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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5 | [문화와사람]
'히다 겨운 옥빛'으로 승화된 일흘 여덟해 소리인생 국창 김소희 선생의 생애와 예술
문화저널(2004-02-05 15:33:03)
그날, 만정이 고향땅을 찾았던 날. 하늘을 가린 비바람이 땅을 일으켜 세웠다. 고향을 떠나간지 수십해. 만정은 그렇게 눈물과 억겁의 세월을 우리앞에 쏟아놓았다. 그가 그리워하던 고창 선운사에는 붉은 동백이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지난 4월 17일 빛나는 한 예술인을 잃었다. 일흔 여덟해. 그 한많은 삶과 치열한 예술혼을 소리길에 고스란히 바쳤던 國唱 金素姬 선생. "히다 겨운 옥빛"으로 승화된 그의 소리는 더 이상 그 청아한 모습과 함께 우리들을 찾지 못한다. 지난 28일 지병으로 앓아오던 간경화증이 악화돼 서울 제일병원에 입원했던 만정은 지난단 17일 밤 9일 35분께 한많은 소리길과의 인연을 매듭지었다. 쪽진 머리에 옥색 치마 저고리를 즐겨입던, 나이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곱기 고운 자태로 늘상 뭇사람들의 시설을 모아내던 만정은 이제 그 청아한 소리속을 그 세상에 남겨 둔 채 길을 떠났다. 나이 열세살에 소리길에 들어서 꼭 예순다섯해를 우리 소리에 고스란히 바쳤던 만정은 지난했던 삶의 한복판을 소리로 채워낸 원로 국악인이었다. 1917년 11월 고창군 홍덕면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우리 국악사의 음양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전남여자보통학교 시절, 이화중선의 <추월만정>에 매료돼 소리길에 들어선 그는 송만정, 정정렬, 박동실 등 당대의 내노라하는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받으면서 타고난 재질을 인정받았다. 그의 천재적인 기예는 춤과 가야금 양금 등에서도 발휘되었다. 어린시절부터 '소녀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던 만정은 워낙 타고난 목이 좋은데다 예술적 재질과 영특함으로 사설을 외우는 일 또한 탁월했다. 감수성도 예민해서 스승의 소리를 받는데는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그는 서울로 올라가 한성준의 지원으로 경성방송국에 데뷔했다. 방송 출연과 일본 공연 등으로 소리의 전성기를 맞은 만정은 열아홉살에 일본 빅터 오케이레코드사에 전속되어 '춘향전 전집'을 취입했다. 해방이 된 이후 국악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 기관 설립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그는 54년 다른 국악인들과 함께 사재를 털어 국악예술원의 전신인 민속예술원을 설립, 초대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의 국악을 향한 애정과 고집스러움을 이미 알만한 사람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치열했던 예술세계와 경지는 연륜이 더해질수록 돋보였고 그에 대한 평가는 집중되기 시작했다. 63년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은 이후 국민훈장,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제 40회 서울시 문화상, 그리고 제 1회 동리 대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이 그에게 돌려졌다. 60해를 넘는 동안 이어졌던 그의 공연 활동도 남달랐다. 미국 카네기홀(72년)을 비롯 그가 섰던 국내 국외무대는 일일이 셀 수 조차 없다. 국악협회 이사장을 맡아 국악인들의 대모 노릇도 훌륭하게 치렀던 그의 삶은 거의 전설적이다. 이미 간경화증의 진단을 받고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국악 모임이나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는 시간을 늦추지 않았던 만정은 늘상 청아한 모습으로 바쁜걸음을 몰고 다녔다. 그의 걸음마다에는 우리 국악사의 호흡이 물론 함께 있었다. 그는 판소리계에서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천부적 재질을 공인(?)받은 명창이었다. 명창 송만갑의 사랑과 기대를 받으며 소리길의 바탕을 닦은 뒤 당대의 내노라 하는 명창들의 가르침과 기대와 칭송속에서 성장한 그는 자신이 지닌 타고난 목으로 우리 판소리의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경지의 소리속을 이루었다. 판소리가 민중들의 정서를 대표하는 민중의 소리이기는 하지만 만정 김소희 선생의 소리는 또다른 경지의 독창적인 소리로도 일가를 이루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평가였다. 