음악까지를 포괄해서 새로운 음악의 스타일로 우리음악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형태의 새로운 음악을 저는 창극이라고 보았습니다. 최초의 창극은 사람들 생각에 판소리 음악만 분창해서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창극으로는 도저히 이 시대의 사람들을 감동시킬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 입맛은 초코렛으로 또는 아이스크림으로 변해 있는데 '이것이 전통이니까'하고 주어진다면 그것은 대중들의 정서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지고 개척되는 창극은 기존에 있는 모든 음악보다 더 재미있어야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게끔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르기에는 지금의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88올림픽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까지를 다보고서 너희 나라에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창극이라는 장르밖에 없다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점에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중에 앞으로 세계화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는 바로 창극이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던 것입니다. 창극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렇듯 공통된 기대치가 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30-40년 후쯤이면 새롭게 완성된 창극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씨앗을 뿌리고 밭을 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예술형태도 그렇게 하루아침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창극이 보편성을 갖고 생활속의 음악으로 자리잡고 험난한 세상에 경쟁력을 갖추려면 대단히 많은 실험으로 이것을 뒷받침 해야 합니다. 작년에 동학백주년을 기념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가 있었습니다. 양약계는 약악대로 민족음악에서는 민족음악대로 있었고 국악에서는 국악대로 있었습니다. 「천명」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때 참여했던 극단『미추』였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창극을 할수 있는 단원을 길러놓지 않았기 때문에 미추단원들이 했는데 대체로 소리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런 실정이기 때문에 새로운배우, 새로운 관현악, 새로운 작곡가도 나와야하고 새로운 연주자도 나와야 합니다. 갈길은 멀고 해야할 일은 많은데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가더라도 역사가 가면 2천년대를 넘어 2030년이쯤되면 우리에게 자랑이 되고 세계사람들에게 떳떳한 새로운 창극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의 전통음악은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과거의 전통음악 역시도 중국음악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21세기의 한국음악 역시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중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 화음개념입니다. 우리나라 시나위 화음적인 체계가 있을뿐 대개의 경우 단선율입니다. 동시에 여러악기가 있을 때 서양악기들은 서로 다른 멜로디를 연주하지만 우리의 경우 하나의 멜로디만을 연주합니다. 이것 역시 전통음악이 가진 한계의 하나입니다. 우리 전통음악이 변화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서양음악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고 따라서 서양음악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 수 있고 새로운 감수성을 가지고 음악적인 표현력과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판소리 현대화 어디까지 왔는가' 하고 묻는다면 '아직 시작도 않앴다'가 제가 생각하는 답입니다. 단지 이제 시작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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