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3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차가운 카타르시스의 리얼리즘
영화 「밴디트 퀸」을 보고
황자혜 계간『리뷰』편집부
(2004-02-05 14:34:56)
입춘이 지나고 유난히 마른 땅에 눈까지 내리던 2월의 어느 날 멀티 미디어 특집 기사들 속에 묻혀 있다가 한편의 감동적인(?)비평을 읽게 된 것과, 그 날 영화를 보기로 한 나의 일정과는 우연이었을까. 모든 조야한 수식어들을 거부하고 리얼리즘의 깃발로 설 때만이 문학은 그 본연의 생명력을 갖는다는 한 문학 비평가의 글은, 진정한 문학을 포함한 예술의 총체적 힘과 그 핵심을 잘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검게 그을린 인도의 한 여성이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총을 잡은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뒷모습을 담은 극장의 대형사진은, 헐리우드의 상업성 영화가 전폭적으로 상영되는 도심 한복판에서 참으로 묘한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1957년 인도의 하류계급에서 출생하여 학교교육의 혜택이라곤 받아보지 못했고, 11살이 되어 민며느리로 팔려가 강간당하고 학대를 받고, 갱단에 납치되어 추행을 당하고 무리들에게 윤간당한 후 빨개벗겨진 채로 마을에 내돌려진 여자, 폴란데비. 81년 갱단을 조직, 대장이 되어 지주를 상대로 약탈을 결행, 베마이 마을에서 지주 24명을 처형한, 바로 그여자 폴란 데비. 83년 1월에 경찰에 자수, 동지들의 안전, 천민계급과 강간당하는 여자들에 대한 보호를 요구하며 수상과 협상을 벌인 천민들의 여왕, 약탈의 여왕, 산적의 여왕이었던 폴란데비.
세카르 카푸르 감독의 「밴디트 퀸 (BANDIT QUEEN)」바로 인도의 폴란 데비라는 실존의 인물을 다룬 영화이다. 계급과 성, 관습과 인습의 굴레에서 찢겨지고 피터진 한 여성의 반항과 투쟁이 참으로 생생하게 그려진 이 영화는 우리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과 만나게 된다 더욱이 감독의 의도대로 눈물어린 감동이 아닌 냉혹한 현실을 목격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인간이 억압과 착취에 저항한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 앞에 봉착하게 된다.
헐리우드 영화에 너무도 익숙해진 우리에게, 외국어 영화(비 영어권 영화), 특히 제2세계 영화는 선입견 적으로 짜증이 나서 웬만한 대작이 아니고는 감동되지 않으므로 뒷전에 두게되는데, 이 영화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너무도 사실적인 강간, 폭행의 장면이 거북스런 인상으로 남게 되는, 유쾌하지 못한 영화로 기억될지 모른다.
그러나 인도의 최하계급, 천민으로 태어나고 딸이라는, 여성이라는 슬픈 운명을 노동과 성의 질곡에서 고통받다 마침내 그 속박과 굴레에서 저항하고 투쟁하는 폴란 데비는, 보는 이의 가슴과 뇌리에 묵직한 중저음으로 남아 의미심장한 물음으로 울리게 된다.
나는 이 울림을 "차가운 카타르시스"라고 정의하고 싶다. 아울러 이 영화를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만난, 그 차가운 감동의 리얼리즘이 살아있는 생생하고 진실 어린 예술작품이었다고 칭송하고 싶다.
난폭하고 파괴적인 영상은 그대로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고, 그것을 뚫고 부림 치던 목소리는 착취와 억압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저항이 잊혀지고 묻혀진 오늘 이 시대-진정한 오아시스가 아닌 사막의 신기루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서두에서부터 "이것은 사실이다 This is true story" 라며 달겨 들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펼쳐놓은 야쇼크 메타의 카메라, 그 영상위를 삶과 죽음의 갠지즈 강처럼 흐르는 누스트라 화테 알리칸의 음악, 다른 여배우들이 극구 거절했다는 폴란 데비 역을 맡은 여배우 시마 비스와스 그리고 세카르 카푸르 감독은 영화 「밴디트 퀸」을 통해 시리고 감동과 진실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의 상품과 가치 논리 속에 우리의 모든 예술이 종속되어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보면, 치기가 아니고는 상업성만을 탓 할수 없다고, 이제 리얼리즘만을 내세워 감동을 조장할수 있는 시대는 가버렸다며 어르고 달래는 논리가 훨씬 타당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저야만의 시대를 살아남게 한 인간의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의지는 인류의 역사를 발전으로 이끌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근원적 힘이었다. 그리고 예술은 그 힘을 목격하고 고발하는 산 정신 없이는 차마 예술이라 말하기에는 쑥스러운 그 무엇이 아닐까.