그의 소리에 관한 인식은 남달랐다. 그는 판소리의 민중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기품을 철저하게 가렸다. 판소리를 즐기는 민중들의 정서를 존중하면서도 소리의 품위나 그 정서를 고상하게 지키고자했던 만정은 자세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워낙 타고한 소리 또한 품위있도 우아한 소리였다. 때문에 그의 소리의 특징은 장중하고 우아한 것이 특징이었다. 절제되고 우아한 소리속의 바탕은 서편제의 맥을 이어온 바탕에 힘입어 더욱 정제되고 우아한 미학적 차원으로 발전됐다. 그 소리는 통성으로 전력을 다하는 절규의 색채를 담은 동편제 소리의 그것과는 또다른 맛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앗았다. 또한 같은 서편제라 하더라도 그의 소리는 민중적이기 보다는 양반계층의 미의식을 사로잡는 소리의 기품으로 예술성을 발휘해냈다. 그는 당대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천부적 재질의 소리꾼으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소리에 대한 욕심은 각별했다. 그 치열했던 예술적 완성도를 위한 노력과 집념이 있었기에 국창 김소희는 자랑스럽게 우리 예술사에 우뚝 섰을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국악인들에게는 늘상 자랑스러웠던 스승이자 원로 선배로, 국민들에게는 탁월한 예술인으로 서있던 그를 우리는 국창이라 불렀다. 수많은 명창들이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다갔고 또한 적지 않은 소리 명창들이 오늘의 소리판을 아우프며 활동하고 있지만 그들중 「國唱」이란 칭호로 예술적 기량을 인정받았거나 바고 있는 명창들은 많지 않다. 「名唱」과「國唱」의 차이를 굳이 가리자면은 딱히 내세워질 수 있는 근거는 막막하지만 「국창」의 의미는 「명창」만으로는 그의 예술세계와 생애를 가늠하는데 도저히 충분하지 않은,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된 것일 터이다. 오늘의 국악사 거목으로 우뚝 서있던 김소희 선생을 사람들은 「국창」으로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국창」이란 칭호는 오늘의 판소리판에서 소리의 기량을 인정하는 의미의 「명창」과는 분명히 차원이 달리하는 우위의 것임에 틀림없다. 「국창」의 반열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리길에의 외길 인생은 치열했다. 제자 후배들에게는 늘상 단호하고 준엄했으나 한편으로는 따뜻함을 잃지 않았던 만정은 그의 의지와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국악인으로 내세워졌다. 탁월한 예술세계의 경지로서는 물론이었거니와 국악의 교육적 체계를 자리 잡게 하는데에도 그는 산증인이자, 주역이었으며 국악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예술인으로스 제대로 대우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데에도, 또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고 힘을 모아 우리 음악을 보급시키는 일에도 나이를 잃고 뛰었던 열정적인 예인이었다. 굳이 미국의 카네기홀에서의 공연을 들먹이지 않고도 그의 공연 역량은 이미 일정한 차원을 넘어섰으며 우리 예술의 극치를 세계적으로 돋보였던 한시대의 예인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국악 행사가 치러지는 어느곳에서든 만날 수 있었던 만정을 대할 수 없다. 곱디 고운 자태의 살풀이 춤사위는 더구나 볼 수 없다. 만정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국악인들만의 몫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쉽게 만날 수 없는 탁월했던 천재적 예술인을 잃었다. 지난 79년 고향을 떠나있은지 이미 오래인 그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고창사람들은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려 고창읍 입구 새마을 공원에 국창 김소희비를 세웠다. 그 뒷면에 같은 고향 출신인 미당 서정주가 새긴 비문은 이제 그에게 보내는 헌사가 되었다. "만정 그대의 노래소리에는 고창 홍덕의 옛날 못물에 몇만년 이어 핀 연꽃이 들어 있도다. 학같이 훤출하고 거북이처럼 질기던 이 겨레의 바른 숨결이 잠겨 있도다. 만정 그대의 노래소리에는 고려 청자의 쑥물 든 하늘빛과 이조 백자의 히다 겨운 옥빛이 안끝나게 안끝나게 어려 있도다. 누간가가 강렬히 이어가야할 이나라의 큰 곡절이 배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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