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6 | [저널초점]
한국적 인정주의의 역설
천이두『문화저널』발행인
(2004-02-05 16:03:46)
임방울의《춘향가》에는 옥에서 풀려난 춘향이 암행어사 이몽룡과 상봉하는 자리에서 자기를 핍박한 변학도를 너무 괄시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로부터 충효 열녀는 고생 없이는 될 수 없는 법. 따지자면 변학도의 핍박으로 하여 자기가 열녀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니. 그렇게 치부하고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원수를 은혜로 갚는 예라 하겠거니와, 춘향의 이러한 자세에서 우리는 다름아닌 조선민중의 인정주의의 한 전형적 표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인정주의야말로 조선민중의 한(恨)정서의 기본구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판소리의 주인공인 춘향이나 홍보의 행위의 궤적에서 볼 수 있는 한의 구조는 자기에게 한을 심어준 자를 향하여 복수나 결투의 길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고 포용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결국 악인도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면 선인이 될 수 있다는 조선민중의 낙관주의적 발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의 거의 모든 서사문학에 복수의 모티프가 없는 것도 이런 발상과 깊이 관련된다고 하겠다. 이와 안팎을 이루는 것이 우리 서사문학에 일관하는 <행복한 결말>의 구조이다. 우리 서사문학의 기본구조는 <...잘먹고 잘 살았다더라>라는 그 결말의 관용구가 잘 말해주고 있듯이 주인공이 행복하게 되는 것으로 결말지어져 있다. 착한 홍보나 열녀인 춘향이 일시 고생을 겪지만 결국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또한 착한 사람은 복받게 마련이라는 조선민중의 낙관주의를 반영하는 현상이라 하겠다.
어떻든 착한 사람은 필경에는 복을 받게 된다는 낙관주의. 그리고 이와 한짝을 이루고 있는 바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여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는 낙관주의는 우리의 고전문학이 우리에게 끼친 교훈이라 하겠다. 한국인의 인정주의는 이런 낙관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물론 사람이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윤리적 덕목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국인이 간직하는 인정주의는 종교가 가르치고 있는 바 사랑이니 자비니 하는 덕목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인정주의, 모든 것을 너그러이 용서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인정주의는 실제현실에 있어서는 순기능 보다는 역기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숱하게 많다.
우리의 근.현대사의 여러 국면을 돌이켜 볼 때 더욱 그렇다. 일본작가 나츠메 소우세키는 한 작중인물의 입을 통하여 이(理)를 세우면 모나기 쉽고. 정에 기울면 흐르기 쉽다고 말한 바 있다. 정이란 사랑이니 자비니 하는 종교적 윤리적 덕목으로 나아갈 개연성도 간직하고 있지만 정이 이(理)의 뒷받침을 받지 못할 때는 사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령 8.15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각급 선거에 있어서 고질적으로 되풀이되어 온 부정행위의 악순환을 놓고 보아도 거기에 한국적 인정주의의 역기능현상도 적지아니 보게 된다. 그 부정선거의 많은 부분은 기득권자들의 기득권 연장을 위해 비롯되는 것이었으니 이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부정행위자들의 농간에 넘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잘못의 대부분은 그들이 바로 이 인정이라는 급소를 찔린 경우이다. 친구끼리의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동향인끼리의 정리라는 이름으로, 동창생끼리의 정분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돈봉투가 오고가고 잔치가 벌어지고 하는 것이며, 그러한 인정에 보답하기 위하여(물론 물욕이 곁들이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쉽사리 그 인정주의의 공략에 투항함으로써 국민으로서의 자신의 기본권을 내어 주는 것이다.
이런 인정주의의 공세에 함락 당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라 할지라도 이 부정행위자를 준엄하게 고발까지 하는 몰인정을 행사하기는 좀처럼 어렵다. 그러니 그 숱한 부정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나는 법이 거의 없다.
광주의 5.18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는다. 5.18의 희생자 유족들, 그 피해자들은 물론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의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광주항쟁이 빚어진 지 15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 때의 아픔은 가셔지기는 커녕 오히려 퍼렇게 멍이 든 채로이다. 그런데도 이 사건은 아직도 진정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의 공소시효도 이제 얼마 남지 않다.
김영삼대통령은 이를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호소한 바 있다. 말하자면 너그러이 용서하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그의 이런 호소야말로 한국인의 예의 인정주의에 호소하는 전형적인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지자면 5.18이니 망월동이나 하는 말마저도 쉬쉬하던 때에 비하면, 그래도 5.18과 광주를 소리 높여 외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망월동이 성역화되고 피해자 보상문제가 정식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문민정부의 덕이라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의미의 파사현정(破邪顯正)일수 없다. 해방 50년사 가운데 가장 아픈 국면인 이 사건만은 예의 인정주의에 의하여 호도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