영화 전체를 아우리는 리얼리즘 정신을, 당혹스럽고도 진지하게 목격하고 나오면서 되돌아본 극장의 대형 그림판. 폴란 데비는 금방이라도 돌아설 듯 하고 " 이것은 사실이다"라는 장중한 외침과, 한서림을 가슴에 묻고 돌아오는 이 현실은 아직도 차가운 봄이다.
소설 읽기를 좋아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한 작가의 작품집을 애써 돈주고 사본적은 별로 없는 많은 얌체족속들처럼 나 역시 (그러니 좋은 소설가가 소설만 써서는 밥벌어 먹고 살기가 힘든것이리라) 문예지나 소설모음집 등에 한두편씩 살리는 중단편들을 통해 우리시대의 작가들을 만나곤 한다. 그래서 어쩌다 도서관이나 친구에게서 혹은 요즘 번성하는 책 대여점에서 운좋게 어떤 작가의 작품집을 빌려보는 경우를 빼곤 많은 작가들은 나에게 그야말로 우연히 읽게된 어떤 특정 소설의 분위기나 인상으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런단편적인상으로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했다고하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따르지만 때로 모든 것을 꿰뚫는 화살촉처럼 한 작가의 세계를 날카롭게 보여주는 작품도 있을 것이다.
공선옥을 작가로 불리게 한 등단작 1991년의 중편 (씨앗불)을 읽고 나는 어떤 느낌을 가졌던가. 우선 강렬했다. 우리의 80년대를 온통 쥐고 흔들었던 역사적인 당위와 이념들이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정처 없이 무너져 내리던 90년대 초입에, 누구는 절망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혼돈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문민 시대를 이야기 하던 그때에, 갑자기 튀어나온 공선옥은 "그해 오월 광주"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폼잡고 사는 고상한 지식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민군에 참여해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밑바닥 인생들의 시선으로 말이다. 80년대에 이십대 청춘을 보낸 우리들의 막막한 괴로움이었던 "오월광주" 첫인상의 강렬함 다음으로 온 느낌은 묘하게도 어떤 한스러운 서글픔이었다. 주인공 위준이 많은 갈등들을 딛고 가슴속에 "오일팔 귀신들"을 꺼지지 않는 씨앗불로 꽁꽁 묻고 그힘으로 자신이 살아갈 것임을 아프게 다짐하면서 소설이 끝나는 데도 나는 왜그런지 함께 고양되고 격려 받지 못했다. 왜그랬을까? 지금이 포스트 모던이 이야기 되는 90년대에서? 아니면 나의 때묻은 나이먹음 때문에?
"씨앗불"에서는 "그해오월"에 시민군이었다가 친구와 애인을 잃고 자기만 살아남아 스스로 "죽음보다 못한" 오욕의 세월을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팍팍한 이야기가 걸쭉한 욕설과 남도 사투리로 거침없이 그려지고 있다. 그 이후에 발표한 소설들도 (목숨,목마른 계절등) 거개가 우리시대 어두운 역사의 그늘에서 상처받은 인간들의 가난과 소외를 주제로 해서 그들의 찌들고 얼룩진 인생살이가 그려지고 있다. 고달프고 암담한 인생살이에 찌든 이런 한스런 인간 군상들을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선옥이란 작가는 정말 비슷한 나이 또래의 다른 작가들과는 많이 다른 특이한 작가인 모양이다.
한 작가의 자전적 체험이 작품 속에는 얼마만큼이나 들어가 있는 것 일까. 모든 소설은 자서전의 변주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험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반역사적이라며 경멸하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공선옥은 자기 세대의 다른 여성 작가들(요즘 창 주목받고 있는 작가들인 신경숙 공지영 김인숙 등등)과는 매우 다르게 살아온 사람인 듯하다.
그이의 첫 창작집이기도 한 "피어라 수선화"에 실린 아홉편의 중단편 곳곳에는 어쩌면 한 인물의 여러변주된 모습처럼 보이는 여자들이 나오는 데 거개가 통속적인 의미에서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여자들이다. 그여자들은 남편과 이혼했거나9(목마른 계절) 사별했거나(우리생애의 꽃) 남자가 떠나갔고(목숨, 피어라 수선화)아니면 남자를 떠나와서(흰 달)(그들이 사라진 저쪽) 혼자서 아이를 배고 있거나 키우고 있다.
