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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5 | [파랑새를 찾아서]
수 많은 사람의 회환 서린 그 정상을 밟는다 지리산-추송리에서
조연 산모임「두류패」회원 (2004-02-05 15:50:27)
이 계곡에 들어서면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았고, 사상적으로 몰리어 산속에 숨어 살았던 사람들, 살아있다는 안도감보다는 치욕속에서 짐승처럼 쫓겨다녔던 사람들, 그들과 가족이 되었던 탓으로 같은 땅에서 원수보다도 더 미워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가슴조이며 이 골짜기를 넘나들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나 그러하듯 순수산행 할때, 이 지리산을 찾아들 때 느껴지는 것은 허망도 아니고 회한도 아니다. 이 산에 한을 묻지도 않았으며, 한을 남기지도 않았고 이곳에서 이별을 하지도 않았었다. 현대사의 현장에 와 있다는 것, 그 품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그 절망의 늪에서 한번도 희망이라는 것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짐승도 견디지 못했을 세월을 지내면서 신령스런 이 지리산이 그들을 살릴수 있으리라 여기고 허망의 정열에 몸을 바쳤던 이 지리산에 다가간다. 이 골짜기는 어떤 몹쓸인연과 애증이 난무했을까. 무심한 바람도 이 골짜기를 스쳐지나지만 사연은 담고 갔을 것이다. 이곳을 발달된 등상장비와 화려한 겉옷과 고급화된 등산화를 신고 들어선다. 상쾌한 공기가 가슴깊게 들어온다. 사람들이 숨어들었던 이 골짜기에 우리는 스포츠인 등산을 하고 있다. 멀리 동녘에 하얀 능선의 실루엣이 보인다. 추송리 입구는 드문드문 산수유가 피어있다. 봄이 산자락에 들어와 있다. 이제 봄은 시작이다. 북쪽 계곡인 국골은 지금도 하얗다. 봄이라 여기고 쉽게 달려든다면 그 계곡은 접근을 허락지 않게 된다. 「하얀거미」라는 애칭이 붙은 알프스의 악명높은 북능처럼 악산이나 험난한 암장은 아니지만 하얀지네 형상의 국골이 마을을 벗어나자 눈앞에 꽉 들어찬다. 국골에서 오른쪽으로 길다란 누에 형상의 능선이 마을 앞까지 이어진다. 초암능이다. 하룻만에 국곡을 직등하여 하봉이 이르게 된다. 천왕봉(1920m) 그 다음 중봉(1870m) 하봉(1800m)이 봉우리의 명칭을 일본인 측량사들이 의도적인 경멸투의 명칭으로 붙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1800m 의 산이 어찌 하봉인가. 하룻동안에 등정을 하려면 이르 새벽 길을 떠나야한다. 꼭두새벽 달콤한 잠을 거부하고 이 산 기슭에 와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하품하던 동료들도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다. 오늘의 산행을 미루어 생각한 것이다. 한때는 산사람들만이 즐겨입던 옷이 이제는 모두의 일상복이 되버려 우리 산사람들은 옷자랑 거리가 없어진 셈이다. 설인 같은 오리털 파카에 중세시대 기사들의 신고 있을듯한 등산화는 도심에서 호기심과 경외감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즐기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모두가 그렇게 입고 다녀도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은 책들이 커다란 서적의 서가의 가득쌓여 있을지라도 한쪽 귀충이에 취미 오락난이 있는데 그중에서 낚시·관광·바둑등 있는 코너 한쪽에 산안서적은 덫에 갖힌 쥐처럼 놓여있다. 그곳에 산혹들려 산사람들의 모험담을 펼쳐본다. 등산이라는 개념이 근대에는 지질연구나 보석 연구가들이 그 목적을 위해 등정을 했다가 1900년이 되어서야 오직 산에 오른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등산이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람이 경외스러운 산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을 때 어쩌면 산골사람이 약초를 캐기위하여 깊은 골짜기에 자연의 일부처럼 조용히 들어왔다가 없는 듯이 내려갔던 이 산속에 현대식 등산복과 장비를 갖추고 산능과 골짜기에 마구 들어갔다. 