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6 | [사람과사람]
어찌할 수 없어 스스로 돌아서는 한의 무게를, 내 인생의 무게를…
살풀이 명인 장녹운
김성식 전북도립국악원·연구원
(2004-02-05 16:09:28)
이리 남성고 부근에 「수성경로당」이 있다. 그 간판과 나란히 「판소리 보존 연구회 이리·익산지부」가 있다. 이곳이 살풀이 명인 장녹운 선생님과 그의 딸 유지연씨의 거처다. 아울러 판소리·장고·무용 학원이다. 말하자면 경로당 한켠에 세들어 사는 형편이다. 장녹운 명인을 나는 공연 무대에서 한 차례 뵌 것 말고는 처음이다. 곱게 쪽진 머리가 단아하다. 아직도 고운 자태가 그대로다. 그리고 그 직후, 그러니까 지난 오월 이십팔일 전북예술회관에서 다시 만났다. 이날은 「문화저널」기획공연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넷"이 공연된 날이었다.
나는 춤을 전혀 모른다. 하물며 춤추는 사람을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도 이 사람의 세상살이를 알아오라니 환장할 노릇이다. 이리를 다녀와서도 실마리를 풀지 못하겠다. 그렇다면 단서를 일단 춤을 보고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이었다. 살풀이 춤을 보면서 나는 내내 시큰했다. 하얀 한복을 입고 추는 살풀이 춤에 굿의 모든 과정이 다 담겨 있었다. 혼을 총하고 그 혼의 원을 풀어주고 해원된 혼과 신명나게 놀아주고, 다시 그 혼을 좋은 저승으로 보내는 과정 과정이 이 짧은 살풀이 속에 다 담겨 있다니.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이 저렇게 움직이는 듯, 움직이지 않는 듯 하는 동작에 다 담길 수 있다니, 그저 신묘할 따름이다. 이날 세시 공연이 끝나고 일곱시 공연에 앞서 이른 저녁을 드셨다. 물론 맥주 한 컵씩 나눠 마시기도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장녹운 선생님은 몇차례 깊은 한숨을 토해 낸다. 아니, 말씀과 한숨의 이어짐이 마치 창과 아니리의 연속인 듯 싶다. 이리에서도 그랬다. 대관절 무엇이 이 분을 이토록 한숨짓게 하는가. 막막하다. 이 분 한(恨)의 깊이와 넓이와 내용을 어찌 내가 여쭈기조차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제도권 교육 속에서 순탄한 서른 남짓 살아온 내가 다만 한 명이 살아온 그 세월의 강 가에 지금 같이 앉아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강물을 유심히 볼려고 애써 볼 따름이다. 그렇게 눈을 쏘고 함참을 쳐다보니 물빛이 조금 보이는 것 같다. 세월강의 몇 굽이가 한숨으로 휘도는 것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첫째는 온 강을 저물도록 흘러오면서 한몸되어진 세상살이에 대한 한숨이었다. "아홉살 때 집을 떠났어요. 아버지 친구 분 중에 조상선(6.25때 월북한 명창)씨라고 계셨는데 그 분이 협률사를 데리고 남원으로 왔었지요. 그 때 구경을 가서는 어린 것이 노래가 좋아서 그냥 홀려 버렸지요. 그것이 무슨 병이지, 학교도 다 내버려 두고 그 때는 왜 그게 그렇게 좋아 뵈던지, 지금 생각하먼 왜 혔던가 싶은디 그 길로 조상선씨한테로 수양딸로 갔어요. 한성 권번에서 공부혔는디 공부도 지대로 못혔지라. 그 때 가니까 팔도창이 쭈욱 앉어 있습디다. 두루매기를 입고 둘러 앉은디서 인제 막 서울로 올라온 계집아이가, 무신 소리를 한마디 해보라는디 입이 떨어져야지. 어떻게나 무섭고 떨리던지, 그냥 오들오들 떨다가 혼만 났어요. 조상선씨가 호되게 야단을 치면서, 너는 암만혀도 소리는 못배우겄다고, 부엌일이나 하라대요. 그렇게 한 삼년 소리 공부 혔어요.
