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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5 | [문화저널]
그 동굴에서의 잊을 수 없는 노래 한가닥
김자연 아동문학가 (2004-02-05 15:41:15)
푸른 바다와 유채꽃, 억새풀의 아우성이 톳나물처럼 칼칼하게 가슴을 긁어대던 제주도, 그 동굴의 잊을 수 없는 노래 한 가락! 해방 50주년을 맞아 기획된 통일염원의 길맞이, 제주도 답사에 오르게 된 나의 마음은 풋풋한 설레임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오래전부터 시행해 오고 있던 나의 '우리 역사 제대로 알기 작업'에, 4·3항쟁의 역사적 현장을 중점적으로 돌아 본다는 이번 백제 기행의 목적이 또다른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불안했던 전날의 날씨가 백제기행을 떠나는 날에는 반갑게도 화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금은 들뜬 모습들! 처음으로 백제기행에 동참한 나에게는 대부분이 낯선 얼굴이지만, 그 낯설음은 곧이어 펼안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같은 목적으로 만난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교류 때문이리라. 차 안에서 자기 소개를 하며, 아직은 쌀쌀한 봄바람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도로를 따라 1시간 20분 후에 광주 공항에 도착했다. 그것에서 6시에 떠나기로 되어있던 대한항공 KE 425 비행기는 기상관계로 30분 후이 6시 30분에 떠나게 되었는데, 덕분에 여분의 시간동안 담소를 나누며 서로의 얼굴을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잠시 멍헌 방심 상태에 몸을 맡기고 있었는데 별안간 기체가 덜컹해서 눈을 떠보니 제주공항이었다'는 <순이삼촌>에서처럼 정말 오렌지 쥬스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대합실을 빠져 나오며 처음으로 바라 본 제주의 저녁 하늘은 묘하게도 짙은 하늘 색이었다. 갈등의 색깔이라 해서 앞으로 재소자의 제복도 다른 색으로 바꾸기로 했다는 그 짙은 하늘색! 그 때 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제주도의 역사는 진실과 장애물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개나리꽃 바탕에 빨간 줄이 그어진 50여명을 태운 버스는 5단 기어의 콧김을 간간이 품어 가며, 한라산 중턱에 있는 YMCA 수련장으로 달렸다. 2층 회색 걸물이 어둠속에서 씩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출출한 시장기가 발동하여 짐 보따리를 풀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갔다. 본능적인 식욕!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처럼 드문드문 놓여진 옥돔 구이와 희끗하게 무쳐진 유채김밥에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새 버스안에서 사귄 언니와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나누어 마시고 나니, 눌려 있던 기운이 새로이 솟아나 만사가 오케이였다. 발랄한 세 천사의 유쾌한 웃음속에서 잠깐의 시간을 가진 다음, 9시 30분 제주대 행정학 교수인 고창훈 선생의 「해방공간의 현대사와 4·3항쟁」강연을 닫기 위해 강연장으로 올라갔다. 이데올로기의 자유 선택이 가능했던 역사적 상황, 일제 식민지 잔재의 청산을 비롯한 토지개혁의 문제, 외세의 개입, 허준의 <殘燈>과 김동리의 <穴居部族>에서 나타나는 해외로부터의 귀국 등.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피로 얼룩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4·3. 그는 제주의 4·3은 「死 .삶」의 치유, 「思 .삶」의 관용성과 「史 .삶」의 의미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4·3은 한마디로 미군정 아래에서 우리 민족이 안고 있었던 집약적 모순이 빚어낸 역사적인 사건이므로 이것을 단순히 '제주도 사건' 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는 제민일보 양조훈씨의 말이 생각났다. 28만이 살았던 당시 제주도의 상황에서 3만이 넘는 사람의 죽음! 그런데도 40여년동안 4·3의 해명작업에 대해 감히 끄집어 낼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아침 8시. 밝은 햇살 속에 다소곳이 얼굴이 내민 춘백(동백)의 미소를 받으며, 버스에 또다시 육지 사람에게 제주의 역사를 알리려는 사명감으로, 회색빛 기어를 좌우로 크게 제쳤다. 흐드러진 억새와 칙칙한 현무암, 여인의 둔부처럼 유연한 선을 지닌 오름들! 