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5 | [특집]
정당한 '표'를 보내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의무다
원도연 《문학저널》편집장
(2004-02-05 16:06:03)
기꺼이 '역사적'이라는 수사를 얹혀 줄만큼 중요한 선거가 목전에 다가와 있다. 이제 몇 주만 참아내면(?) 우리 손으로 뽑은 전북지사와 시장들을 갖게 된다. 몇번이나 '물건너 갈뻔'했던 지자제 선거가 이제서야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우리 손으로 뽑은 지사와 시장을 가질수 있다는 것은 새롭고 무척 기대되는 경험임에 틀림없다. 몇 년 전부터 이번 헌 몫을 위해 절치부심 해온 수 많은 '한건주의자'등의 '한건'도 바야흐로 결판날 때가 온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은 '한탕'이 '헛탕'이 되고야 말겠지만)
으레 선거때면 만나게 되는 갖가지 분석과 예고편이 폭죽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예와 다르게 이 분석과 예고편이 정말 실감나게 재미있는 것은 그 대상이 TV나 신문에서 가끔식 용안이나 뵈옵던 높으신 어른이 아니라, 늘 듣던 이름들이고 알음알음으로 거개가 엮어져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의 도드라진 특징이 바로 이점인데, 조금 더 사회학적으로 말을 풀자면 이른바 '사회적 친밀도(지역사회의 독특한 Net-work)가 이번 선거에 어떻게 반영될 것인가 하는 점이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다. 최근 십여년간 깨지지 않은 지역분할구도의 신화가 재현될 것인가, 아니면 화끈한 이변의 연속으로 새로운 정치판도가 짜여질 것인가?
그러나 이 시점에서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지 선거를 둘러싼 한판승부가 아니라, 선거가 끝나고 (누가 당선되든)나서 지역사회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루 끝없이 강화되기만 했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무너지고 지방화와 분권화가 가속화 하면서 겪게 될 다양한 지역사회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은 좀더 거시적인 안목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가 갖는 의미가 과소평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난4년간의 도의회가 다소 실망스럽고 정착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면, 이번 선거는 그같은 불완전하고 과도적이었던 지방자치가 비로소 완성된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지면 지난 4년간의도의회에 대한 각종의 평가에서 드러났던 지방의회의 난맥상을 일단은 좀 너그럽게 보아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거의 30여년만에 부활한 지방의회가 더할 나위없이 성공적이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난 4년의 광역 및 기초의회에서 보여진 작은 성과들은 소중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번 선거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는 지방자치제에 대한 섣부른 기대 역시 금물이다. 30여년의 공백을 넘어서 사실상 최초의 근대적 지방자치에 돌입하면서 조금은 느긋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의 근거없는 자신감
다시 이번 선거로 돌아가보자. 지난 14대 총선과 대선을 겪으면서 전북지역은 민주당과 DJ에 대한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냈지만 그 이면에 움직이던 한편의 정서는 '이제 할만큼 했다'는 것이었다. 87년대선 이후 이른바 민주당의 '싹쓸이'는 크게 어긋나지 않고 벌써 10여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셈인데, 그래서 이번 선거 역시 전북지역에서는 민주당의 압도적인 우세가 점쳐지고 있고, 그런 가운데서도 '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는 예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변'을 점치는 쪽의 근거도 이번에는 꽤 치밀한 편이다. 우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격언과 함께 10년 동안 열심히 밀었지만 별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이번 선거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선거가 아니라는 집권여단의 이데올로기적인 공세도 만만치 않게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달 전 이 지역의 모대학에서 했던 조사결과 단체장에 정치인이 당선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전체의(1,500개 표본) 70%를 상회했다는 사실은 그냥 넘겨볼 일이 아니다. 그만큼 그동안 여당이 들인 공력이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지난 91년 선거에서 나타났듯이 선거구의 범위가 작을수록 투표율이 낮고 정치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지역사회의 네트웍이 작동할 여지는 더욱 커지는 것이다.
