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4 | [세대횡단 문화읽기]
문인들의 지극한 사랑의 대항
전북의 사군자- 매화
이철량 전북대 교수 미술교육과
(2004-02-05 15:06:17)
매화는 아직 북풍의 찬바람이 채가지 않은 이른 봄에 꽃을 피워 그 어느 꽃보다 일찍 봄을 알린다. 채 눈이 녹기도전에 꽃을 피워 뭇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오는 매화는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의 한 상징으로 표현되어왔다. 특히 중국 북송시대(시인인 임보(林보 967-1028)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정원 가득히 매화를 심어놓고 학을 기르며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후 많은 문인들 사이에 매화는 지극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그리고 먹으로 그려지는 묵매화의 출발은 북송시대 화광산(華光山)의 증(憎) 화광중인(華光仲仁)이 달밤에 창문에 비친 매화나무의 그림자를 보고 그렸다는 이야기가 여러 기록에서 나타난다. 이무렵의 묵매는 비교적 사실적인 표현에 중시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묵매화 이전에는 여타의 사군자처럼 화조화의 일부로서 윤곽선을 긋고 안에 채색을 하는 방법으로 그려졌을 것으로 믿어진다. 어떻든 적어도 북송에서 시작된 묵매는 남송을 거치면서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묵매의 흐름이 고려에 전해지면서 묵죽과 함께 사대부들의 애호를 받게 된다. 고려시대의 작품이 남아있지 않아 그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려에서 이름난 묵매화가로 정지상(鄭知賞 ?-1135)과 차원조(1320-?)가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에 이어 사군자가 폭넓게 확대되며 특히 도화서(圖畵暑)화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필수 화목(畵目)이 된다. 이러한 예가 15세기 이후 조선 백자에까지 매화를 비롯한 사군자가 많이 나타난 점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묵매중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신사임당(1540-1551)의 화첩에 그려진 작은 묵매화들이 전한다. 그리고 이 그림들이 중국의 매화들과는 다른 양식의 건으로 이미 한국적 매화양식이 늘어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후 어몽룡(魚夢龍 1566-?) 허목(許穆 1595-1682) 오달제(吳達濟 1609-1637),조속(趙速 1595-1668), 조자운(趙之耘 1637-?)등이 있다. 이 무렵 공통된 특징은 매화꽃이 입체감을 보이며 화려해지고 굵은 둥치와 가느다란 가지의 대조등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리고 부드러운 담묵을 사용하여 비백으로된 고묵에 농묵으로 점을 찍어 대조를 극대화시키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후 후기에 오면 독보적 존재로 조희룡(趙凞龍 1797-1859)의 묵매를 만난다. 조희룡은 김정희 제자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매화에 있어서만은 대단한 걸작을 남겼다. 구도의 새로운 변화와 잔가지를 수없이 많이 그려 화려한 형식을 이루어냈다. 조선 말기에 오면 사군자화는 널리 보편화되며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양기훈(楊基熏 1843-?), 조석진(趙錫晉 1853-1920)등과 허련(許鍊 1809-1892), 강진희(姜進熙 1851-1919)등이 매화를 많이 그린 작가들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말기에 오면 중국 남종화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인하여 화본식의 매화그림이 그려지는 아쉬움이 남기고 있다.
전북의 매화그림도 사군자의 다른 화목들과 함께 폼넑게 그려졌으나 조선말기적 흐름의 큰 테두리를 벗어나 있지 않다. 말하자면 조희룡과 같은 역동적이고 화려한 표현이 쇄퇴하고 말기의 양식화의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필자의 부족한 자료를 토대로 한 전북의 매화는 어떤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였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다만 묵법이나 필법에 앞서 지적한데로 중국 남종화의 큰 테두리안에서 각기 성격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여진다. 전북의 매화그림중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간 거으로는 이덕익(李德益 1604-?)의 매화쌍작도를 들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은 문화저널 71호 참조)다음으로는 이지역의 문인화 대표적인 작가로 지목되는 이정직과 송태회(宋泰會 1972-1941), 이광열(李光烈 1895-1966), 강동희(姜東晞 1886-1963) 서병갑(徐炳甲 1900-1938)등이 매화를 잘그린 작가들로 꼽힌다.
이정직은 이미 설명되어 진데로 사군자뿐만 아니라 문인화 전반에 걸쳐 걸출한 작가였다. 그는 당대의 제일가는 유학자였는데 북경등지를 여행하여 얻은 신구학문에 대한 높은 식견은 많은 후배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묵죽, 묵란을 비롯하여 묵매에 있어서도 그의 묵법과 가지묘사가 후배들의 작품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정직의 묵화는 세련되고 격조 높은 필묵의 운영이 완벽한 구성력과 함께 가히 전북지역의 대표적 작가로 지목되는데 손색이 없다. 다음으로는 걸출한 묵매화를 남긴 송태희를 들수 있다. 그의 작품의 기본적인 감각은 이정직의 묵매를 연상시키나 이정직보다는 묵이 강하고 필세가 훨씬 대담하고 극적인 반전 효과를 즐기고 있는데 고목의 늙은 동치에서 뻗어나간 가지들이 직각을 이루며 점차 화면 중앙으로 상승하고 있는 모습에서 송태희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느끼게 된다. 둥치에 무수히 찍어 나간 태점과 매화의 사실감보다 필의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에서 구한말 묵화의 성격을 읽게한다. 그런가 하면 서병갑은 묵법과 필법에서 송태희를 연상시키는 일면이 없지 않으나 고목둥치의 한가운데를 하얗게 남기는 독특한 표현법을 쓰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유영완에게서도 보이는데 아마도 서병갑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이광열의 매화는 수직으로 쭉 뻗어올라간 늙은 둥치와 끝부분에 촘촘히 붙어있는 가지가 당차고 고고하게 그려져 있다. 끝이 잘려나간 가지들이 모진 풍상에 시달려 모두 밑으로 늘어져 있는 모습에서 세파를 견디어 내는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고 있다. 담묵과 농묵의 사용이 대단히 원활하게 조화되고 있으며 많지 않은 꽃송이의 작고 앙징스러운 표현은 이정직을 연상시킨다.
강동회의 매화는 앞선 작가들과는 표현이 다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강동회는 호를 오당(吾黨)또는 초연제(超然齊)라고 한다. 김제에서 나고 구한말에 주사(主事)로 출발한 관리생활을 30여년동안 지속하면서 틈틈이 묵화에 열중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글들은 초연제 미정고(超然齊未定稿)로 간행되었다. 그는 그림공부를 이정직에게서 사사했다. 그러나 여기에 소개되는 그림은 이정직과는 다른 표현을 하고 있다. 늙은 둥치는 변화가 전혀 없는 농묵으로 비스듬한 대각선으로 배치하고 쭉쭉 뻗어나간 가지가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가늘고 길게 뽑은 선미(線美)의 효과와 화면의 공간을 남김없이 활용하고 있는 점이 강동희 매화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등걸에 찍은 태점이나 가지불임이 다소 양식화의 단점이 보이나 이지역의 걸출한 매화작가로 꼽힐만하다.
사군자중에서 매화는 죽이나 난만큼 많이 그려지지는 않았으나 꾸준하게 선비들의 글방에서 애호를 받았던 화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