남자없이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영구임대아파트의 밀린 임대료" "밀린 난방비" "무엇으로 양식을 살건가를 걱정하며 기름기가 모자라서 휘청이는 몸으로 겨울거리를 헤매기" "주부사원 모집 광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 목숨 붙이고 산다는 일의 끔찍함"이 아니겠는가. 역사의 갈피갈피마다 부당한 침략과 전쟁을 유독 많이 겪었고 거기에다 끈질기게 매달린 가난과 거북등처럼 견고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들의 한스러운 인생살이. 그런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에겐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라 가슴을 시리게 하는 것일까.
평범한 30대 전업주부인 나는 아직 보행기 신세를 못벗어나고있는 십개월된 딸애의 아우성과 투정을 들으며 기저귀를 주물럭거리며 이소설집을 읽었다. 아마도 작가의 독특한 체험이라고 여겨지는 한서린 삶의 모습들에 조금은 질리기도 하고 아주많이는 경의를 표하면서, 공선옥이 그리는 한이란 역사에 희생된 삶의 한이라고 거칠게 말할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것은 커다란 역사적 사건과 직접적으로는 연관이 없으면서도 그 역사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그러니까 주로 주변부의 삶을 살아온 한스런 여인들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리라)의 한이다.
목마른 계절에 나오는 "젖가슴이 커서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는" 수자씨의 표현을 빌면 " 역사는 귀신이여, 귀신은 상관있는놈도 물고 늘어지지만 상관있는 놈하고 끈이 맺어진 상관 없는 놈들도 끌고 가거든" 역사 귀신에 발목 잡힌 사람들의 이야기.
처음 읽었을 때보다 두 번째 읽었을 때 비로소 제대로 의미가 이해되던 우리생애의 꽃(이 작품은 근래 여러 문학상의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에서는 삼대에 걸친 여자들(어머니,나,딸)의 모습을 통해 지리멸렬한 일상의 황량함과 그속에서 " 우리 생애의 꽃"이라 이름붙일수 있는 일탈의 황홀함을 대비시키고 있다. 일상의 끈적한 힘에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강하게 묶여 있음을 여자로서의 여러 경험을 통해 절감 하고있던 나는, 불안하긴 하지만 일탈의 희열을 과감히 펼쳐보이는 작가가 조금은 부러웠다.
또하나 특이한 것은 이 작품집에서 그려내는 불행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단지 불행 자체를 정면에서 그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내 느낌으론 이 여자들은 어쩐지 " 바람불고 눈보라치는 생"을 기꺼이(?) 살아내고 참아내고 있는 것 같다. 남자가 떠나갔건 죽었건 공선옥의 여자들(!)은 각자 선자리에서 힘은 들어도 어린 자식들에게 생명줄을 걸고 씩씩하게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이들은 일상의 황량함속에서도 일탈의 욕망과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우리생애의 꽃) 자기 자식이 아닌 아이도 힘차게 끌어안기도 하는것이다(묵숨).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 실린 아홉편 소설의 결이 모두 같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읽으면서 때로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그것은 이 작가가 새롭게 뭔가를 시도하고 있는 과도기라는 늒미을 갖게 하는 두세편의 낯선 소설들 때문이었다. 등단 초반에 쓴것들은 "그해 오월"이 가져다준 비록 한수간이었지만 강렬했던 환희와 그 이후 일상의 고통과 왜곡을 조심스럽게 돌려 말함으로써 나같이 단정치 못한 독자들도 쉽게 그 세계에 공감하고 몰입하게 하였으나 최근작인(불탄자리에 무엇이 돋는가) (그들이 사라진 저쪽) (목포는 항구다)같은 작품ㅇㄹ 읽기에는 전문적인평론 식견이 없는 나로서는 조금 힘이 들었다는 고백을 하고싶다. 상황이 구체적이지 않은 데다가 관계 자체도 추상적이며 비애스런 분위기만 아스라이 혹은 지루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느낌은 전적으로 나 개인적인 것이다.
한 소설이 펼쳐내는 세계가 읽는이들로 하여금 세상살이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고 그 질문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한번쯤 진지하게 돌아보게 한다면 그소설은 충분히 좋은 작품이고 성공한 것이라는 내 평소의 어줍잖은 소설관에 비추어 본다면 공선옥의 (피어라 수선화)는? 이 소설집은 왠지 코끝을 찡하게 하는 밑바닥 인생들의 솔직한 삶과 이상하게도 따스한 슬픔이 어린 불행들을 통해 무디어진 나로 하여금 애잔한 추억들을 새삼 돌아보게 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를 어쩔수 없이 밟아온 사람들의 격렬한 고통 때문에? 아니면 암담한 인생살이에 찌든 인간들을 보여주는 공선옥의 삶에 대한 따스한 사랑의 눈빛 때문에? 하여간 한번쯤 조용히 공선옥의 쓸쓸한 세계에 빠져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감히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