더욱이 여기에 도저히 정세를 점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은 근래들어 전북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민주당의 거듭되는 실착이다. 이 지역 국회의원들이 공천과정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정치력부재와 난맥상은 잘 차려진 밥상을 스스로 엎은 격이었다. 최근에 택시를 타거나 음식점에 들러보면 예전처럼 '앞뒤 볼것없이' 민주당을 찍겠다는 열성파들이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것이 바로 느껴진다. 음식점에서도 민자당의 실정을 비판하는 열띤 목소리보다는 민주당의 실책을 비난하는 감정섞인 '어디한번 혼나봐라'는 목소리가 더 많이 들려온다. 대학사회의분위기도 '차라리 투표 않겠다'는 선언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래봐야 민자당만 좋아진다는 것을 알지만 '하여튼 도저히 못참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지역에서 민주당이 갖는 자신감은 상당히 근거를 잃어버린 셈이 아닐까. 칼포퍼의 말마따나 역사란 정말 비이성적이고 변덕스러운 '인간적'인 면모가 있는 것일까.
'인물론'과 '중간편가론'
이번 선겨전의 쟁점구도는 역시 전통의 '인물론'과 '중간평가론'이 될 것이다. 사실 그동안 몇 차례의 선거에서 번번히 쓴잔을 들었던 민자당으로서는 이를 꽤나 억울하게 생각하는 듯한데, 그것은 지역정서에서 '그저 민자당만 아니라면'하고 안타깝게 여겼던 몇몇 인물도 실제로 있었고 여야가 뒤바뀌긴 했지만 이번에는 동정표가 몰릴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번 선거전 역시 양 진영의 고전적인 레퍼토리가 다시 불려지는 상황이 될 것이다. 문제는 10년 동안 민자당이 애창해왔던 이 고전적인 레퍼토리가 이제쯤 약발(?)이 통할 수 있는 시기를 맞이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인물론'을 중심으로 한 '지역개발론'과 '홀로서기론'이 여당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무이한 비장의 카드인데, 이에 맞서는 야당의 입장에서는 탄탄한 지역성서에 기대는 전형적인 바람몰이의 양상이 재현될 것이다.
그런점에서 초반에 민주당의 전북도지사 후보경선에서 유종근 후보가 당선된 것이 민자당으로서는 뼈아픈 점이다. 적어도 민주당으로서는 최상의 카드를 뽑아든 셈이고 이 대목에서 민자당으로서는 '살림꾼' 대 '정치인'이라는 '인물론'만으로 맞대결하기가 다소 불편해진 까닭이다. 민주당의 지사경선은 여러모로 신선했고 그만큼 호평을 받았다. '국제 경제통'과 '국내 경제통'의 대결로 그동안 이 지역에서는 보지 못했던 참신한 정책대결과 인물대결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자당의 전반적인 선거전략이 흐트러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카드는 인물과 지역개발에 대한 강력한 자신감 외에 별다른 묘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후에 전주시장 후보경선을 둘러싸고 벌이진 최악의 상황은 민주당으로서는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곤혹스러운 입장에 부닥쳐 있다. 그 상황이 어느쪽으로 결판나든 민주당이 이 지역에서 받은 상처는 결코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동안 전북지역에 대한 민주당의 인물투자가 얼마나 인색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은 민주당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렇다고 민주당의 십년 아성이 쉽사리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당으로서는 전국적인 선거전력인 김영삼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를 들고 나올 것이고, '육해공 참사'로 대변되는 민자당의 아픈 상처를 여지없이 공격해 갈 것이다. 물론 여기에 DJ에 대한 흠모와 기대도 한껏 자극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상당히 애정이 식은 것이 사실이고 보면 민주당으로서는 예의 황색돌풍에 기대는 선거 전략만이 현재의 우세를 보전하는 길이 될 것이다. 황색돌풍이 어서와서 이 모든 실착을 한꺼번에 다 날리고 '그래도 민주당'이라는 에정확인만을 기다릴 일인데 바로 이 점이 이번 선거읽기의 백미가 된다.