남원에서 태어난 장녹운은 처음에 소리부터 시작했다. 이후 서울을 시작으로 무슨 떠도는 섬처럼 그의 여정은 끝이 없었다. 경상도로 이사가는 바람에 경남 하동에서 살게 되면서 화동 권번에 들어가 홍보가를 배우다가 순천으로 이사해서 순천권번에서 공부했는데 그때가 열네살 때라고 한다. 어디 거기서 그치는가. 광주 권번, 전주 권번까지 처음에는 이사바람처럼 떠돌았지만, 나중에는 그저 운명처럼 떠돌기 시작했단다. "그저 내 혼자 돌아다니는거요, 소리가 좋아서"
당시에는 대부분이 그랬듯이 비록 토막소리였지만 장녹운의 소리 여정은 조상선을 비롯해서 역시 월북한 복동실, 박봉술, 강도근, 홍정택 등 다시 내노라 하는 소리꾼들에게 공부하면서 공력을 쌓아갔고, 권번 생활이 어디 몇 년인가. 가무악을 두루 일습해야 하는하는 곳이 권번이 아니던가. 이때부터 춤 솜씨도 이미 무르익고 있었다.
"춤은 광주 권번에서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살풀이는 전주를 스물 한 살에 순천서 와서 전주 농고 계셨던 정형인 선생님한티서 배웠지요. 그 냥반 춤도 잘추고 농악도 잘치고 참말로 멋쟁이 셨지요. 살풀이요? 살풀이가 어디 모양으로 추는 춤입니까. 살풀이는 한으로 추는 것인디, 한이 어디 그렇게 가벼운 것이요? 사람이 그리워서 쫓아가 잡고. 잡을 듯 말 듯 잡지 못허고, 애통하게 돌아설 때 거기서 바로 가을 감나무 떨구듯 무게가 나오지 않습니까. 어찌할 수 없어 스스로 돌아서는 한의 무게를 내 인생의 무게를, 내 몸뚱어리에다 실어서 춤을 추는 것이 살풀이입니다. 이 손사위 하나만 보더라도 낙엽사위라고, 손을 이렇게 꺽을 때, 공중에서 시름없이 떨구는 낙엽 지듯이 꺾으면, 그 손짓이 가심 속 한을 쓰다듬어 울게 허는 것이지요."
전주에 올라온 장녹운은 쉽게 짐을 풀지 못했다. "전주권번에 와서 봉께 좀 씨지가 않아요. 말도 못허게 씨어요. 전주 기생들은 도도하고 냉정한데, 또 그만큼 품격도 높고 명성도 있었응게 자연히 텃새가 심했지요. 전주에 올라온 근 일년만에 전주 권번장과 기생들이 다 한자리에 둘러 앉아서 나보고 소리를 혀보라고 시험을 본다고 합디다. 거기서 합격 허고는 짐을 풀었지요." 이때는 이미 해방과 인공을 다 겪은 후였다. 전주에서 둥지를 튼 장녹운은 이제 성숙한 예인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권번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하나 둘 해체 되면서 이들은 조직적인 예인 활동을 시작한다. 협률사가 이미 일정때부터 왕성하게 활동하던 최초의 공연 단체였고, 남사당패, 사당패, 국극단, 포장걸립패 등등, 장녹운도 국극단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임춘양 국극단에서 단골 월매 역할을 도맡았다고 한다. "그 때는 인기가 좋았지요. 젊고, 야물고, 훤칠하거, 잘 벌었어요. 지금은 다 날려 버렸지만. 완상동 청학루 밑에 덩실허니 큰 집을 서서 우리 부모님 모셔오던 기쁨은 그 무엇이 비허겄어요. 수궁가, 춘향가ㅓ, 검무, 화초춤, 승무, 살풀이 안한게 없었어요." 요즘말로 하면 토탈 엔터테이너라고 해야 되나 그러다가 60년대말 70년대초에는 국악인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권익과 전통예술의 발전을 체계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국악협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된다. 기금 마련을 위해 창극 '선화공주'를 만들어 전북 순회공연도 하고 전북 부지부장까지 역임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 활동중인 김유해, 정미옥, 성은선씨등이 당시 단원들이었다. 그렇게 전주 생활을 이어가다가 잊어버렸던 살이 다시 돋았는가, 예인들의 본디 삶이 그런 것인가, 느닷없이 전주가 싫어지고 -말씀은 않지만 그럴만한 곡절이 없을소냐-객지 여정이 시작된다. 다시 서울생활을 하던 중 10여년 전에 일생에서 가장 큰 무대를 경험하는데 '한국 명무전'이 그것이었다. 《한국의 명무》를 펴낸 구희서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전주 장녹운씨의 살풀이는 잘 추는 춤, 재주있는 춤이다. 배움의 바탕이나 닦아 온 경력은 든든하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닌 타고난 재주가 느껴지는 춤이다. 훤칠한 키, 치마 저고리의 맵시가 시원한 체격이나 춤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 진지한 자세가 여유와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팔을 들어 장단을 맺는 맵씨가 매력적이다. 들어올린 팔로 장단을 휘감아 뿌릴 때는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감동을을 끌어낼 수 있는 춤이다.