제주도는 어미산이라 불리는 한라산과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360개의 자식들(이것을 오름이라 부름)이 있는데, 상황이 어려웠을 때는 80개의 오름에 봉화를 던져 서로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오늘의 답사 일정은 동광리와 큰넓궤, 추사 적거지 및 삼의사비, 백조일손지묘, 현기영님의 문학강연등으로 되어 있었는데, 안내는 민간단체인 제주도 4·3 연구소에 계시는 강태권 선생님이 맡아 주셨다. 오르막 길에서 시동없이 차가 올라가는 도깨비 길(순간적인 착시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함)을 넘으니, 대머리에 성긴 머리카락 서있듯 키가 작은 삼나무들이 섬머슴아처럼 바람에 데면데면 고개를 조악거렸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낙동강 오리알처럼 외떨이진 산방산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방산 외벽이 풍화작용에 의한 침식으로 테격테격하면서도 우련우련한 맵시가 독특한 맛을 느끼게 하였다. 제주도는 말 그대로 돌이 많았다. 밭고랑에도 돌, 억새 밑둥에도 성금성금 돌이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집 근처에 있는 무덤 주위도 화산재같이 딱딱하고 시커먼 돌을 보호막처럼 빙 쌓아 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방목하는 말들이 쉽게 넘을 수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무덤 입구에는 돌로 만든 작은 문이 있었는데 사자(死者)에게도 집 구조가 있다고 믿는 민간싱앙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아직 초목이 태동하지 않은, 청회색 돌과 돌로 이어지는 제주도, 그래서인지 제주의 사월은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지 않고 사는 사람의 마음처럼 황량하고 넓어 보였다. 드디어 큰넓궤가 있는 동광리에 도착했다. 동광리는 안덕면 서북쪽 해발 300미터에 위치한 산간 마을로 예부터 '부등이왓'이라 불렀다고 한다. 300여년전, 관의 침탈로 쫓겨온 화전민들이 마을을 이루어 화전과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한 이 마을은 조선 말기에 관의 침탈에 항거하여 농민봉기를 일으킨 진원지이기도 하다. '해방은 공출이 없는 세상' 이라고 믿었던 무등이왓 사람들은 1946년 미군정의 공물수집 정책에 주민 모두가 항의하여 보리공출을 반대했고, 그후 군경의 탄압이 가해지자 마을청장년 대부분이 산으로 피했다. 그러나 집요한 토벌과 학살을 피해 오름과 굴을 전전하던 주민들은 추위와 굶주림, 무차별한 학살로 모두 죽었다고 한다. 큰넓궤로 가는 길은 황량한 들판이었다. 문어발처럼 감겨오는 지독한 바람에 일행 모두는 장갑과 모자를 뒤집어 쓰고 안내자를 따라 앞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키 작은 맹감나무와 찔레꽃 덤풀이 손님을 맞이한 냥 옆구리를 간간이 찌르고, 자유롭게 널려 있는 회색빛 현무암과 말라버린 말똥을 바라보며 제주에 사는 사람조차도 그 위치를 잘 모른다는 큰넓게 입구에 도착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큰넓궤의 입구는 겨우 사람 하나 엎드려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이 굴은 동광리에서 서북쪽으로 2.5키로에 위치한 천연동굴로, 1948년 4·3당시 이 마을 사람 120여명이 토벌을 피해 56060일 동안 숨어 살았던 곳이다. 나중에 토벌대에 발견되었으나, 도을악에 사는 유격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주민들은 다시 15미터 떨어진 한라산 영실 근처 볼래오름까지 피신하였지만, 대부분 잡혀서 그새 12월 24일 정방폭포 근처에서 모조리 총살당했다고 한다. 그 때 죽은 시체는 바다로 떠내려가 유족들이 시신을 찾지 못하고 다만 1년이 지난후, 원혼만을 불러다가 마을 근처에 봉문만을 많들어 놓았는데 이를 '헛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굴이 좁으니 특히 머리를 조심하라는 안내자의 주의사항을 꼭꼭 새겨 들으며, 각자 촛불 하나씩을 움켜쥔 채 두려움반 호기심반으로 굴 속으로 들어갔다. 굴속은 불지 않은 풍선같았다. 조금은 넓었다가 이내 풍선 주둥이처럼 좁고 긴 터널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좁은 곳은 아예 두더쥐처럼 기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사방이 온통 딱딱하면서도 울퉁불퉁한 흑갈색의 화산회토로 되어 있는데다, 잠시 방심하면 앞 사람의 엉덩이를 들이받는다는 긴장된 행보에 오히려 머리와 무릎이 자주 부딪쳐 얼얼했다. 유격훈련이 따로 없는 것 같았다. 마침내 큰넓궤 도착! 120명이 60일 동안이나 이렇게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웅그리고 살았다니! 