선거읽기와 사회학
이번 선거에서는 투표율이 낮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전북 지역의 경우도 예외가 업을 듯한데, 첫째는 최근들어 20대의 정치적 관심이 무척 낮을 것이다는 점이고, 둘때는 정치적 냉소주의가 전례없이 강하다는 점이다. 또한 87년 이후 그동안의 전북지역 투표율 변화 추이를 살펴보면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면 지속적으로 투표율이 낮아져 왔고, 민주당의 득표율 역시 꾸준하게 낮아지는 현상을 보여왔다. 투표율이 낮아지고, 야당 특유의 바람몰이마저 차단된다면 그것은 민자당으로서의 최선의 상황이 될 것이다. 그런점에서 지난 92년 광역선거 이후 치러진 몇 차례의 보궐선거에서 보여진 민자당의 성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한가지의 관심은 이번 선거에서 지역사회라는 네티웍이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민주당의 전주시장 후보경선과정의 분석에서 얻은 힌트는 선거전이 단기승부일수록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일차적 관계의 밀도가 높을수록 투표경향의 조직적 세가 우수한 쪽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민주당 전주시장 후보경선과정에서 재야의 지원과 양 지구당 위원장의 공개적인 지원을 업고 뛰었던 양상렬 후보가, 지역사회의 네트웍을 조직적으로 맹렬하게 파고든 이창승 후보에게 패배한 것은 그런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다. 이번 선거전이 기본적으로 좁은 지역사회를 기초단위로 해서 치러지는 선거가 되고 야당의 정치적 공세가 크게 성공하지 못할 경우 곳곳에서 '이변'은 속출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러한 기초단위에서의 '이변'은 광역단위에서 '이변'을 낳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다.
정치적 승부에 대한 관심과 함께 지방자치의 미래를 보여주는 중요한 포인트는 각 후보들이 내거는 공약이다. 물론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다양함 함의를 지닌 것이기는 하지만, 정치적 의미보다는 후보들이 지역개발을 위해 내놓은 정책과 공약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이 선거를 바르게 보는 길이다. 특히 도지사 선거에서 대조적인 경력과 관점을 갖고 있는 두 후보가 내놓은 '해외자본유치'과 '중앙정부의 지원'은 중요한 정책적 차별성을 갖는 것이다. 단지 지사선거만이 아니라 광역 및 기초의회의 선거에서도 공약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후보자들의 공약을 평가하고 집행과정을 감시하는 데는 시민조족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한 일이지만, 아직 그같은 시민사회의 힘이 구체적으로 발휘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별 유권자의 입장에서라도 이를 평가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이다. 안타까운 것은 지난 총선 및 대선에서 나타났듯이 각 후보들 사이의 공약이 이렇다할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공약에서의 차이를 읽지 못한다면 최소한 후보들의 약력 사이사이에 있는 행간이라도 집중해서 읽어낼 필요가 있다. 지역의 '살림꾼'을 뽑는다는 것이 자칫 지금까지의 과거행적에 대한 전적인 면죄부를 주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읽어내는 노력은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이다.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하여 재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전주시장 경선과 그 이후 과정에서 악수를 거듭 두고만 민주당은 이어 도의원 공천과정에서도 아낌없이 무딘 정치감각을 과시했다. 90년대 들어 거의 궤멸상태에 들어간 재야는, 이번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제도권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지만 도의원 공천과정에서 전원 탈락하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제한없는 경선으로 표출된 상향식 민주주의의 보이지 않는 함정에 빠져버린 것이다. 재야(이미 재야출신)로서는 그야말로 '조직의 쓴맛'을 톡톡히 본 셈이다. 아마도 이번의 경험은 두고두고 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재야출신의 참신한 정치 일꾼들이 좌절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지난 91년 지방의회 선거와는 달리 기초의회에 상당수 재야출신들이 출사표를 덜져 놓고 있으며, 그런 현상들은 대단히 바람직한 것이다. 변혁을 꿈꾸던 겁 없는 젊은이들이 기초단위에서 일으킬 바람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누가 뭐래도 80년대를 거리에서 보냈던 그들이야말로 풀뿌리 지방자치를 만들어낸 숨은 공로자들이다. 더욱이 투표용지 네 칸이 반드시 일렬로 채워지지 않을 이번 선거에서 기초는 상당히 어려운 싸움이 예견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 미래의 대안세력들에게 박수와 '표'를 보내는 것은 우리(민주시민 여러분!)의 의무인 것이다.
민주당과 민자당은 이번 선거를 통해서 어쨌든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서 많은 문제를 해결했다. 민주주의가 발전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역사는 진보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아무리 시시한 선거래도 거기에는 포기할 수 없는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