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5 | [서평]
지역문화탐구의 새로운 가능성 찾기
《남민》5집
김병용 소설가
(2004-02-05 15:52:04)
'지역문화'라는 것의 정의는 무엇일까? 과연 '지역'과 '문화'라는 두 개의 단어는 연쇄, 합체로 사용될 수 있는가?
의문은 늘 문제상황으로부터 발생한다. '지역'이란 어휘가 내포한 기존의 정의, '문화'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현재의 동시대적 인식 지형도…. 이 모두에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고, 우리들은 이러한 변화에 추동되어 우리들의 인지 정보를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몰렸다. 이러한 변화를 흔감하게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이제 한 개인의 개성적 선택의 범주라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세계화'니 '지방화'니 하는 담론이 정치권 주도의 책략적 논의와는 또 다른 층위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실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더 이상 지역이 '로컬'개념의 적용을 받는 곳은 아니다. 지역은 이제 '섹트'화하고 있고 이런 추세는 현재의 굴절된 정치상황과 맞물려 '섹셔널리즘'으로 전개되는 형편이다. '지역이기주의'라고까지 극단적으로 매도되는 현재의 지역'섹트'화 추세는, '섹셔널리즘'이 주는 부정적 뉘앙스를 청산하지 못한 실정이지만, 자생력 강한 '섹트'의 긍정적 이미지가 자리잡는게 아주 먼 훗날 일은 아닐 것이다.
이같은 정치사회적 '섹트'구출작업과는 또 다르게 제 나름의 질서가 진행되는 분야는 'OO문화'라 이름할 수 있는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제반 경향'이다. 문화 유통의 속성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중앙집권식 성향'이 될 터인데, 특히 한 당대의 문화에서 집중의 성향은 매우 농후하게 드러난다. 극서은 중앙을 중심으로 하여 확산되고 전파력 강한 유행성을 가지면서, 주위의 것들을 흡수 복제하는 응집력을 갖는다. 마치 구르면 구를수록 커지는 눈덩이처럼…. 문화가 가지는 이같은 견인력 또는 힘의 편방향성은 대표적으로 어떠한 특정 공간을 상징적 시발점으로 삼게 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라면 모든 문화의 중심은 서울이라고 단언해도 무방하다. 유·무형의 온갖 문화적 역량이 서울로부터 퍼져나오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중앙집권적 속성과 주변의 중심지향적 양상은 '근대주의 이념'의 확산 형태와 매우 흡사하며, 근대주의의 생리라 할 '모든 것은 진보한다. 시대적 변화를 뒤따르지 못하면 도태된다'라는 강박관념과도 맹목적 주술성이란 점에서 닮은 꼴을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지역'의 섹트화 추세와 '문화'의 중앙집권적 속성은 쉽사리 융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역문화에 대한 정의나 그 역할을 명쾌하게 규정하기도 쉽지 않다. 중앙문화에 대한 '안티 테제'의 성격, 혹은 '진화'의 완충과 반성을 의미하는 '지역'이나 '정체'의 역할 정도가 그동안 논의되어왔고, 중앙문화의 '남성적인' 진격과정중에 간과되거나 묵살된 것을 온축(蘊蓄)하여 균형잡힌 문화의 수평축을 유지한다는 '여성적'역할 인식이 '지역문화'에서 긍정적 인자를 끌어내고자 할 때 쓰인 수사어의 전부였다.