새삼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에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안내자의 말에 따라 촛불을 모두 끄고 나니 옆사람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만큼 어두웠다. 이어 들려오는 안내자의 말, "옆사람도 알아 볼 수 없는 이 칠흙 같은 어두움. 바로 이 어둠이 지금까지의 제주도의 역사였다. 서로 손을 잡으면 어두움속에서도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러한 힘으로 역사의 어둠을 벗겨야 한다. 이제 제주도 사람은 서로 손을 잡기 시작했다." 4·3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롭게 인식시켜준 말이었다. 이어 마주잡은 손과 손으로 전해지던 체온속에서 '인간은 혼자보다는 더불어 함께 했을 때에 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존재' 라는 것을 확인했다. 바람 때문에 제대로 키가 크지 못한 제비꽃고 할미꽃을 뒤로 하고 다음으로 위가 찾은 곳은 추사 거적지였다. 차사 거적지는 조선시대 현종 6년인 1840년에 추사 김정희가 유배되어 와 기거 했던 곳으로, 내가 퍽이나 좋아하는 세한도가 그곳에서 그려졌다니 감회가 남달랐다. 마당에 피어 있는 청연한 수선화와 물하루방 위로 그 옛날의 추사의 숨결 한 조각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차사 거적지에서 나와 한 모퉁이를 돌아가는 길목에 대정 삼의사비가 세워져 있었다. 삼의사비는 신축년 농민항쟁의 세 장두인 이제수, 오대현, 강우백을 위해 봉기 진원지인 대정에 세워 놓은 비석인데, 너무 소홀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 같았다. 점심후, 야외에서 들으려 했던 현기영님의 문학강연은 거친 바람으로 실내에서 행해졌는데, 오전의 힘들었던 큰넓궤 답사로 인한 피곤과 점심수의 시곤증이 겹쳐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백제기행의 식구들을 위해 서울에서 오신 분의 강의인지라 결코 소홀히 듣지 않으려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그는 제주도의 역사를 공동체 의식을 통해 설명해 나갔다. 해방만 되면 모든 것이 해방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열병으로 인하여 인심은 극도로 흉흉해지고, 일본에서 건너온 노동자들의 자기 권익보호 의식이 점차 해방공간에 유입되었던 상황, 제주도 특우의 한배의식과 생존권을 위한 절박한 몸짓을 문학적인 차원에서 설명해 주었다. dlj한 것은, 그의 소드방놀이 도령나루의 까마귀, 순이 삼촌등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바람 바라마 바람. 바람을 저어가며 다다른 곳은 백조일손지묘였다. 백조일손지묘는 한국전쟁 당시 발발직후 예비검속으로 검거되어 섯알 오름에서 학살된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사방이 50미터가 족히 넘어보이고, 깊이가 4-5미터가량의 타원형으로 되어 있었다. 정부는 6.25가 발발하자 무고한 양민들의 보도연맹원과 4·3항쟁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많은 사람들을 다시 '예비검속'이란 명분으로 검거하여 학살했다. 당시 희생자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군경은 검속자들을 배에 싣고 한바다에 나가서 돌덩이를 매달고 수장시켜버리기도 하고 총살하기도 했다고 한다. 섯알 오름에서 학살된 죽은 사람의 시체는 나중에는 살이 문드러져 진흙처럼 흘러내려 주구의 시신인지 구분할 수 없어서, 넓은 묘역에 애기무덤만한 봉분을 쌓아 놓고 비석을 세웠다가 하니 가히 그 때의 참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백조일손지묘를 돌아나오는 길에 200여명의 대학살지인 섯알 오름의 탄약고(그 당시에는 고구마 창고)를 드렸다. 모두 사뭇 진지한 얼굴들! 파를 심어 놓은 밭고랑 사이로 어린 풀과 쑥들이 낯선 발자국 소리에 삐죽이 고개를 들고 저희들끼리 수런수런거렸다. 바람이 몰아치는대로 몸을 움직이지 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 풀들을 바라보자 김수영의 「풀」이란 시가 떠올랐다. 안내자의 말 한 마디 한마디를 새겨 들으며 억새숲을 지나 상모리 산이수동에 있는 180미터 송악산 봉우리를 밟으니, 등허리로 후끈하게 달아오른 열기를 느꼈다. 날아갈듯한 바람에 잠깐 이마의 땀을 식히고 눈을 크게 뜨자, 서북쪽의 평평한 초원지대와 해안선과 연결된 대정읍이 한눈에 다가와 안겼다. 바람에 떠밀리듯 작은 능선을 타고 아슬아슬 미끄럼타듯 해안가로 내려오니, 절벽에는 일제 때 일본군이 뚫어놓은 군사용 동굴이 여러개 있어 지난날의 아른 우리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착찹한 마음을 달리며 뒤로 돌아서는 순간, 노란 유채꽃 무리가 끝없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원혼들의 넋이라고 말하던 그 유채꽃! 