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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4 | [문화칼럼]
남원지역 동학농민 혁명 실상이 담겨있다. 『종리원사 부동학사』와 『순교약력』
이진영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조교 (2004-02-05 15:21:12)
남원은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동학이 전파된 곳이고,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의 주둔지로서 어떤 지역보다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이 지역의 동학은 어땠고 어떻게 변천되었을까, 갑오년 당시 (조선정부로서는) 김개남(남원)만 귀화하면 나머지는 걱정할 것 없다 할만큼 활발했던 남원지역의 농민군 활동은 어땠을까, 그러한 남원의 동학과 농민혁명을 이끈 이들은 누구이고 어떤 사람들일까,를 밝히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따. 그러나 농민혁명 백주년이 지난 현재에도 어느 것 시원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나무언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남원에서의 동학과 농민혁명, 그것을 주도한 인물들의 면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남원군 종리원사 부동학사』와 『순교약력』이 발굴 공개되었다(소장자:남원대접주 김홍기(金洪基)의 증손자 김동규(金東圭)씨, 비록 구슬을 바탕으로 한 만큼 일부 잘못된 내용도 눈에 띄지만, 이 자료들은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실상을 알 수 없었던 남원과 전라좌도 일부지역의 동학과 농민혁명 연구에 커다란 활력을 주리라 생각된다. 1.『종리원사 부동학사』 『종리원사 부동학사』는 1926년에 남원군 주임종리사(主任宗理師) 최병현(崔炳鉉)이, 갑오년 당시의 남원지역 동학지도자 유태홍(柳泰洪)의 구술(口述)을 바탕으로 남원에서의 동학의 내력을 기록한 책이다. 그 내용은 1861년 수운 최제우(崔濟愚)의 남원 은적암(隱跡庵)수행시기로부터 1926년까지에 걸쳐 있는데, 이 책의 후반부에는 「남원군동학사」라느 별도의 제목하에 최제우의 은적암 수행부터 동학농민혁명까지의 내용이 좀 더 자세히 기록되어있어 그러므로 우선「남원군동학사」에서 주목되는 내용을 간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최제우의 은적암 수행:1860년 최제우가 경주에서 포덕(布德)을 시작한 후 관(官)의 지목으로 피해 남원으로 온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제우가 남원에 온 이후 은적암에 자리잡는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남원군동학사」는 이 대목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1861년 6월에 대신사(大神師)가 호남으로 갔는데 남원군 남문밖 광한루 아래 오작교 근처의 서형칠(徐亨七)집에 도착해서 며칠을 머물었다. 그런데 그 집은 약방이어서 번잡하므로 인근에 있는 서형칠의 생질 공창윤(孔昌允)집에 머물며 서형칠 공창윤 양형숙 양국삼 서공서 이경구 양득삼 등에게 전도하였다. 그해 가을에 대신사가 은적암(은적암은 남원군내 서쪽으로 십리쯤에 있는 교룡산성(蛟龍山城) 덕밀암( 密庵)안의 대신사가 머물렀던 방의 이름)에가서 도를 닦으며 겨울을 지내고 (동학)가사를 지어 각지의 문도(聞道)에게 보내었다. 1862년 봄에 대신사가 은적암에서 경주로 돌아간 후에도 서형칠 양형숙 서공서 등이 용담정에 다니면서(동학의) 도맥(道脈)을 통하다가 1864년 봄에 대신사가 참변을 당한 이후 은복(隱伏)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원에서의 수운의 행적과 이때 이미 적지 않은 남원의 인문들이 동학에 입도하여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2)공중집회에서 금구집회까지:갑오년 직전, 1892년에서 1893년 사이 동학교단은 동학을 공인받기 위한 일환으로 여러차례에 걸쳐 대신사 신원운도을 전개하였다.이 시누언운동은 공인받기 위한 동학교단의 운동이며 동시에 이를 명분으로 관에 집단으로 저항했던 민중운동이었다. 따라서 농민혁명의 전단계 역사로서 그동안 많은 주목을 받아왔고 동학교단측의 자료에도 그 과정이 잘 그려져있다. 그러나 이 집회운도응ㄹ 주도한 서인주(徐仁周)등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적이 없었는데, 「남원군동학사」는 삼례집회시 서인주가 집회민을 대표하여 '전라감영의 영장(營將) 김시풍(金始豊)과 담판' 하는 내용 등을 소개하고 있다. 삼례집회의 경과와 성격, 동학지도자 서인주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본다. 또한 「남원동학사」는, 농민혁명전단계의 사건으로서 크게 주목받아 왔으나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했던 '금구집회'세력의 활동과 해산을 소개하고 있다. 금구집회 세력의 실체와 집회적 성격, 그리고 농민혁명 직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3)고부봉기에서 전봉준의 최후까지 「남원동학사」는 고부농민봉기에서부터 전봉준의 최후까지 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농민군이 황룡촌 전투에서 사용했던 장태의 모습으로 「남원군동학사」에 의하면 농민군은 장태 7개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장태는 '길이는 21척이오 높이는 7척인데 , 양쪽 머리에 십자형 전륜(轉輪)을 하고 통안에 마룻대를 가로질러 얽어서' 만든 것이었다. 또 여기에는 남원 '집강소'(창의사무소)의 모습도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남원 '집강소'에 대해 '가군의 집강소에 집강(執綱)의 직임을 두었는데 김개남의 남원군에 와서 오영(五營)을 설립하고 49일 머물면서 영(營)마다 일원장(一元將) 이원장(二元將)군수군(軍守軍)영군(榮軍)의 직임을 두고 또 성찰(省察) 통찰(通察)수십인씩을 두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집강소 기간 김개남의 남원 경영의 양상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기간에 농민군이 나름의 편제하에 농민군을 편성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재봉기를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농민혁명사 관련해서 남원군동학사는 이외에도 전봉준의 나주 운봉 담판, 김개남과 박봉양의 대립, 9월 재봉기 직전에비밀상의 사실, 김개남 북상 후 남원농민군과 민보군의 전투, 전봉준의 최후모습 등에 대해 적고 있다. 한편 『종리원사부동학사』에는 남원군동학사의 내용이 요약되어 있고, 여기에 더하여 농민혁명 직푸 남원에서 전개되었던 동학교단의 재건 노력과 재건과정이 잘 그려져 있다. 특히 맨 끝에는 1908년-1926년까지의 남원군종리원 임원의 직책과 명단, 남원내 각 면단위 종리원임원의 직책과 명단이 정리되어 있고, 이와 함께 운봉과 구례교구의 역사와 임원명단도 부록으로 정리되어 있다. 농민혁명 이후 남원 운봉 구례에서의 동학교단의 활동과 그 인물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현재 이것이 유일하다. 2.『순교약력』 『순교약력』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그 직후 체포되어 처형된 남원출신의 인물(41명)과 농민혁명 이후 동학교단 내에서 활약하다가 사망한 남원출신의 인물들(47명)의 약전(略傳)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갑오년에 사망한 이들에 관한 기록인데, 여기에는 김홍기, 박중래, 황내문,등 유명접주들의 출생/거주지 동학 입교시기/연원(淵源)/지위/활동내ㅔ용/체포과정 등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예를 들어 김홍기의 경우, 그는 남원의 대표적인 농민군 지도자였는데도 그의 인적사항과 활동내용에 대해서는 그동안 거의알 수 없었다. 그런데 『순교약력』은 김홍기에 대해 자는 경홍(慶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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