서로 조심하며 지내던 사람과 산짐승과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산능성이로 넓어진 등산로에 들어차있는 그 사람들은 함부로 난동을 부리듯 산생활을 하여 산은 놀이터와 유흥장이 되어 산사람들은 그들을 피하게 되었다. 그곳을 떠난 산사람들은 깊은 계곡으로 들어갔으며 짐승처럼 내몰려 그곳을 넘나들고 있다. 그후 산사람들은 그곳의 주인이며 터를 잡은 산짐승들을 몰아냈다. 우리의 신앙과도 같은 영적인 짐승으로 여겨진 호랑이는 사람을 헤친다는 명목으로 일제 시절 포수들의 영웅적인 활동으로 이땅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우리의 표범도 1960년도 이 지리산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였을 뿐 지금까지 동물원 아닌곳에서 그것들을 본 사람은 아직껏 없다. 10여년전 세석평전 밑 거림골 입구에 큰건물 옥탐에 세워진 대형광고판 크기의 표지판이 있었다. 「곰 출현 지역」이라는 글귀와 반달곰이 만세부르듯 그려져 있는 표지판이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그 간판도 사라졌다. 그러한 짐승은 과거완료의 시간속에서만 존재했던 셈이다. 지금 이 능선과 계곡에는 3500만년 화석 그대로의 형상으로 진화되지 않고 있는 멧돼지가 군생하고 있고 작은 야생동물이 많지않게 있다. 여기 야생동물마저 이곳에서 사라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연에서 지켜야 할것이 없는 셈이다. 처음 이 세상은 깨끗하고 맑고 더할 나위없는 아름다움이었을터인데 깨끗한 공기와 깨끗한 물을 항상 가까이 두었을 터인데, 세상에 있는 탐욕의 주인이 욕망의 하인되어버려, 우리가 지금 간절히 찾아다니는 이 계곡과 산속이 어픔을 겪고 잇다. 이 지리산은 너무커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온 나라를 움켜쥐던 시절 작전도로라는 이름이 되어 남북으로 (실적-벽소령-의신)허리가 잘리었는데 몇십년이 흐른후 스스로 무너지고 변하여 풀과 나무가 자라서 그 아픔을 스스로 치료될수 있을 즈음, 다시 길을 만들고 있다. 이제는 관광도로인 셈이다. 몇푼을 얻고난후 참으로 소중하고 영원한 것을 잃어버릴 터인데도. 우리는 자연의 정복자여서는 안된다. 자연의 친구이어야 한다. 추송리를 떠나 계곡에 한시간 넘게 들어서있다. 아름드리 신갈나무들이 거인처럼 우뚝 서있다. 겨우내 눈에 눌려 부러진 설해목이 드문드문 있다. 바닥은 잔설이 있다. 자작나무숲은 봄과는 아주 멀리 있다. 죽은 듯 서있는 자작나무 숲을 지난다. 바닥에 놓인 눈이 발목까지 올라온다. 지네 형상으로 똑바로 몸을 세우고 있는 계속 입구에 들어선다. 이제부터 본격 등반이 시작된다. 바람이 차갑다. 마을은 봄이 왔다. 고로쇠 채취가 한 장이고 이 시간쯤이면 관광객이 떼지어 있겠지. 귀끝이 따갑다. 방한모로 귀를 덮는다. 바닷가 사람들에게 바다가 아름다운 풍경일 수만은 없듯이, 산사람들에게 산은 멋진 풍광만은 아니다. 산은 그 아름다움을 특히 겨울산은 장엄한 자태를 뽐낸다. 우리는 그 산을 찬양하고 살아있는 실체인양 숭배하기도 한다. 그러나 눈덮힌 이 산이 삶을 가로막기도 한다. 거대한 산능선과 계곡이 희생을 요구학도 하고, 폭풍설이라도 도중에 만나거나 렛셀(눈덮인 산에 기을 개척하며 전진하는 것)이 되어있을 것이라 믿고 희망차게 능선에 올랐으나 허리까지 잠기는 눈속에서 아무런 럿셀 흔적이 없을 때 낙담과 당혹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죽음과 삶은 넘나드는 처절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스페츠 사이에 들어잇는 눈을 털어낸다. '이거 장난이 아니네' 겨대로 길을 뚫어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파르고 적설량도 맣아진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추송마을이 장난감 같다. 좁다란 골목길에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깊은 산골 마을인 추송리가 가난을 벗어난 것 같다. 도심지보다 더 비싼 땅값 덕택에 부유해졌다. 깊은 산골 마을이었다. 