그 숨막히게 피어 있는 유채밭을 배경으로, 한방에 동숙했던 8명은 정을 유별나게 티내며 카메라 렌즈속으로 찰칵찰칵 들어갔다. 저녁에 마려한 다과시간에 젊은 오빠의 재치스러운 말담과 노래에 온 몸을 엄습해 오던 피곤을 털어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뒤 전주로 돌아가는 아침을 맞이했다. 4월 3일의 여정은 9시간이 소요되는 한라산 등반과 4·3기념행사와 성산 일출봉을 돌아보는 두가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17명이 한라산 등반에 오르고 나머지 일행은 자연사 박물관으로 향했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제주의 독특한 유물과 동·식물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는데, 특히 민속 전시실에는 제주의 모속 신앙인 영등굿(해녀굿, 잠수굿), 칠머리당굿, 영감놀이등이 소개되어 있었고, 떼배, 제주의 전통 초가집을 재현해 놓았다. 그리고 감으로 물을 들여 만든 갈중이 갈적삼등과, 연자방아, 멀허벅 돌하루방이 제주도에 왔다갔다는 것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4·3기념 행사가 시작된 오전 11시. 탑동농장은 샛노란 유채꽃이 4·3항쟁의 위패에 반사되어 숙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곳에서 행정고시에 합격하고도 4·3으로 인한 연좌죄에 묶에 한 평생을 제주도에 내려와 땅을 파며 살고 있는 북제주군 예월읍에 산다는 백상훈씨의 말에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4·3의 역사적 의미가 올바로 세워질때까지 한 시민으로서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아저씨의 말에 제주도의 희망을 느꼈다. 제주 역사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며 돌아오는 광장에는 저혼자 씨를 뿌리는, 놘 광장에는 저혼자 씨를 뿌리는, 노란 민들레가 바람에 몸을 뒤척이며 탑동광장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완만한 해안선을 따라 10여분 달렸을까? 차창 너머로 보이는 제주의 아름다운 옥빛 물결에 야! 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태국의 파타야나 하와이, 괌 등 이름있는 휴양지 못지 않은 물빛이었다. 만일 제주도가 상하(常夏)의 섬이었다면 정말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간직한채, 반원형의 해안선을 돌아 십여분을 달려가니, 제주도의 동쪽 끄트머리에 우뚝 솟은 성산일출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출봉은 제주도 대륙 형성이전에 바다속에서 분출하여 생성되었다고 하는데 동남북쪽의 외벽은 바닷물에 의해 빙벽같이 날카롭게 깎아내린 절벽이고 서북면만이 유연한 능선으로 성산 마을과 연결되어 있었다. 잘 다듬어진 능선을 따라 돌 계단을 올라가면 178미터의 일출봉 정수리에 다다랐다. 주변 해안에서 미려오는 파도와 작아진 마을의 지붕들이 모형으로 만든 장난감 마을처럼 정답게 살아왔다. 3만평이 넘는 갈색의 들판과 깊이가 100미터는 됨직한 커다란 분화구 가장자리에 오백년의 전설과 99개의 날이 달린 선 기암들이 빙 둘러 있어 커다란 왕관을 연상시켰다. 바닷속에서 둥근 불덩이가 천지를 삼킬 듯 꿈틀거리며 솟아오른다는 일출봉의 해돋이 장관을 보지 모산 아쉬움을, 성산 일출봉의 옆자락인 해안가로 내려와 한접시의 멍개를 벗삼아, 소주 한잔에 집어 넣어 마시니, 가슴을 적시는 싸르르한 맛이 이만 장관을 다 보고 난듯한 기분을 심어 주었다. 남도의 가락이라도 곁들여 흥얼거렸더라면 더한 즐거움이 되었을텐데…. 바람이 있어 더 운치스러운 억새들의 춤을 바라보며, 제주도 내에서 유일한 폭렬공기생화성(밑에서 폭발하여 폭발물이 쌓이지 않고 다 분출되어 뻥 뚫린 분화구)인 산굼부리를 마지막으로 우리 일행은 한라산 등반 팀과 합류하기 위해 한라산 중턱으로 갔다. 한라산 등반팀이 아직 내려오지 않아, 잠시나마 비행기 탑승에 이상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다행히 모두 제주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굉음을 울리는 광주로 날아오르는 비행기! 2박 3일동안 역사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 의미를 되새기게 한 제주도의 4·3항쟁의 현장들, 그동안 별다른 뜻없이 대했던 화사한 유채꽃과 억새의 무리들! 이제야 그들의 몸짓에서 제주도의 새로운 의미를 깨달았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심어준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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