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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6 | [문화저널]
박남준시인의 편지 여름으로 가는 길
박남준(2004-02-05 16:19:02)
박남준시인의 편지 여름으로 가는 길 어찌 지내시는가요. 나 사는 일 늘 그렇듯 여전합니다. 오랫동안 세상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떠돌다, 엊그제 돌아오는 길입니다.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항가리 370번지 모악산방, 모악산 그 산자락 속의 외딴집으로 돌아가는 길가에는, 유월의 숲은 무성히도 우거져서 벌써, 좁은 산길을 덮고 키작은 내 그림자를 가리워 가더군요. 지난 겨울 그 마르고 여린 나뭇가지들, 땅바닥에 길게 누워있던 풀뿌리들, 그 어디 어디에 저 푸르고 시원한 잎새들의 그늘이 숨어 있었는지, 문득 이 세상의 만변하는 조화경에 깊은 외경을 느끼고 발걸음이, 멈춰지기도 했습니다. 대자연의 생명력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마당 가득 풀들은 어느새 저렇듯 자라났는지, 누구. 보는 이 하나 없어도 저들마다 새싹이 돋고 한잎, 한잎의 잎새와 줄기를 키워가며 꽃들이 피어가는걸 보니 언제인가 나 먼-길, 아주 멀고 먼길 아예 떠나고 어느 누구 사람의 손길 닿지 않으면 이내 저 풀들 어두운 내방, 방구들에도 솟아 나겠지요. 그때 나 살아온 내 삶의 폐가에 쑥대밭 우거지고, 무너져내린 집터를 회오리 쳐 나갈 바람의 그, 허허로운 노랫소리가 문득 떠올라 쓸쓸해지는군요. 오늘 아침에 마당에 나가 풀을 뽑았습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어느 한가지도 없는 모양이더군요.l 그렇다고 손바닥만한, 작은 마당에 돋은 풀을 뽑는 일이 무슨 그리 힘겨운 노동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한 포기의 풀을 뽑는 일도 마음대로 쉽지 않아서 모질게 마음 다져두지 않고서는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쇠별꽃이며 봄맙이꽃, 꽃마리, 뚝새풀, 개미자리, 꽃들이 피어난 것들 가만히 들여다보면 괜히 눈물이 나더군요. 어떤 것은 꽃이 피었구나하고, 그냥 보면 알 수 있는 크기를 갖고 잊지만 또 어떤 것은 눈에도 잘 띄지 않아서 보기에도 안스러 우리 만큼 작은 모래알만한 고만고만한 것들도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어여쁘지 않은 것 없어요. 한 포기의 저 작은 풀도 저렇든 온 생애의 삶을 실어 어디 어느 곳을 가리지 않고 꽃 피워 내는데 나는 지금껏 무엇을 하며 살아온 것인지, 까마득히 절망스러워져서 이짓이 뭐람, 이짓이 도대체 뭐야하고 한웅큼 뽑아들었던 풀들 놓아 버리고 마음 처연한데, 아숲인지 들려오는 새소리도 눈물같더군요. 올 여름도 꽤 덥겠어요. 이제 여름이 시작되었는데 벌써 이렇게 무더운걸 보면 짜증서러운 진땀을 많이 흘릴 것 같아요. 혹여 그대의 주머니가 비어 배고 몹시 고프더라고 더위만은 먹지 말아요. 여름감기 조심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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