우연히 '한국 명무전'을 지켜보던, 전주에서 올라온 한 관객이 있었다. 호리호리한 키에 너무 야위었나 싶을 정도로 깡마른 이 사람의 은 쾡한 눈을 고정시키면서 일순 전율을 느꼈다. '저것이 춤이구나, 살풀이 춤이 버런 것이구나'싶었다.
이날의 전율이 행여 사라질까 이 사람은 춤춘 사람을 곧바로 찾았고, 장녹운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고, 일사천리로 전주로 모시게 되는데, 이 사람은 당시 전주 백화점 뒷 골목에서 요가를 수행하던 정창권씨였다. '한숲 요가원'을 운영하면서 국악 동호인들에게 요가원을 개방하여 '도드리'라는 동호인 모임도 함께 이끌고 있었다. '도드리'국악동호인 모임에서는 각 분과를 두어 정악모임, 살풀이, 농악, 판소리 모임이 있었다. 정창권씨의 끈질긴 권유에 못이겨 국악 감상 공간 노릇까지 했던 이 무대에 서게 되면서 다시 전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옛 친구도 다시 만나고 이들에게 춤도 가르치면서 보람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 '도드리'모임이 느슨해지면서 생계도 막막해 졌다. 때마침 다행히 국악협회 이리 지부에서 판소리 강사로 초빙되어 결국 이리로 거처를 옮겨 판사소리 보전 연구회 이리 익산 지부에서 국악학원을 따님과 함께 운영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삼년 전에 최초의 개인 발표회를 전북예술회관에서 가졌다. 장녹운이 헤쳐온 세월의 강을 거슬로올라가 보았지만 실은 발목만 적셨을 뿐이다. 어쩌면 물방울만 뛰었을지도 모른다. 허면, 어쩌겠는가, 나의 곤궁함을 탓할 밖에.
거칠게나마 장녹운의 삶을 더듬거려 보았는데 역시나 부평초의 삶 그 자체다. 떠도는 섬이다. 떠돈 사람이 어디 시련 없이 떠돌았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 사연을 엮어 볼 재간이 없다. 책으로 샅샅이 짤라면 두어 권을 될 것이라는 사연을 어찌 그것도 몇 페이지로 짤 것인가.
그 한숨의 두 번째 실체는 그의 극적인 역정에서인 듯하다. 아홉 살에 그저 소리가 좋아서 학교도 다 내버려 두고 서울로 조상선의 수양딸로 올라갔다지 않은가. "그 때는 왜 그게 그렇게 좋아 뵈던지, 그것이 낀가 봐요, 끼. 신기가 없으면 못하는 거여 그것이. 신이 없으면 못혀, 창헐 때는 몰랐는디 춤을 추면서 부텀은 음악만 나오면 가심 부터가 뭣이 와, 그게 인자 끼여, 그게." 명을 믿는다면 그때부터 이미 그의 운명은 결정된 듯 하다. 이후로 "지금은 학원이지만 당시는 권번" 이라는 데를 그저 소리가 좋아서 흘러 흘러 떠돈 이력도 어찌 보면 운명인 것처럼.
그의 나이 열다섯살 때다.
"그때는 일정 때였지. 남양군도 보낸다고 뭣이냐, 정신대 훈련꺼정 받았어, 순천에서. 몇일 후면 떠나게 생겼는데 그때는 결혼하면 안가게 되거든요. 억지로 모리를 올렸지. 갔으면 지금 살아 있지도 않았을 참요, 가면 죽는다. 억지 결혼을 했어. 그 때는 화초머리라는게 있었어. 제가 참 이쁘다 싶으면 돈있고 풍류 좋아하는 양반이 당신 것을 삼아, 관계허고 사는게 아니라 딴디다 눈팔지 마라 그러지. 그러고 나서 열슬쯤 되야서 해방돼버렸어"
"아슬 아슬 했네요?"