추송리가 오랫동안 산사람들이 그 깊은 칠선계곡을 들어갈 때 항상 반기던 그 할머니가 없으면 이 마을도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깨끗한 민박집을 지어 운영하고 있는 그분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 산행후 꼭 들르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좋은 음식 간직했다가 사랑스런 손주대하듯 맞이하고 있다. 사방은 음식찌꺼기가 쌓여있는 관광마을이 되어버린 이곳을 들어서면 걸음이 빨라진다. 경쟁하듯 마을 빠져나간다. 마을 냄새가 우리를 몰아내고 있다. 모든 집에 음식점이 되었고 민박집이 되었다. 마을을 빠져나간후에야 걸음이 보통이되고 숨도 그른다. 마을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모두에게 느껴졌음인가. 이것도 변화된 산골마을 사람들의 삶일터이다. 희미하게 중장비의 기계소리가 부드럽게 들린다. 마을은 한참 개척중이다. 초암능 안부의 커다락 입석이 보인다. 고산이 아닌데도 눈길을 헤치다 보면 정신상태가 엉망이 되기도 한다. 집중도 안되고 흥미를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3월말이라고는 하지만 이곳 북쪽 계곡의 날씨는 여전히 사납다. 이곳까지 봄이 찾아들려면 한참지난 후일 것이다. 머리위에 아무것도 없고 하늘만 모일 때 그곳이 정상이다. 우리의 임무는 끝났다. 구름이 수백의 계곡마다 뿌옇게 내려 앉아있으며 천왕봉이 코앞에 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정상은 이곳이다. 처녀봉 등정도 아니고 생애를 걸만한 대원정도 아니며, 위험을 도처에 있으나 목숨을 건 상행도 물론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녀가고 지나치고 머물렀던 그 정상을 밟은 것이다. 하봉이라는 명칭은 참으로 모욕적이다. 아름다운 삶을 잠깐 생각해 보기도 하고 가벼운 감격도 느낀다. 더할 나위없는 순수한 기분이 몸을 감싸기도 한다. 산능의 차가운 바람소리를 듣고 있으면 생명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수많은 세계가 있듯이 등산의 세계라는 것도 있다. 옛날 길모퉁이를 돌아가다 한 사람을 만나 생애를 나누듯이 우리 산사람은 참으로 운명적이다. 초고속 정도통신이 이 세상을 거미줄처럼 덮고 있고 모든 것이 숫자에 담아지는 디지털시대이며, 과학의 발달은 아무런 예측도 할수없게 되었다. 급변하는 최첨단 시대에 사는 우리가 하나의 지리적 형상인 산에 온갖 산염과 사상과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등정후에 영광도 보상도 없다. 다른 스포츠처럼 관객도 없고 격려도 없다. 낯익은 산에서는 구속없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으나 더 높은 곳으로 바람은 새로운 모험의 세계로 유혹한다. 희망과 야심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우리가 살아야할 세상을 앞질러 가늠해본다. 정상에 서보면 새로운 세계가 보일 것이라 착각하며 살았던 젊은 시절, 꽃같은 청춘을 묻어버린 후배들. 겁없이 지금도 덤비는 소중하고 귀한 젊은 산악인들. 또는 젊은시절 그렇게 소중하고 귀한 것들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눈에 보이는 것만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다가올 것 만이 소중해지면 추억이 많아지게 된다.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산생활에 다 바치고 이제는 쇄잔하여 활동을 중지한 채 특이한 것을 욕망하는 것으로 은밀한 만족을 느끼고 살고있는 선배들. 이들 모두 인생에 산이 처음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던 때, 산을 즐기기보다는 그 산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어떤 운명의 예감에 몸을 떨었으리라. 지금 정상에서 내려갈 궁리를 한다. 다시 돌아가야 할 그 일상의 삶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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