『남민』, 특히 이번 5집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역의 '섹트'화 추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는 점과 문화의 집중 성향에 대한 의미있는 도전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섹트화 추세는 바람직하지만, 현재의 정치 지형도상의 군웅할거식은 곤란하다'는 식자들의 인식은 공통된 것이나, 그 대안은 전무하거나 제 각각인데, 『남민』은 그 대안으로 '토픽'에 따른 분화를 주창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화두는 무엇인가, 그 화두를 풀어가는 방식에 따라 집단별로 나뉘자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로 '토픽'을 동시대인 모두가 토픽으로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되지만, 이러한 분산과 재결집의 방식이 성공적을 hruf말을 맺는다면, 최소한 정치지리상의 '중앙'과 '지역'의 대립 구도는 타파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문화지형도의 재편성을 목적으로 하는…
이번『남민』5집의 '토픽'은 환경이다
작년에 타계한 생명운동가 장일순씨, 자연농법을 몸소 실천하는 한원식씨와의 대담이나 김환기(전북대 토목공학과) 교수의 「전북의 지역개발과 환경」, 장재우(전북대 농경제학과)교수의 「환경과 농업」, 장필진(전북대 환경공학과)교수의 「가두리 양식장이 수질오염의 주범인가」, 여성 직거래 모임 "한울회"의 활동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인 이덕자씨의 글 등은 집요하게 인간과 환경의 문제를 천착하고 있는 것들이다.
'환경문제'를 다룬 위 원고들은 각기 다각적인 접근 방식을 보인다는 것과 구체적 실천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는 것 이외에도 잡지 편집 일반상에 크게 참고할 만한 또다른 장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5집을 발간하게된 『남민』은 그 창간호를 꼭 10년 전에 냈다. 10년 동안에 5집이라면, 쉽게 『남민』이 겪어온 고초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열악한 지역 출판문화의 제반 상황이나, 기획 소재의 빈곤 등 '지역종합문화지'를 표방한 『남민』으로서는 넘어야할 난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사정 탓이겠지만 이번 호에 실린 글을 읽어보면 이미 2년 전에 책의 대강은 준비가 되어TDma에도, 그 출간이 이제야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느 정도 시사성을 목적으로 하는 잡지에서 이는 치명적인 결격사유로 지적될 수도 있는 일이다.)
대담원고의 생명력은 응답자의 사회적 명망이나 하는 일의 중요성에 있다기 보다 질문 유도자의 사회적 통찰이 빛난 때 살아나게 되는데, 두 개의 대담은 이런 면에서 요즘 보기 힘든 '힘있는' 원고라 할 수 있다. 흔히 응답자에게 끌려가기 마련인 대담방식을 탈피했다는 점, 또 구술정리의 정밀함으로 인하여 행간 이외의 생각이나 분위기까지 읽게 만든 점이 돋보인다.
3명의 교수의 원고는 제각기 우리들이 단선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환경보호에 대한 생각을 수정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김환기 교수의 글을 개발도상국가가 안고 있는 숙명이라할 국토개발의 이면적 성격을 파헤쳤을 뿐 아니라 현재의 국토개발방식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고, 장재우 교수의 글은 농도 전북이 소지한 역사적이고 당시대적인 임무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데, 특히 땅과 흙이 재생과 생산의 원동력이란 점을 환경론으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다. 장팔진 교수의 글은 구체적인 분석 결과를 통하여 우리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환경오염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두리 양식장'을 수질 오염의 죄인으로 몰아부친다는게 어쩌면 우리들이 범하고 있는 환경오염의 죄의식을 벗기 위한 '탈출구'일 수도 있다는 지적. 참으로 따끔하다.
이덕자씨의 글은 환경을 생각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유대관계와 그들의 사고, 생활방식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지만, 우리들이 하나의 이슈에 대해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며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점을 재삼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 교훈적이다. 숩게 용납하고 묵인해주는 온정주의의 틀 안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안주해왔으며, 그러한 게으름 탓이 우리들 삶의 호나경이 망가지는 것을 스스로 조장해온 것은 아닌가!
이외에도 훌륭한 사료가 될 「일제하 보천교 운동」, 새로운 이제올로기 환경의 변화에 대한 체험기라 할 82〈없음〉「중국은 무너지고 있다」와 같은 글은 집단과 개인이 상호침투적인 동시에 길항의 관계라는 인류의 전통적 고민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집단은 개인에게 환경인가, 아니면 개인이 집단의 환경인가… 우리 시대의 '토픽'이 환경에 집중되는 것은 온당한가, 온당하다면 환경하에서 우리들의 다원적인 지향은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 보면 새로운 도전은 늘 우리를 둘러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