"아슬 아슬 항거 보다 원통 허지, 분허고 절통허고. 그 나이에 방패막이가 되어 도라고 억지 결혼을 했응게"
"그럼 초야도?"
"아니지. 그냥 화초머리랑게"
"그럼 정식 결혼은요?"
"열 여덟에 딸애 아버지를 만났어요, 참 사랑했지만 딸 낳고 생이별 했어요. 나한테 너무 무심혀서"
그 후 그는 지금도 혼자다. 이리, 역시 딸 둘 낳고 혼자인 딸과 둘이다. 아니다. 역시 혼자인 어미니와 셋이다. 드라마틱한 역정이 어디 이 뿐인가. 나중에는 소리공부는 하고 싶지만 사는게 빠듯해서 소리 선생도 못 모시고 독공연마 할 수밖에 없었던 삶, 마흔이 넘으면서까지 구성진 수리성으로 관중을 사로잡았던 목이 갈려서 작파하고 춤으로 돌렸던 일, 등등 나는 모른다.
또 있다. 깊은 한숨 토해내는 이유가. "내가 왜 이때 못 태어나고 그때 태어나서 그 고생을 다 했던고. 지금 공부허는 애들은 외려 선생이 달개야혀. 우리 시대는 천만의 말씀, 어디 말 한마디를 제대로 하며, 선생 앞으로 어떻게 지나다녀. 어떻게 생각허면 참으로 한심스러울 때가 있어. 한민족의 대표적인 춤인데 외람된 얘기 같지만 춤은 한에서 우러나오는데 배경음악 때문에 저나마 나오지 장구 장단 만으로 치면 절헥 나오까 싶어요" 그야말로 구전심수의 혹독한 공부를 치러낸 명인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요즘 애들에 대해 마땅치가 않다. 요즘 애들은 똑똑해서 재주나 기량은 훌륭한데 예쑬이 어디 재주나 기량만으로 성숙해지느냐는게 이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거기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곰삭아 있어야 한단다.
그리고 또 있다. 한숨의 실체가.
동료 국악인들은 이미 문화재 지정을 받아서 돈과 명예를 드높이는 반면에 그는 상대적으로 초라하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예인이라면 주요 무형문화재 지정에 대한 희망은 누구나 품고 사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다 문화재 일 수는 없다. 또다시 그러나 현행 문화재 지정에 문제가 없는게 아니다. 주요 휴명 문화재법 제정 당시의 순수한 뜻은 인정한다 손 치더라도 그 시행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순과 불합리한 점들은 많은 명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고 있는게 현실이다. 이 부분은 살집 좋은 딸이 거든다. 따님도 역시 국악인이다. "이분은 저희 어머니 이전에 선배이고 스승이신데요, 어머니라고 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분의 춤은 조선 팔도 다 보고 다녀도 이렇게 좋은 춤 없어요. 요즘 살풀이, 말도 못해요, 심지어 뛴다니까요. 우리 어머니는 옛것 그대로 추어요, 지금 젊은 분들은 그렇게 말 안해요. 국악계가 참 매정해요, 헐뜯고, 솔직한 얘기로 혐오감을 느껴요."
엄두도 안나서 두서도 없지만 맺어야겠다. "살풀이요? 우리춤 가운데서 우리 민족의 옛날 감정과 멋을 가장 잘 간직해온 아름다운 춤이지요. 본디 살풀이란 말은 굿판에서 자왔잖아요. 살(煞)은 독헌 것이거든, 사람이나 물건을 해치는 독허고 모진 기울이 '살' 이잖요. 긍게 아귀 기운이지, 그 기운은 어쩌면 한많고 서러운 기운들이 모질게 뭉쳐서 풀리들 못허고 뒤엉킨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 맺힌 기운을 풀어주는 춤이 살팔이요, 그러자니 자연히 가락이 슬프디 슬프고, 그 슬픈 가락에 한일 싣고 춤을 추지요. 내 한이 내 멋으로 우러나오는 춤이 진짜야, 그러니까 살풀이는 괴로울 때 추어야 제 맛이 납니다. 그리고 이 춤은 무거워야 헙니다. 천근 만근이 되고도 남는 장중한 맛이 있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