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4 | [문화칼럼]
'思 삶'과 '忠 의 삶', 그 의미의 진실
제주 4.3항쟁을 맞아
고창훈 제주대교수 행정학과
(2004-02-05 14:58:27)
지금까지 제주4.3에 대하여 나타나는 중요한 이미지들은 처절하다는 것이었다. 80년대 많이 불려졌던 「잠들지 않는 남도」라는 노래가 그러하다. 89년 제주대학교 학생 연극패 연극 제목 「死 삶」 1992년 강요배 화가의 「제주도」라는 그림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여명의 눈동자」가 전하는 부분적인 학살의 상처. 93년 총학생회가 「死 삶」의 밧줄에 묶여 있는 제주도의 아픔을 드러내는 4.3문화상공모 포스터 등 모두가 제주의 「死 삶」의 한을 말하는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28만명이 살았던 1948년 제주도의 상황에서 5만명 안팎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다가설 때 누구에게나 깊은 슬픔과 소용돌이치듯 다가설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금 다가서는 분노는 야만의 학살로 파괴되는 인간의 삶과 헤체되어버린 공동체, 드디어 집단적인 4.3콤플렉스 중세에 걸릴 수 밖에 없는 살아남은자의 고통 분단시대 밑바닥에 깔려있는 「史 삶」의 비극성이 한꺼번에 우리들의 마음을 흔든다. 이러한 메시지들은 현기영의 소설『순이삼촌』이 제기한 「死 삶」의 참혹성을 넓히는 일이었다. 더욱이 1992년 4월 48년 동굴에서 학살당했던 11구의 시체가 불렀던 다랑쉬의 슬픈 노래는 「死 삶」의 총체성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다랑쉬의 슬픈 노래는 지나간 어제의 노래일 수만은 없었다. 그것은 불관용성(不管容性)시대의 「死 삶」을 역사적으로 고증함으로써 우리들에게 「思 삶」의 의미를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44년만에 죽은 자를 위해 장례식을 지내야 할때 문득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선조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동시에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죽어있는 자와 살아있는 자의 기적같은 만남의 쓰라림. 그들이 누워어있던 다랑쉬굴은 포크레인의 의해 파헤쳐지고, 그들의 슬픈 장례식은 그들의 뜻과는 달리 정부의 강요에 의해 화장하여 김녕 앞바다에 재가 뿌려지던 1992년 5월15일 「44년전이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구나. 그때의 기득권세력이 제주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면 오늘의 기득권 세력의 하나인 정부는 죽은자들의 장례식마저 온당하게 치루게 하지 않는구나」하는 절망감 같은 걸 느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4.3은 어제의 「死 삶」뿐만 아니라 오늘의 「思 삶」의 문제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오늘의 「思 삶」의 제주도민 모두가 생각하는 4.3에 대한 생각과 공감대에서 비롯된다. 1994년 4월 도민들이 재야단체 중심의 4.3추모제와 반공유족회 중심의 4.3위령제로 나뉘어 열리던 4.3행사를 하나로 합칠 것을 원하므로. 5.18과 마찬가지로, 양단체 공동으로 「46주기 제주4.3희생자 위령제」를 주최하고 제주도와 제주도의회가 후원하는 민관합동의 선례를 세운다. 이를 통하여 도민들은 가능한 부분에서 의견을 합치는 일이 제주4.3의 진상규명에 도움을 주리라는 사실, 이것이 「思 삶」의 의미일런지도 모른다. 가장 고난과 희생을 받았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불관용성(不管容性)의 정치상황에서 벌어졌던 야만적인 「死 삶」을 지적하고 밝힘으로써 정부가 보다 관용적(慣用的)인 문명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 「思 삶」의 관용성이리라는 생각을 한다.
「思 삶」의 해법이 「4.3특별법」의 제정에 있다면 「忠 삶」의 의미를 기록하는 과제는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4.3正史」의 편찬에 있을 것이다. 지난해 국사편찬위원회에 제주 4.3항쟁으로 표기하자는 제안이 있었을 때, 정치권이 흥분하면서 항쟁으로 표기하려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풍경을 바로 보면서 우리의 정치권은 아직도 역사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할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우울한 생각을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가, 일본의 지도층이 2차대전을 미화하려는 잘못된 역사인식을 통탄하면서 느끼는 갑갑함이, 우리나라의 정치권이 우리나라의 현대사 인식에서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생각에 이를 때 더욱 그러하다. 물론 우울한 생각더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도 있다. 갑오농민전쟁은 100년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동학란이라는 오명르 지우고 갑오농민전쟁으로 자리매김됨으로써 명칭상의 복권을 이루었기 때문에, 갑오농민전쟁의 집강소 행정의 소망을 잇는 제주4.3항쟁으로 자리매김되김 하기로 결정한 만큼 다음의 과제는 제주4.3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밑에 사람들이 저항하며 일구어낸 관용성의 정신이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는데는 어차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시인 이산하가 1986년 「한라산」이라는 장편서사시에서 4.3항쟁이라는 공개적인 문제제기가 있고 난 이후 지금까지의 연구는 제주 4.3에는 사회적인 삶의 의미를 묻는 의미가 있은 후에 처절한 「死 삶」의 고통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미군정 남쪽 정부에 대한 도전이라는 인식으로 인하여 억압을 받았고, 북쪽 정부가 세워지면서 무시되었던 상황이 4.3연구의 공백을 가져오게 하고 말았다. 그만큼 「忠 삶」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제대로 기록하고 평가하는 일은 보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할지도 모르며 통일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할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제주 4.3의 경우, 제주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제주도적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민족분단에 대한 반대라는 민족적 의미와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대한 도전이라는 국제적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어서 이다. 그만큼 해결의 단계는 두가지 차원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한국의 정부가 해결하는 단계라면, 그 다음 단계는 미국정부차원이나 유엔차원에서의 해결일 것이다.
얼마전 필자는 대만의 2.28를 연구하는 교수와 두 개의 항쟁에 대하여 의견을 나구게 되었다. 그때 대만 정부가 2.28항쟁과 대학살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희생자 한 사람에게 1억8천만원의 보상금을 주고 기념비 제막식까지 갖는다. 대만의 2.28의 경우 제주 4.3과 마찬가지로 1987년부터 문제가 제기되어, 2.28은 해결이 되는데 제주 4.3은 왜 해결되지 않는가 하는 이유를 묻게 된다. 그 중요한 이유는 국민의 힘이 커져서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만의 경우 대만 사람 대다수가 2.28항쟁을 합당하게 해결하여야 한다고 할뿐 더러, 그 해결책이 선거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면, 우리의 경우 87년 대통령선거에서 4.3문제의 해결을 제기한 이후 정치적 이슈 중의 하나 정도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부인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국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국민들의 정당한 요구에 근거한 관용성의 논리를 정부로 하여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 「思 삶」의 과제일 것이다.
또한 '대만의 경우 보상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2.28에 대한 연구열의가 적어져서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계승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는 대만학자의 걱정을 무심코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제주 4.3은 「死 삶」의 치유 「思 삶」의 관용성 그리고 「忠 삶」의 의미에 다가서야 제대로된 명예회복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