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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3 | [문화가 정보]
현장의 마을 굿이 사라진다 정월 대보름굿을 다녀와서
김성식 민속연구가.문예기획 두레 대표 (2004-02-05 14:32:06)
정월 대보름 굿을 비롯한 다양한 현대의 마을 굿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민중 생활을 지배해 온 집단 제의와 놀이의 한 형태다. 전통 농경 사회에 있어서 그것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두고 간단없이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그 마을 굿이 구성원간의 사회적 유대와 공동체 생활의 규율을 설정하는 계기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품앗이나 두레조직을 제쳐두고 농사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 할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마을 굿은 이미 소멸의 단계에 놓여있다.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기능을 상실한 채 뇌사판정을 목전에 두고있고 일제 시대로부터 근대화시대에 이르면서 마을 굿은 철저하게 혹세무만 하는 미신으로 규정하여 "타파의 대상"이 되었고, 문화적으로는 서구 문화의 무차별적인 유입에 따라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 이이서 구태의연한 "과거의 낡음 유습"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서구 종교의 무비판적인 수용은 마을 굿을 우상숭배의 행위로 왜곡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거기에 농업생산수단의 발달이 가져온 변화는 마을 구성원간의 협업기능을 불필요하게 했으면 사람마저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에까지 이르러 있다. 지난 2월 14일은 음력 정월 대보름이었다. 마을 굿이 상당부분 소멸의 단계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정월 대보름 굿이 행해지는 마을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필자는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원우동이라는 마을에 다녀왔다. 이 마을의 정월 대보름 굿은 상대적으로 복합적인 의례가 행해지는 까닭에 마을굿의 전형으로 삼음직하다. 마을 입구 중간쯤에 돌당산과 나무당산, 그리고 솟대 당산이 한 몸져 있는데 줄 당기기 한 줄을 솟대 당산에 옷 입히는 것으로 마을 굿이 마무리된다. 현장에서 받은 첫 번째 느낌은 4~5년 전에 다녀왔던 당시와의 차이였다. 줄을 꼴 사람조차 구하기 힘들어서 가늘기 짝이 없던 줄이 제법 굵어 진점과, 대보름 굿이 끝나면 구경왔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일시에 빠져나가 오히려 쓸쓸하기만 했던 마을이 이날은 굿이 끝나고도 굿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올해의 그곳 대보름 굿에는 "부안 사랑 청년회"와 "부안 농민회" 청년들이 함께 있었다는 차이가 가져온 변화였다. 요즈음 도심 공간 속에서도 놀이적인 차원에서 대보름 굿이 행해지기도 한다. 다행한일이다. 그러나 더불어 생각할 점도 있다. 농촌 현장의 몇 군데 밖에 남지 않은 마을 굿을 살리는 일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다는 점이다. 현장이 죽어 가는데, 현장의 마을 굿을 제대로 모르는데 이식된 도시 대보름 굿이 얼마나 건강하겠는가. 또 하나는 종교와 문화를 혼동해서 빚어지는 갈등문제다. 오늘날 개인화 되고 기복적인 종교가 전국을 휩쓰는 와중에서 마을 굿이 지녔던 건강한 사람의 양태는 매우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마을 굿 또한 기복 적인 신앙, 주술적인 신앙의 형태를 띠어왔음이 사실이나 이는 "나"가 아닌 "우리"의 문제를 "닫힌 세계"가 아닌 "열린 세계"에서 제의와 놀이의 문화적인 행위로 행해져 왔을 뿐이다. 문명화된 오늘의 세계에서 하찮은 나무나 돌을 우상으로 섬기며 제발 내 소원좀 들어달라는 어리석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만 비록 미물이지만 그 대상 앞에서 나는 얼마든지 겸손해 질 수 있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은 마을굿 현장에 서본 사람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교조성을 버리고 탄력적인 재해석을 내려야한다.; 마을 굿이 행해지는 마을은 대부분 믿는 집과 믿지 않는 집으로 두동강 나있다. 심지어 마을 공동 자금 추렴을 위한 건립조차 거부하기 일쑤다. 구성원간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한판 "굿"이, 그나마 몇 안 남은 주민들간에 갈등과 반목의 밭을 일구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적이라는 당위성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전승되어온 배경에서 "마을의 무언가를 지켜주는 상징"으로서 마을 지킴이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될 때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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